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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기억의 저편

어린 마초와 빨강머리 앤

by 낭만_커피 2008. 3. 12.
사실, 당시엔 쪽 팔린 일이었어. 바야흐로,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왕성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거든. 젖비린내를 벗어던지고 이른바 '사내'로 하려는 중딩. 어린 '마초'들은, 이제 사내랍시고, 온갖 잡품을 다 잡잖아. 그런 시절, <빨강머리 앤>이라니. 순정만화에 눈길이라도 줄라치면, '얼레리 꼴레리'의 타깃이 되거든. 두고두고 놀림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 그들만의 리그에서 방출 당할지도 모를 수모까지 당하지. 웃기지도 않은 80년대의 어느 한 풍경.

그렇다. 그땐 꽁꽁 봉인해 놨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어. 난 <빨강머리 앤>의 팬이자 애청자였다규~ ^^ 주근깨 빼빼마른, 바로 그 빨강머리 앤 말이야. 뭐, 애들 앞에서 빨강머리 앤을 봤다는 티만 안 내면 되잖아. 아마 그런 녀석들 꽤 있지 않았을까 싶어. 재밌는 걸 어떡해, 보고 싶은 걸 어떡해.ㅎㅎ

빨강머리 앤은 그렇게 사랑스러운 소녀였다규. 뭐, 방송에서는 우리 앤이 예쁘지 않은 것처럼 할인을 해댔지만, 천만에. 내 눈엔 예쁘기만 하던 걸. 앤만큼 예쁘고 사랑스럽던 만화영화의 주인공도 많질 않아. 진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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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 기억들 선명하네. 너도, 앤 생각하면 아득해지지?*^^* 농사일을 도울 수 있는 튼실한 남자아이를 원했던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줌마의 바람과 달리, 주근깨 빼빼마른 여자아이가 찾아오면서 시작됐던 그 이야기. 아줌마의 그 얘길 듣고서 울어대던 우리 앤.

하지만, 우리 앤을 다시 돌려보낼 순 없지. 어찌 하다보니 매튜-마닐라 남매와 함께 살아가게 된 우리 앤. 그리고 앤이 너무도 사랑했던 그 초록색 지붕이 놓인 집과 앤이 턱을 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거나 간절히 기도를 하던 2층의 창문, 그리고 그 방에서 보이는 하얀나무. 아마 앤이 '눈의 여왕'이라고 불렀다지? 아, 나도 그 집 가고 싶어. 그 창문과 그 나무를 바라보고 싶어. ^^

무뚝뚝하기 그지 없는 마릴라 아줌마였지만, 우리 앤은 그런 것 아랑곳없이 꿋꿋했지. 잘못 굴러들어온 천둥벌거숭이였지만, 우리 앤은 지지 않아! 죽지 않아!! 자기 주장도 강했던 당찬 소녀. 그렇다고, 캔디 스탈도 아니었잖아. 마냥 순하지도 않고, 울고 싶을 땐 울어. 우리 앤을 가장 잘 드러낸 주근깨였지만,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도 만만치 않았지. 뭐, 그런들 어떠하리. 우리 앤은 즐겁잖아. 룰루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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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이애나.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던, 또 하나의 귀여운 소녀. 둘이 만나면 그리도 좋을까. 꺄르르르, 하하호호, 둘은 언제나 함께였지. 다이애나 엄마가 앤과 놀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두 소녀는 좋았어. 그 모습이 어찌나 부럽던지. 어린 마초들은 괜히 무게만 잡는다구. 하하. 그저 난 둘을 놓고, 누굴 사귈 거냐고 물으면 언제나 앤이다. 우리 앤. 아웅 사랑스러워. 봄날의 곰처럼 살앙스러운~

러브러브 모드에도 난 괜히 짜릿짜릿했었어. 흐흐. 넌 어땠어? 그 러브러브 모드. 길버트. 완전 훈남 스탈인데, 집도 부자고, 공부까지 잘해. 더더더구나 성격도 좋아. 거의 완벽한 킹카지. 그래도 그 녀석, 앤을 좋아하잖아.ㅎㅎ 괜히 내가 좋았던 거 있지? 내가, 아마 길버트라고 착각했었나?ㅋㅋ

아, 그 시절의 <빨강머리 앤>을 생각하니, 괜스리 가슴이 몽클몽클해진다. 어린 마초로 길들여지던 시절에 친구들 몰래(?) 봤던 내 추억의 <빨강머리 앤>. 그리고 어느 날, 훌쩍 커버린 우리 앤. 주근깨도 없어지고, 완전 미인이 돼 버렸지. 유후~ 어릴 때 외모가 평생을 가진 않는다는 교훈? 지금도 주근깨 있는 아이를 볼 때면, 앤이 생각나. 그 아이도 앤처럼 훨씬 더 예뻐지지 않을까 해서.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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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난 TV를 통해 방영됐던 애니메이션만 봤고, 책은 읽지 못했는데, 올해가 책이 나온지 100주년이라지? 몽고메리에 의해 창조된 앤이 전세계 소년소녀들의 어린 시절을 얼마나 풍성하게 해 줬는지.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 할아버지의 연출로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한 <빨강머리 앤> 역시. 아, 그 애니메이션의 서정이 갑자기 그리워져.

아마 잊을 수 없을거야. 우리 앤. 아, 나도 때론 소녀이고 싶다. 앤을 그러면 좀더 잘 이해하지 않았을까. 어린 마초가 감당하지 못한 우리 앤의 감성을 함께 느끼고 싶네.ㅎㅎ

우리 앤, 잘 있니? 이젠 호호할머니가 다 됐을텐데, 내겐 영원히 주근깨 빼빼마른 소녀라니. 아, 우리 앤을 오랜만에 보니 괜히 웃음이 나오네. ^^  기분이 쪼아~

☞ 괜찮아, 내 친구 앤이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