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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남자가 철 들기 시작하는 때

by 낭만_커피 2012. 11. 17.

(스포일러 있음! 알아도, 영화관람에 크게 지장은 없으리라 여겨지지만.) 


다음에 꺼내는 이 말, 우스개지만, 백퍼 진실을 담은 뼈대 있는 우스개. 

답을 보기 전, 한 번 유추해보는 것도 좋겠다. 


여자가 50대가 넘어설 때, 필요한 다섯 가지는? 


친구, 딸, 집, 돈, 건강.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 50대는? 


아내, 부인, 와이프, 마누라, 집사람.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당신의 모습, 그려진다. 우리나라 남자를 놓고 한 뼈대 있는 우스개지만, 아이슬란드의 이 남자에게도 다르지 않아 뵌다. 



화장실에서 우는 남자


그 남자가 화장실에 앉아 울고 있다. <볼케이노 : 삶의 전환점에 선 남자>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그것은, 온 슬픔을 담은 몸짓이다. 삶의 회한이 묻은 울먹임. 그 소리가 심상치 않다. 무뚝뚝하며, 퉁명스럽고, 가족들에게 심술 궂은 말만 내뱉는데다, 가시 돋힌 행동만 일삼던 남자. 중요한 것은 그 남자, 하네스(테오도로 줄리어슨)는 아버지였다. 우리네 아버지의 전형적인 모습과 다르지 않은 그 남자, 울고 있다. 왜? 


그것은 단순히 오십 넘은 남자에게 닥친, 아내의 뇌졸중 때문만은 아니다. 아내가 쓰러진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겠지만, 그것은 스스로 바다에 뜨지 못한 배였기 때문이었다. 그 눈물은 결국 스스로를 채우지 못한 삶의 공허함과 홀로 서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자의 두려움 때문이리라. 


하네스에겐 그랬던 것 같다. 그는 (아마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섬을 떠났고, 어부의 이름을 포기했다. 나중에 실토하지만, 그는 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부 역시 그의 진짜 꿈이었다. 꾹꾹 아니라고 눌렀으나, 결코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은. 학교 수위로 37년을 근무하다가 은퇴한 그에게 닥친 것은 공허함이요, 무상함. 평생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자에게 은퇴가 주는 충격이란 그런 것이다. 죽을 것도 생각했으나, 결국 그것도 당장 그의 몫, 아니었다. 


한때 가장이었으나 이제는 '뒷방 늙은이(꼰대)'로 전락한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뻔하다. 심술과 심통. 오랜 세월, 뒷바라지만 해 온 아내 안나(마그렛 헬가 요한스토디어)에게 줄 수 있는 건 면박과 트집뿐. 다른 가족들에게도 그는 외계인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존재는 곧잘 무시당하며, 가장의 권위는 안드로메다에 있는 무엇이다. 물론 그것이 그의 은퇴때문에 불거진 것은 아니다. 그는 이전부터 가부장적인 아버지였고, 가족에겐 '불통'의 대명사였다. 


물론, 안 됐다. 불쌍하게 보인다. 애초롭다. 아무리 자초한 것이지만, 뒷방 늙은이도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하네스의 '버럭'은 그런 심리에 기초하리라. 자신을 알아달라는, 내 무력감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절절한 호소다. 몸부림이다. 



그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볼케이노'는 그럴 때 갑작스레 터진다. 오십 넘은 남자에게 꼭 필요한 존재, 아내가 쓰러졌다! 뇌졸중. 그것도 전날, 아내에게 쭈뼛쭈뼛 할 말이 있다며 힘겹게 다가가 모처럼 애정을 나눈 그들이었다. 못난 지아비는 아내에게 수줍은 사과를 건넸고, 아내는 지아비의 어린아이 같은 투정을 온몸으로 받아줬다. 오래된 부부의 진한 교감이 이어졌던 다음날, 터진 볼케이노. 아내가 좋아하는 넙치수프를 준비한 하네스 앞에서 아내가 쓰러졌다. 


그의 외로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명은 여기서도 등장한다. 쓰러진 안나를 보기 위해 병원에 달려온 딸과 아들은 하네스와 뚝 떨어져 앉아 자기들끼리 위로한다. 그 장면을 멀리서 풀숏으로 찍은 장면은 그들이 감정적으로 얼마나 멀리 떨어진 존재인지 보여준다. 아버지, 외롭다. 슬프다. 


볼케이노의 폭발, 그 이후...


             

그런데 이 남자, 변한다. 아니, 이제야 본래 모습이 나오는 것일까. 남자가 철 드는 것도 그럴 때이다. 아내를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의 상황. 아내의 소중함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아니, 알았는데, 쑥쓰러웠는지도 모르겠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 그녀만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쏟는다. 병원에 두지 않고 자신이 온종일 옆에 두고 병간호를 한다. 아들의 반대를 평생을 함께 한 남편으로서의 권한을 내세워. 


잘할 수 있을까? 스크린을 응시하는 나의 염려는 곧 그의 염려였다. 하네스 자신도 그것이 궁금했고 불안했다. 아내의 기저귀를 갈아주며, 몸 곳곳을 닦아주고, 수프를 떠먹이면서, 말 못하는 아내에게 계속 말 걸어주고 책 읽어주기. 그의 삶의 중심은 이제 아내다. 평생 구박만 했던 아내에게 그는 속죄를 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나는 속단을 했다. 그런 그의 정성에 감복해 아내가 깨어나리라는 흔한 결말을 떠올렸다. 아내를 병간호 하는 외에 그가 오로지 매달린 배의 수리. 증조할아버지부터 대물림하여 내려온 그 배, 그것의 재탄생과 함께. 치유된 아내와 그가 배를 타고 멀리 나갈 것으로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틀렸다. 

설마했지만, 나는 살짝 경악했다. 아니, 그가 행한 행동을 수긍할 수 있었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리라. 배는 완성됐다. 손자와 함께 수리한 배는 어쩌면 그가 또 다른 삶의 전환점에 섰음을 보여주는 징표. 배의 존재는 곧 그였다. 배의 난파와 수리,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다시 섬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또 다른 오해를 했다. 기성 영화와는 다른 길을 걸은 영화임을 간과하고, 익숙한 관성에 의해 사유한 셈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가 아내와 함께 할 것이라는 신파를 떠올렸다. 


아내 덕분에 다시 섬으로 돌아온 하네스가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 잊지 못할 얼굴이었다. 그토록 많은 것을 담고, 또 많은 것을 비우는 얼굴이라니. 그 얼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저 얼굴만한 스펙터클은 없었다. 지 아무리 가파른 해안절벽과 드넓은 바다도 그의 표정에 비길 바는 아니었다. 나즈막이 읊조리고 말 나의 감상은 이랬다.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모든 게 조금씩 빛이 바래도, 삶은 짧은 계절만큼이나 전환에 전환을 거쳐 흘러간다.   


(* <볼케이노>라는 영화 제목 때문에 흔하디 흔한 재난영화를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삶에 닥친 '재난'을 다룬 것은 맞지만, 흔하디 흔한 할리우드식 재난영화와는 사유의 지점이 다르다.)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