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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무비일락] 슬로우로 가다가 약간 비틀비틀

by 낭만_커피 2014. 9. 28.


<슬로우 비디오>(http://슬로우비디오.kr)에서 혹했던 장면이 있었다. 


마을버스가 바다로 향한다. 상상해봤나? 늘 좁은 골목길과 마을을 누비던 버스가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습. 붕붕붕, 꼬마자동차가 달린다~ 마을버스 붕붕. 그 여정에서 마을버스가 얼마나 즐거워하고 있을지 감히 모르지만, 느껴진다. 



<슬로우 비디오>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봉수미(남상미)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여장부(차태현)가 마을버스 운전기사 상만(김강현 분)에게 부탁한다. 아니 협박에 가깝지만.ㅋ 상만이 운전대 방향을 달리한다. 늘 가던 길에서 이탈한다. 아니, 자유를 찾아나서 본다. 


내가 한 번씩 꿈꾸던 장면이었다. 버스가 늘 다니던 노선을 벗어나 다른 어딘가로 떠나는 순간. 버스에 타고 있던 모두들, '벙' 찌면서도 모두 환호성을 지르는 거지. 그렇게 버스는 달리고, 우리 영혼도 즐거워진다. <슬로우 비디오>에서도 외로운 영혼들이 마을버스 한 자리씩 앉아 바다를 보러 간다. 고속도로를 타고 달린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있을 수 없는 장면이라고 투덜거릴 수도 있겠다. 


나는 이 장면들이 그렇게 좋았다. 그러니 고속버스 톨게이트에서 마을버스를 잡고 가지 못한다고 우겨대는 경찰이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결국 바다를 꿈꾸던 마을버스는 꿈을 접고 다시 돌아오지만, 그것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바다를 향했으니까! 


마을버스도 어쩌면 그런 순간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늘 다니던 출근길에서 방향을 틀어 일상과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가는 것을 꿈꾸듯, 마을버스도 늘 다니는 골목길이 지겨운 날이 있지 않을까. <슬로우 비디오>가 일상의 다른 의미를 건네고 싶었다면, '느림(슬로우)'을 콘셉트로 잡을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보기'로 잡아줬으면 어땠을까. 다르게 보기로 잡았었다고? 그럼 연출력이 아쉬운 거고! 



다소 안이한 만듦새였다. 기대가 있었던 만큼 영화가 끝난 직후 약간 아쉬웠다. <헬로우 고스트>의 (흥행) 성공이 독이 된 것일까. 이야기는 엉거주춤했고, 의미 전달은 미흡했다. 로맨스는 애틋했으나 뭔가 부족한 차림새였다. 차태현의 연기는 선글라스 때문이었을까, 그저 그랬고, 감독의 연출도 밍숭맹숭했다. <헬로우 고스트>의 성공 방정식을 별다른 변주 없이 가져온 듯해서, 아쉬운 점이 많이 남는다. 


바쁘게만 흘러가는 세상에 느리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어보겠다는 의도, 좋다. 그래서 꺼냈을 동체시력.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순간까지도 '슬로우 비디오'처럼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진 사람, 좋다. 대부분의 사람이 바쁜 일상에서 놓치는 것들을 그는 볼 수 있을 테니, '빨리빨리'가 아닌 '느리게'에서 만날 수 있는 삶의 진경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있었다. 



그러나 의도나 등장인물, 소재가 좋다고 다 잘 풀리라는 법은 없다. 바쁜 현대인의 삶에 쉼표가 되어주고 싶다는 영화의 카피는 마케팅적인 수사 같다. 이야기가 더디고 서툴다. 쉬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극중 상황은 납득하기 힘들 때도 있다.  


동체시력을 지녔다는 이유로 따돌림 당하는 여장부(차태현 분)가 가족의 보살핌도 없이 칩거 생활만 했던 것도 이상하다.(그들 나름 화목한 가정임을 초반부에 보여주고 여장부의 성격이 괴팍한 것도 아니다!) 드라마에 빠져 있던 여장부가 "진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가 궁금"해서 나름 큰 결심을 하고 나온 바깥 세상 적응기도 뭔가 매끄럽지 못하다. 물론 상영 시간 때문에 가지를 치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유추하지만 감정이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 여장부가 CCTV 관제센터에서 일을 하면서 한 사람 뒤만 졸졸 쫓는 것은 다른 의미에선 스토킹이 될 수 있다. 좋아한다고 그것이 용납될 수 있는가. 스토커들도 '좋아해서'라는 이유를 달지 않던가. 여장부의 사랑이 순수하고 애틋하다손, 공공의 안전을 위한 CCTV를 사유화하는 것은 지나치다. 나중에 그것이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자를 잡는 장면으로까지 이어진다지만, <슬로우 비디오>는 비약으로 극을 꾸리면서 상황 몰입을 강요한다. 


아예 영화가 판타지였으면 모를까, 판타지도 아니면서 왜 무리수를 두는 것인지 다소 불편했다. CCTV에 나오는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이요, 200편의 드라마라고 하지만, 여장부나 <슬로우 비디오>는 타인의 드라마에는 관심이 없어 봰다. 주인공들의 드라마에도 뭔가 빠져 있는데, 조연이라고 오죽하려고. 특히 석의사(고창석 분)와 심(진경 분)은 왜 굳이 출연했는지 의아하다. 그들의 연기가 나빠서가 아니라 인물들의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아서 안타까워서 그렇다. 충분히 좋은 연기로 활용할 수 있는 배우들이었는데 말이다. 



여장부가 진짜 느리게 흐르는 삶을 사는 것 같지도 않다. 사회 적응이 서툴고 느릴 뿐이다. 영화에서 눈물이 흐를 만한 지점은 분명히 있다. 두 사람의 로맨스가 그렇다. 그런데 첫사랑 봉수미(남상미 분)와 애틋하게 만나기 하기 위한 장치들은 서툴고 작위적이다. 사채 빚에 쫓기는 것으로 설정된 봉수미의 상황도 너무 안이하게 다뤘다. 용역 깡패들이 한 번 헤집고 가고 울고불고 곤경에 처한 봉수미가 나오면 그것으로 끝? 연출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슬로우 비디오>는 욕만 들어먹을 영화인가. 그렇지 않다. 현실 정합성이나 상황적 논리성을 이래저래 따지고 들었지만, 논리적으로만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다. 나름 미덕도 갖고 있다. 차태현의 연기는 믿고 볼 만하다. 차태현을 좋아하고, 찬바람이 불 무렵, 애틋한 로맨스가 가미된 잔잔하고 심심한 영화를 보고 싶다면 <슬로우 비디오>는 10월의 추천영화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아울러, 차태현은 늘 믿고 볼 수 있는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 맞다. 그럼에도 선글라스를 끼운 것은 아쉽다. <슬로우 비디오>를 보면서 느낀 것인데, 차태현 연기의 일정 부분은 그의 눈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알겠다. 그런 그에게 선글라스를 끼우다니, 자연 연기도 안 살고, 영화도 살지 못했다. 감독의 책임이다. 동체시력이 문제였던 건가?ㅋ 


남상미의 연기는 상큼하다. 영화 출연이 잦은 배우는 아닌데, 모처럼 출연한 영화에서 나름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 남상미를 좋아한다면 이 영화를 봐도 좋겠다. 추천한다. 


사랑스러운 배우다. 만세. 나도 따라 만세를 하고 싶다. 파마 머리도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