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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기억의 저편

▶◀ 안녕, 에니스... 안녕, 히스 레저...

by 낭만_커피 2008. 1. 23.
서른 즈음에, 세상에 작별을 고한 히스 레저에게 보내는 추모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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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wear..."
나는, 갑자기 당신의 그 맹세가 떠올랐습니다.
그 맹세의 뒤. 당신이 말꼬리를 늘어뜨린 뒤. 그 뒤에 품고 있을 당신의 마음.
무엇을 상상하든, 관객의 몫이었겠지만, 당신이 나지막히 읊조리던 그 상황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나만의 환영이었을까요.
당신이 구름의 저편으로 가버렸단 소식을 접하는 순간, 내겐 <브로크백 마운틴>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어요. "I Swear..." 왜 이말이 자꾸 환청처럼 떠오를까요.
혹시, 잭의 뒤를 따르겠다거나, 잭과의 영원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감행한 건 아니겠죠?
설마, 당신, 영화와 현실을 혼동한 것은 아니겠죠? ㅠ.ㅠ

아, 뒤죽박죽이에요.
모든 것은 떠나고 잊혀지게 마련이라지만, 이건 아니라구요. 진짜 아니잖아요.....
아무리, "인류 역사의 모든 위대한 연인들은 지상에서 파멸당했다"(독일작가 한스 에리히 노삭)고 하지만,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는 잭을, 현실에선 당신을 보내야 한다니요!!!
아, 제가 영화와 현실을 혼동하고 있는 건가요. 당신의 맹세를 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하늘이, 지상의 위대한 연인을 질투하여 자신의 처소로 당신을 불러들인 것?
리버 피닉스처럼, 은임이 누나처럼, 천국을 장식하기 위해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데려간 것?
나는, 그저 당신이 떠난 자리가 아파서, 지난 이틀간 내린 흰눈에게 혐의를 씌울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을 데려가기 위한 사신이 흰눈으로 변장한 것이 아니냐는, 얼토당토 않은 누명 씌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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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 메신저 대화명은, "히스레저가 죽었대..ㅠ.ㅠ 명복을 빕니다..."였어요.
아침, 출근하자마자 켠 컴퓨터를 통해 당신의 비보를 접하곤,
나는 잠시, 흔들렸습니다. 움찔했습니다.
그리곤, 메신저에 당신의 이름을 담았어요.
몇몇 친구·지인이 소식을 알리고, 묻고 얘기를 나눴습니다. 진짜냐고, 누구냐고, 너도 슬프냐, 나도 슬프다고...
☞ <브로크백 마운틴>의 히스 레저, 28세로 사망
☞ "히스 레저여, 안녕히…" 애도 물결
☞ [추모특집] 히스 레저의 청춘과 열정이 담긴 12편의 출연작

2008년 1월22일(현지시각), 당신이 떠난 날.
79년 4월4일 생이니, 만으로는 스물 여덟, 그리고 우리 나이로 치자면, 서른.
그래서일까요. 나는 광석이형의 '서른 즈음'가 떠올랐어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한국의 유명한 뮤지션이었답니다. 당신처럼 일찍 요절한. 사실 얼마전, 6일이 그 광석이형의 12주기였답니다.
그 광석이형이 부른 노래의 구절이 머리 속을 맴돌아요.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그렇더라구요.
당신을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니고, 떠나온 것도 아니건만, 당신은 우리와 이별을 고했잖아요. 안녕, 이라는 인사도 없이. "I Swear..."라는, 그 뜻을 알지 못할 말만 떠올리게 하고...
얼마전, 당신보다 약간 어리지만 역시 배우인, '브래드 렌프로'(<의뢰인> <굿바이 마이프렌드>)의 죽음 앞에선 안타까웠지만, 나는 사실, 그에 대한 기억이 그닥 없었습니다. 제대로 꽃피지 못한 배우가 멀리 갔구나, 하는 정도. ☞ 굿바이 마이 '렌프로'
아 그런데 제길, 당신을 떠나보내니, 마음이 정말 그렇질 않네요. 우린 정말 매일 매순간, 이별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자꾸만 각인되네요. 머물러 있는 사랑이고, 머물러 있을 당신들일 줄 알았던 무지 때문이겠죠... 휘유...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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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당신을 에니스랑 떼어내서 생각할 수가 없어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의 그 에니스 말이에요. 그 열정과 오열을 못내 안에서 삼키기만 하던 에니스. 가슴에 돋는 슬픔을 억지로 억지로 억누르던 당신을.
당신의 필모에서 내가 당신을 만난 것도 많지도 않지만. 고작해야 <패트리어트> <몬스터볼> <기사 윌리엄> 정도. 가만보니, <브로크백 마운틴>만큼 당신을 강력하게 맞닥뜨린 필모도 없네요.
오로지 에니스로서 내게 각인됐던 당신.
깊은 강이 되고 싶었던 당신. ☞ 깊은 강이 되고 싶은 남자, <브로크백 마운틴>의 히스 레저
울퉁불퉁 고독과 터프함으로 무장했지만, 예민하고 섬세한 영혼을 지닌 듯 했던 에니스.
어쩌면 당신에게도 그런 에니스가 분명 있었겠지요.
나는, 올해 외화리스트를 보면서, 당신이 배트맨 시리즈(<배트맨 비긴스2 : 다크나이트>)의 악당, 조커의 젊은 시절로 나온다는 말을 듣고선,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답니다.
당신이라면, 그 조커의 고독한 영혼을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이란 그런 기대.

그리고 <아임 낫 데어>.
'밥 딜런'의 어떤 한 모습을 연기했다는 당신.
영화 제목처럼, 진짜 'I'm Not There'를 실현시켜버린 당신.
그 두 영화, 나는 아마 당신을 그렇게 스크린에서 만나겠지만,
당신이 구름의 저편으로 떠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데,
그 영화들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런지.
아무렴, <브로크백 마운틴>도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눈으로 보는 건 글렀어요. 당신의 떠남으로 인해...ㅠ.ㅠ

당신이 떠난 뒤 이러쿵 저러쿵.
당신이 떠난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볼썽 사나운 일부 미디어들은 몹쓸 입방아를 찧고 있네요. 모를 바는 아니고 익히 그 습속을 알만하지만, 그네들은 참, 망자에 대한 예의가 없는 개새끼들이에요. 사람의 목숨이나 죽음에 대해 마비되고, 그를 이용하려고만 드는 참으로 나쁜 속성.
하긴, 망자가,
누군가에겐 세상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어도,
어떤 개새끼들에겐 날이면 날마다 일어나는 일 중의 하나겠죠.
그래도, 당신을 진심으로 애도하는개인들의 물결이 분명 더 많이 존재함에 나는 한시름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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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스였던 사나이, 히스 레저.
앞으로도 이승에서 살아가고 버텨야 할 우리는,
저마다 어떤 추억이나 영상을 움켜쥐고 묻어버릴 수 없는 아쉬움을 안고,
매일 어떤 이별을 거치면서 살아나가겠죠. 버티고 견뎌야 할 생의 무게감도 품고.

조병준 선생님이 광석이형을 생각하며 쓰신 글을 잠시 빌려,
당신을 떠나보낸 슬픔을 대신합니다. 구름의 저편에서는 부디 덜 아파하는 에니스이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슬픔은 언제나 형벌이다.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누가 슬픔을 즐기겠는가. 떠난 자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쓸쓸한 법이다. 그렇잖아도 이미 충분히 쓸쓸하고 허전한 삶인데, 떠난 자를 기억하는 슬픔까지 더해야 하는가. 더해야지 어쩌겠는가. 그게 살아남은 자가 치러야 할 대가인 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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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남겨진 어떤 한 사람의 슬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만나 당신과 결혼했다가, 지난 9월에 헤어졌다는 '미셸 윌리엄스'.
그 사람,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도 당신과 결혼했다가 헤어졌더랬죠. 그는 최근 <인센디어리(Incendiary)>라는 영화에서 남편의 죽음을 맞닥뜨리는 아내 역을 맡았다던데...
비록, 당신과 이혼했다지만,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슬픔이, 나는 못내 마음에 걸리네요... 여느 다른 남은 자의 슬픔보다 더욱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을 테니까요.
히스 당신이 미셸과의 사이에 둔 2살배기 딸은 어떻구요. 하긴, 나의 이런 감정도 당신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요. 이미 당신은 눈 감았지만, 당신의 눈엔 그 두 사람이 얼마나 더더더 밟힐까요...

휴.
역시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의 명복을 비는 일.
어쩌다 당신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영화를 돌려보는 일.
남은 자의 슬픔을 곱씹으면서 당신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