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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그 사람 인 시네마

어찌할 수 없는, 가늠할 수 없는 눈빛, 양조위

by 낭만_커피 2007. 3. 15.

그를 대면한지도 어언 20여년을 향하고 있다. 주변의 많은 아해들이 유덕화, 장국영, 주윤발 등에 열광할 때 그는 그들보다 더 내 가슴을, 눈길을 끌었다. 그는 대체로 니힐했고 우울함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무엇보다 (스크린 상의) 그 눈빛이 날 끌어당겼다. 기쁨보다 슬픔이, 희망보다는 절망이, 당당함보다는 심드렁함이 우선 보였던 그 눈빛. 그 밖에도 외로움, 죽음, 비애, 방황, 허무, 부유, 몽환 등...

나는 여전히 (스크린 속의) 그를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배우를 꼽으라면 그의 이름은 항상 최우선 순위에 포함된다. <2046>이후 스크린 나들이가 뜸한데 그의 소식이 들린다. 반갑다. 친구야~ <무간도>시리즈에 이어 다시 만난 유위강/맥조휘와 함께 찍은 <상성:상처받은 도시>, 그리고 리안과의 만남이라 듬뿍 기대되는 <색, 계>. 다시 그 눈빛을 기다린다. 나는 그런 눈빛을 지닌 어떤 이를 알고 있다. 그 눈빛, 참으로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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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오픈아이(www.5pen-i.com)에 기고했던 글이다. 연재물의 첫 시작은 그렇게 양조위였다. 다시 양조위를 읽는다. 내가 보유한 양조위 리스트, <아비정전> <중경삼림> <첩혈가두> <화양연화> <2046>. 어느 것을 골라볼까.

 

어쩌면 그 눈빛에 감염됐는지도 모른다 … 거부할 수 없는 눈빛이 있다. 어쩌면 숱한 연민을 갈구하는, 혹은 세상에 무관심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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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빛은 어딘가로 향해 있다. 그러나 정작 눈빛이 머물 곳은 어디에도 없다.

심드렁함을 전염시키는, 때론 숱한 고뇌의 시신경들이 얽히고설켜 폭발일보직전의 신경쇠약을 가늠케도 하는... 그렇다고 빨려 들어갈 만큼 강한 카리스마를 내뿜지도 않는다. 니힐리즘이 덕지덕지 붙은 그 눈빛. 괜스리 나도 니힐해진다.

그 눈빛에는 어찌할 수 없는 어둠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언젠가는 떠날 애인을 옆에 둔 좌불안석의. 안식보다 불안을 잉태했고, 희망보다는 절망을 감추고 있었고,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소외당하면서도 울음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다. 눈빛은 그렇게 그를 대변하고 있다.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면 그 니힐한 눈빛이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덩달아 그를 담은 DVD도 비에 젖는다. 제길, 우울한건가. 째즈처럼 나른하다. 끈적끈적하면서 채워지지 않는 어떤 텅 빔. 어느 비오는 깜깜한 날, 그 회색빛 풍경을 고스란히 흡수하고픈 욕망에 시달릴 지도 모른다. 나는 그 눈빛에 서서히 감염돼 '후천성눈빛중독증'에 걸린 건지도 모른다.

양.조.위. 스크린상에서 그를 만났을 때 첫 눈에 뿅가는 강한 임팩트는 아니었다. 고만고만한 홍콩느와르의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그는 확 드러나는 꽃미남이나 위풍당당한 영웅의 모습은 아니었다. 의리로 똘똘뭉친 반항아는 언감생심.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늘만이 눈가에 고여 있다.

양조위의 실존을 처음 각인했던 <첩혈가두>. 그는 총을 들고 있었지만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고 친구를 위해 울었다. 성공은커녕 그 위태한 우정마저 송두리째 잃어버린, 어쩌면 팍팍한 사람살이의 일부에 내동댕이쳐진 가련한 서자(庶子)였다. 적자(嫡子)는 그의 몫이 아니었다. 조직이, 사회가 받아들여주지 않는... 나는 이상하게도 <영웅본색>의 윤발이형이나 <천녀유혼>의 국영오빠보다 그에게 눈이 더 갔다. 왠지 알 수 없는 이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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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노래한다. 드러낼 수 없는 어둠과 슬픔과 감추기 위해. 한자락의 비애를 담은 선율이 온 몸을 휘감는다.

그리고 간혹 그를 마주쳤다. 그에게 본격적으로 추파를 던진 <유망의생>에서 그는 의외로 밝고 명랑했다(아니 그런 척했다). 드러낼 수 없는 어둠과 슬픔을 눈빛 깊숙이 박아놓은 채. 창녀촌의 무허가 돌팔이 의사, 유문. 그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었고 그의 세계는 소외받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되고 있었다. 현실을 초월한 것인지, 더 이상 맞대응을 하기 싫은 것이었는지, 그는 세상의 주류에 한없이 무심했다. 입가엔 미소가 있었음에도 누군가의 표현처럼 '저기, 소리없는 한 자락의 비애'였다.

무언지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 … 양조위의 주변에 유령처럼 떠도는 공허함이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빈자리는 신비감이 아니었다. 그는 현실에 일정부분 늘 접점을 두고 있었다. 주변부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던 개인이었지만.

홍콩영화가 날림에 의해 기세등등했던 시절, 그도 다작을 했다. 1985년 <무명경찰>로 데뷔를 했지만 별다른 뽀다구가 없던 탓에 한동안 나의 레이더 밖이었다. 그런 그가 내 속으로 들어왔다. 그의 인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아비정전> <중경삼림> <동사서독> <해피투게더>를 거치며 왕가위에 의해 새롭게 빚어진 그는 <화양연화>에서 장만옥과 함께 그 존재감을 뚜렷이 각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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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그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엇박자의 사랑이 그에겐 숙명인지도...

조금씩 세상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통을 시작했지만 그 눈빛은 여전히 비애를 품고 있었다. <중경삼림>에서 그는 사람 좋은 경찰이었지만 그의 사랑은 일방향이었다. 배신한 아내를 잊지 못한 채 시력을 잃어가는 검객이었던 <동사서독>,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는 연인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해피투게더>에서도. 결국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절이라는 <화양연화>에서도 양조위는 사랑의 엇박자에 슬픔만을 머금을 뿐이었다.

왜 그랬는지 물을 수 없었다. 그는 세속적인 성공의 개념도, 자신이 원했던 그 무엇도 시원스레 성취하지 못한 못난이였다. 그게 눈에 걸렸다. <무간도>에서도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길을 거닐었고 정체성을 잃은 채 떠돌던 방랑자는 죽음으로 생을 마무리했다.

주변부, 그의 보금자리 … 그랬다. 그는 늘 소수였고 무기력한 소시민이었다. 집단 속에 파묻히지 못하고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경계인. 그가 속한 자리는 늘 변두리였던 것이다. 개인에게 닥치는 불행은 집단이나 사회 속에서 함몰될 뿐,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도 없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대 혹은 사회의 격랑에 휩쓸렸고 사지가 꺾였다. 고종석 씨의 표현을 빌자면 '집단이라는 추상 앞에서 개인이라는 구체는 언제나 서자'임을 그는 몸소 보여줬다. 호부호형 못하는 홍길동이 무술이나 율도국은 커녕 저잣거리로 내몰린 것인가.

양조위는 그것을 눈빛으로 얘기할 뿐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스크린 속의 양조위는 적자(嫡子)가 아닌 서얼(庶孼)로서의 주변인을 대변하고 있다. 꺾어져야 할 것을 미리 알고 있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그런 그에게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가 압축판이다. 최근에 본 그 영화를 통해 왜 그의 눈빛에 매혹당할 수밖에 없는지를 알아냈다. 시기적으로 다른 영화보다 빨랐지만 그는 이미 그 눈빛을 예고했다. 격랑 앞에서 별다른 격노를 보이지 않았으며 사악해 질 수 없는 선량한 눈빛만을 그렁그렁 투사했다. 대만어를 할 수 없기에 귀머거리에 벙어리를 맡아야 했지만 그 선택은 탁월했다. 말할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그 아픔은 눈빛을 더욱 아스라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여기보단 자유롭다며 "북극에 가고 싶다"던 <첩혈속집>의 대사는 영화를 빌어 그가 말하고 싶던 건지도 모른다. <화양연화>의 차우처럼 "비밀은 영원히 가슴에 묻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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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할 수 없는, 선량하기 그지없는 그 눈빛을 나는 알고 있다. 그와 정면으로 눈길을 마주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