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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그 사람 인 시네마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크리스찬 슬레이터'

by 낭만_커피 2007. 6. 1.
요즘 뭐 하시나. 크리스찬 슬레이터.

영화 관련 소식보다는 사고를 치거나 염문설 등에만 등장하고 있는 이 안타까운 현실.
커리어 관리 실패의 전형으로 이름이 가끔 들먹거린다.
내 기억으론, 물밖에 보이질 않았다는 <하드레인>이 치명적이었다.

크리스찬은 이제 곧 사십이 될 테고, 더 이상의 모멘텀이 없다면, 아주 쓸쓸히 잊혀질 것이다.
또 모르지만, 불같은 재기의 악셀을 밟을 수도 있다. 물론 할리우드의 필요에 의해서겠지만.
크리스찬의 재능을 소진하고 소비한 그 할리우드가 말이다.

<볼륨을 높여라>나 <트루 로맨스>를 보자면, 아주 열광하고 싶어진다.
그 당시의 그에겐 누군가를 미치게 만드는 에너지가 있었다. 아주 가끔은 그 모습이 그립다.
다시 그의 재능과 연기를 므흣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때가 왔으면 하는 작은 바람.

2003년 오픈아이에 크리스찬 슬레이터를 그리며 긁적인 단상.


살아있다, 사랑한다, 불만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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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 꽤나 거침없고 시쳇말로 '싸가지'따위도 없었다. 그 녀석이 스크린상에서 내뱉었던 말을 들어보자. "젊고 빠르게 살다가 때가 되면 가는 거지, 뭐. 인생이라는 게..."

오! 브라더스. 사람살이라는 거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니란 사실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까발리다니. 별반 인생에 쨍하고 볕들 날 없어 보이는 녀석의 세계관은 그냥 시니컬 그 자체다. 인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입에 거품을 물고 설교를 해 대는 성직자나 선생 등 여러 꼰대들이 들으면 설교나 빳다를 들겠지. 그래도 그 녀석이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듯한 그 말이 왠지 더 진실 같다.

녀석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세상이 너무 진지하면 짜증난다. 엄숙함 같은 건 딱 질색"이라고. 맞다. 그 엄숙함은 언제나 세상을 은폐엄폐하고 현실을 혹은 진실을 왜곡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 질러버리고 속에 너무 많은 걸 묵혀둘 필요는 없다.


삐딱선을 타다...

크리스천 크리스찬 슬레이터. 이 삐딱한 반항아. 그 건들대는 몸짓과 은근히 쏘아대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녀석은 살아있음을 자각하고 쉽게 사랑에 빠지고선 불만 있는 놈들은 가만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 녀석, 이제 잘 나가는 스타나 배우가 아니다. 한때 반항하는 청춘의 아이콘이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탄탄대로를 보장하는 엘리트 코스는 체질상 맞지 않아서였을까. 사생활에서 잦은 폭력이나 마약 사건 등에 연루되면서 인기나 연기력은 하향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그건 왠지 그 녀석답기도 했다. 인생은 어차피 젊고 빠르게 살다 가는 거 아닌가 말이다. ^.^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인생은 모 아니면 도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인생은 그런 선택을 요구할 때가 있다.


볼륨 좀 쪼까 높여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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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륨을 높여라>는 그런 녀석이 처음 강렬하게 각인된 영화다. 국내 개봉당시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던 이 영화는 숨은 다수에게 일종의 '보석'같은 존재다. 뽀송뽀송한 얼굴로 어리버리 고등학생을 연기하던 그 시절, 그 녀석은 참으로 신선했다.

특히 해적방송을 통해 쏘아대는 녀석의 살풀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봉건적 교육 시스템 내에서 획일적인 인간을 양성하고 훈육해대던 당시의 내가 처한 시대상황도 영화의 임팩트에 한몫했다.

낮에는 순진한 모범생에서 밤만 되면 해적방송의 DJ로 화려하게 변신하는 마크 헌터로 분한 녀석은 반항적이면서 비타협적이고 저돌적이었다. 마크는 '또 다른 나'를 여과없이 쏟아냈다. 파괴적이고 격정적인, 또한 성적인 신음이나 멘트까지도.

모범생은 혆실속에서도 반항아가 되었고 싸웠다. 거대한 학교당국과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그것이 바로 그 녀석이었다. 현실에서 무기력한 학생에 지나지 않던 나는 그 녀석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었다. 그래서 그 녀석이 좋아졌고 그 건들거림과 폭발적인 에너지의 발산이 부러웠다. 나는 볼륨을 높이고 싶었고 그 녀석이 볼륨을 높였던 방법을 빌리고 싶었다.


Talk H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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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볼륨을 더 높인 <초보영웅 컵스>를 지나 <트루로맨스>에서 그 녀석은 폭발했다. <...컵스>에서 형의 복수를 한다는 줄거리와는 달리 그 익살맞음과 짓궂음은 인상적이었고 <트루로맨스>는 절정이 아니었나 싶다.

사회 부적응자처럼 슬렁슬렁 세상과 마주대하던 그 녀석에게 닥친 엉뚱한 파고. 로맨스란 타이틀을 달고 있었는데 피가 온 사방으로 튀겼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주윤발을 좋아하고 매춘부를 사랑했던 만화가게 청년, 클로렌스에게 유일한 낙이라곤 토요일 밤 동시상영 극장에서 홍콩영화를 본 뒤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

크리스찬은 세상과 삐걱대던 반항아에서 아예 세상을 왕따시키기 시작했다. 피는 사방에 튀겼고 '트루'에 방점을 둔 엉망진창 로맨스투어가 진행됐다. 그 녀석은 피가 가득찬 잔과 인육을 집어넣은 햄버거를 들고 세상을 이죽거렸다. 부적응자는 선악 어떤 구분도 없이 먹고 살기위해, 아니 트루라이프를 위해 흥건하게 피를 흩뿌렸다. 그 피에 흠뻑 젖었던 그 시절의 기억.

그 녀석은 또 그런 얘기를 했다. "Talk hard"라고. 용기를 가지란 그런 얘기. 내가 꿈꾸는 것 역시 트루라이프였다. 차라리 핏빛으로 뒤범벅될망정 무채색 인생은 싫었다. 그땐 정말 그랬다. 그래서 크리스찬의 무한질주가 마냥 부러웠나보다.

하지만 그 녀석은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탓이었을까. 점차 하강곡선을 그리며 스크린상에서 힘이 떨어졌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일급살인> <브로큰 애로우> <미스터 플라워> 등 그와의 만남은 계속 됐지만 어쩐지 더 이상 반항의 눈빛을 거둔 그 녀석에게서 볼륨을 높일 수가 없었다.

가끔 집에 있는 <볼륨을 높여라> 비디오를 볼 때마다 그 녀석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반항의 기운을 걷어내자 그 강렬함이 힘을 잃은 탓에 녀석을 기억하기 위해 재생장치를 돌릴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과거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기계들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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