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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기억의 저편63

느닷없는 생의 균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균열대세) 6월. 한해의 반이 지나갈 시점. 그래서일까. 유난히도 얼룩이 많은 것은. 무언가 아쉬워서? 아니면 부족해서? 이도저도 아니라면 무언가 차고 넘쳐서? 그 6월의 복작복작한 풍경에, 올해 한폭의 그림이 추가됐다. 촛불. 쇠고기에서 본격 점화된, 우리네 촛불. 2008년 6월은, 그렇게 촛불로 밝혀졌고, 그렇게 촛불과 함께 뜨거운 여름의 시작이었다. 6월에 활짝 핀 '개나리'덕분이었다. 이 땅의 위정자 '나리'들은, 알고 보니 '개'였다는 사실. 2008년의 6월은 개나리가 활짝 핀 촛불시즌. 내겐 그렇게 기억되겠다. 나는 그렇게, 6월이 아프다. 아래는, 2004년 6월에 긁적였던 에 대한 단상. 그래,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균열을 버티고 견뎌야 하는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해 6월,.. 2008. 7. 12.
당신의 욕망은 안녕하신가! 2년 전, 5월30일 인간사에서 욕망의 중요성을 알려주던 한 노인네가 타계하셨더랬다. 일본인이었다. 몇몇 그의 작품을 통해 감탄을 자아냈던 감독님이셨다. 고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님. 당시, 향년 80세였다. 간암이었다. 역시나 암암암. 엊그제 시드니 폴락 감독님이 그랬던 것처럼. 암은 참 나쁘다. 감독님들 자꾸만 데리고 간다.ㅠ.ㅠ 그런데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님의 간암 타계는 그의 한 필모를 떠올리게 했다. . 간염 퇴치를 목적으로 밤낮으로 왕진가방을 들고 뛰어다니며 어떤 환자든 '간염'이라고 진단을 내리던 아카기 선생. 그래서 별명도 '간장 선생'이던 (돌팔이)의사. 그러나 그의 돌팔이 행세는, 무조건 나쁘다고 쏘아붙일 것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생각을 하게 해주는 측면이 있었다. 그런 액션은 당시의 .. 2008. 5. 29.
안녕, 시드니 폴락 감독님... 안녕, 아웃 오브 아프리카..... 소식은 이틀 전 들었지만, 늦었지만, 그저 '안녕'을 고할 시간이 없었다는 어줍잖은 핑계. 그래서 이제서야, 안녕, 시드니 폴락 감독님... 굿바이, 시드니 폴락 (Good-bye, Sydney pollack)... 현지 시각으로 26일 월요일 떠나셨으니, 3일장이라면 오늘 발인하고, 장지로 모셔진 건가요. 물론 그곳 사정이야 나로선 알 수가 없지만서리. 향년 73세. 암 투병 중 사망. 지난해 에서도 쟁쟁한 모습이었는데,(조지 클루니의 로펌대표였죠. 악을 변호하는.) 이렇게 마지막 소식을 알리시는군요. 돌아가셨단 소식을 접하는 순간, 내 눈 앞에 펼쳐진 건, 황혼을 뒤로 하고 아프리카의 드넓은 초원에 있는 女와男.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 그래요. . 생애 처음으로 스크린에서 마주한 아프리카의 .. 2008. 5. 29.
5월25일, 당신의 가슴 속에도 누군가가 있는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야외무대에서 펼쳐진, 에, '카페 티모르'가 함께 했다. '카페 티모르'의 케이터링을 아주 조금 도우러 간 나는, 거의 6~7년 만에 다시 찾은 (동물원 옆) 현대미술관의 풍경 앞에 약간 설렜다. 더구나 지금은 아직도 봄날.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싱글남의 춘심은 뻥뻥 부풀어오르기 마련~. 그래, 청춘이 소멸된 자리에도 춘심은 되살아나기 마련인데, 내 봄날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게지. 춘심은 또한 여심이라지만, 남심이라고 방콕하란 법은 없잖은가 말이다. ^^ 그런 봄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춘심으로 들뜬 풍경. 많은 이들이 커피나 맥주를 하나씩 끼고, 바람과 풀이 행하는 속삭임과 터치에 기대고 있었다. 물론 그것만이 아니었다. 대니 정의 온몸을 흐느적대게 하거나 들썩이게 만든 섹소폰 연주.. 2008. 5. 25.
'상실의 시대'에 접한 무라카미 하루키 아프게 방황하던 시절을 함께해준 , 혹은 에 대한 여러분의 추억을 들려주세요. 그래서, 내 흩어진 추억의 조각을 직조하자면, 꽁꽁 묶인 채, 생각의 자유 외엔, 없었던 군대 시절. 사실 그 생각조차도, 고참이나 조직의 것으로 세뇌시키던 폭압이 지배하던 시절. 정말 웃긴 것 중의 하나는, 일병 5호봉이 될 때까지 끓인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하고(화장실의 수돗물만 마시는 것을 허락하던), 책을 읽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에이, 설마, 진짜 그랬냐고, 그런 게 어딨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진짜 그땐 그랬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내가 군대라는 조직에 발을 디뎠을 땐 그랬다. 그리고, 그토록 열망하던 '일병 5호봉'을 넘어섰고. 책에 목말랐던 내가, 어느 날 휴가를 나가서, 누구에게 받은 것인지는 기억.. 2008. 4. 26.
가끔은, 김.소.진. 작년만해도 10주기였던지라, ≪소진의 기억≫도 들먹였으나, 이젠, 그 기억도 점점 더 희미해져 갈 터이다. 역시나 소진의 소진(消盡). 1997년 4월22일. 서른 다섯(만 서른 넷)의 나이였다. 그 11년 전, 이십대였던 나도, 김소진이 떠났던 그 나이가 남의 나이 같지 않다. 눈 밝은 사람이었던 소진. 요절하기 1년 전, '젊은예술가상'을 받았던 그는, 여전히, 지금도, 예술처럼 문자의 세계에 아로새겨져있다. 부질없는 짓이지만, 그가 살아있다면, 그는 아마, 한국문학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나, 주변적이고 소외된 것에 대한 애정과 공감을 기저에 둔,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향한, 문학적 필살기를 갖추고. 소설노동자로서의 김소진은.. 2008. 4.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