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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어리석음의 기록

[내 좋은 친구들, ‘F4’와 인사하실래요?] ④ 교양을 만나다

by 낭만_커피 2011. 1. 17.
김규항은 직설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글 또한 그에 입각한다. 모든 것은 좌파적 일관성에서 비롯된다. 한국 사회가 지닌 레드 콤플렉스는 좌파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오도하기 일쑤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상식이자 교양이다. 얼마나 이 사회가 몰상식했는지, 몰염치했는지 보여주는 리트머스다. 이 책을 읽고 자신의 교양을 성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유죄!

- 준수 100자평 -
교양을 만나다, 《B급 좌파》

여기 또 하나의 불온. <씨네21>에 연재했던 김규항의 칼럼은 이랬어. 세상의 똥꼬 깊숙한 곳에 똥침을 날리는 글빨에 시원통쾌한 청량감을 느꼈고, 무엇보다 내 민무늬 정신에 통찰과 사유를 자극했었지.

직장생활을 하던 그때. 나는 하루살이였어. 뭐 제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 일에 쫓기고 마감하는 틈 사이로는 술에 쩔어 지내는 여느 직장인이었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증발시킨 채, 나는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아메바와 같았다고. 이봐, 여기 한 잔 더, 꽐라~


그렇게 지내다가 그 칼럼을 묶은 《B급 좌파》를 만났어. 오오, 이 책, 놀라워라. 거기엔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 교양이 있었어. 당시는 알다시피, IMF를 관통하며, 더욱 강화된 돈지랄과 무교양이 판을 치던 때였지. ‘대박’이 일상어가 되고, “부자 되세요”라는 천박한 인사말이 미덕처럼 퍼진 시대.

그런 시대에 김규항은 혹독하고 삐딱하게 세상의 무교양을 꼬집고 있었지. 아, 나는 이 친구를 만나고서야 그때야 다시 반성을 하게 됐어. 나도 모르게 교양 없음에 편입돼 있었구나, 싶은 깨달음.


그 친구는, 말하고 있었어.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혹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회·문화적 인물․현상들에 대해 우리가 자체 증발시켰던 교양을. 지극히 상식적이고 어릴 때 교과서를 통해, 어른들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였어! 시대가 그걸 박제시켰을 뿐. ‘틀린’ 구석이라곤 없는 지극히 상식적인 교양.

근대화를 스스로의 힘으로 겪지 않고, 남의 손에 이끌려 질질 끌려온 원죄 때문이었을까. 분별없는 열정이 만들어놓은 세상에, 내 친구는 교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지. 뇌에 주름을 새기게 만든, 그래서 너에게 《B급 좌파》를 권한다.

“아마도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일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반드시 자기 힘으로가 아니어도),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교양은 근대적인 사회에 주어지는 축복이면서 더욱 근대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말하자면 교양은 그지없는 진보다.” (pp.62~63)

물론, 나는 아직 ‘교양’을 쌓기 위해 김규항을 읽고, 만나. 그것을 ‘좌파’라는 말로 굳이 연결할 필요는 없어. 다시 말하지만, 그건 상식이고, 교양이니까. 한편으로 그의 정체성인 좌파가 얼마나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인지, 김규항을 통해 절감하고 있어. 오랫동안 우경화 혹은 우파 일색이다 보니, 이곳은 너무 침침해졌어. 교양도 없어지고 상식도 증발하고 원칙마저 휘발된 이상한 나라. 그런 의미에서, 김규항은 교양의 회복! 《B급 좌파》의 형제 격인 《나는 왜 불온한가》(김규항, 돌베개, 2005)를 만나도 좋겠지. 이것 역시 직설이야.

이 친구가 좋아한다는 루쉰(노신)의 말은, “지금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할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지. 네가, 당신이, 그대가 함께 길을 그렇게 걸어갔으면 좋겠어.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아, 묻고 싶은 게 있어. 넌 교양을 어떻게 만나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