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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무비일락] 지금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토끼들에게

by 낭만_커피 2012. 8. 18.


정직하고 우직하다. 둘러 가지 않는다. 휘어서 가지도 않는다. 직사광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맞는다. 직구다. 그것도 돌직구. <토끼 울타리>가 그렇다. 스트레이트로 우직한 감동을 선사한다. 가슴을 움직인다. 감동이라면, 격정적인 격랑이 휘몰아치는 감동이 있고, 밑바닥부터 찰랑찰랑 물 차오르듯 서서히 수위를 높이는 감동도 있을 터. <토끼 울타리>의 감동은 후자다. 마음 저 깊은 곳을 움직인다. 먹먹함을 동반하는 감동이다.


그 감동,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도리스 필킹턴의 《토끼 보호 울타리를 따라서 》를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 


필킹턴의 어머니, 몰리가 14살 때 거닐었던 여정을 다룬다. 무려 1500마일(약 2400㎞). 이 길을 가냘픈 발로 따라갔던 소녀의 이야기.


3명의 소녀, 어른도 상상하기 힘든 길을 떠나고 관객의 눈길을 모은다. 


"엄마를 찾아 가겠다"는 일념만으로 똘똘 뭉친 험난한 도피길. 그들은 왜 도망을 가야했으며 왜 이토록 먼 길을 걸어야만 했을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묵직한 발길을 멀리서 관찰하고 뒤따를 뿐이다. 카메라는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 우리도 그 길을 묵묵히 따른다.


"엄마, 보고 싶어요…"


이 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모성'을 향한 자연적인 끌림을 묘사했던 《엄마 찾아 삼만리》와 달리 <토끼 울타리>는 그것 이상의 '자유'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는 왜 인간에게 중요한가. 단지 엄마를 찾겠다는 것뿐 아니라 자유를 찾는 여정. 시대와 사회, 그리고 역사가 소녀들에게 부여한 가혹함이다.


이곳은 1931년의 호주.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귀 백인들, 박힌 원주민을 지배하고 억압한다. '굴러온 돌'인 백인이라는 이름의 지배계급, 1910년부터 '원주민 법'을 제정했다. 이어 지속적으로 호주 원주민 '애보리진'을 말살하기 위한 칼을 빼든다. 그 칼에는 야만과 광기가 묻어 있다. 혼혈을 통해서라도 원주민의 '색깔'을 빼겠다는 어이 없음 혹은 안하무인. 그것이 영화를 지배하는 시대의 공기다.


지갈롱에 살고 있는 몰리와 데이지 자매, 사촌 그레이시는 백인과 애보리진의 혼혈아다. 색깔을 빼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지낸 호주 (백인)정부, 세 자매를 엄마들에게서 떼어내 1500마일이나 떨어진 무어강 보호소로 보낸다. 당시 백인의 피가 섞인 혼혈아는 격리 수용의 최우선 대상이다. 백인의 피로 희석해 백인에 가깝게 만들겠다는 것. '어이없는' 색깔론. 물론 우리의 색깔론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몰리, 노예와 같은 생활도 싫고, 즉 자유가 그립고, 엄마도 그립다. 결심을 한다. 그래, 이곳을 떠나자! 두 동생과 함께 비 오는 날, 탈출을 감행한다. 비가 흔적을 지워줄 거라는 믿음을 품고. "다시 엄마를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제아무리 광활하고 거친 호주 대륙이라도, 그들에겐 그것이 안중에도 없다.


"엄마가 보고플 때, 엄마사진 꺼내 놓고, 엄마 얼굴 보고 나면, 눈물이 납니다~~"라는 노래조차 그들에겐 적용될 수 없다. 꺼내 놓을 엄마 사진도 없다. 곧 그들에게 '엄마'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허나, 정부가 그들의 탈출을 쉽게 허용할 리가 없다.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색깔을 다시 오염시키는 행위다. 소녀들을 수용소로 끌어오기 위한 백인들의 추격이 따른다. '엄마'를 보겠다는 사소하고 소박한 생각 하나밖에 없는 아이들이라고 백호주의는 봐주지 않는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소녀들의 소박한 희망도, 백인만의 울타리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욕망 앞에선 장애물이다.


가냘픈 발자국, 속 깊은 눈


단순한 구도다. 쫓기는 자가 있고 쫓는 자가 있다. 그 긴장감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영화적 구도의 핵심이다.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고 도망가는 자와 "붙잡고야 말겠"다고 추격하는 자들의 대결.


헌데, <토끼 울타리>에는 어떤 기교도 없다. 현란한 사기꾼적인 기질이나 누군가를 골탕 먹이기 위한 술수, 없다. 자연 지형을 활용하거나 추격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기지가 있을 뿐. 몰리는 잡힐 듯 말 듯한 긴장감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소녀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같다.


이 영화의 장점, 바로 거기에 있다. 묵묵히 따라간다. 의도적이거나 억지로 고난을 부여하지 않는다. 흉포한 백인들을 등장시키지도 않는다. 도망가는 자가 있고, 쫓는 자가 있을 뿐이다.


더불어 몰리의 속 깊은 눈이 관객 마음을 움직인다. 그 눈이 이 어린, 그렇지만 여리지 않은 소녀들의 여정에 동참하게 만든다. 진정성을 획득하는 순간! 감독은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는다. 공들여 치장하거나 현란한 컴퓨터그래픽(CG)을 활용하지 않아도 관객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물들, 하나 같이 자기 일에만 열중한다. 몰리와 그의 자매들, 백인에 반대하고 체제 전복을 꿈꾸는 게 아니다. 그저 엄마가 보고 싶을 뿐이다. 원주민법의 집행자인 네빌(케네스 브래너)도 마찬가지. 자신의 업무를 정확하고 충실하게 수행하고 싶은 성실한 직장인이다. 아이들을 뒤좇는 원주민 '개코',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면서도 상부의 명령에 개처럼 따를 뿐이다. 그게 그의 할 일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면죄부를 줄 순 없다. 생각해보자. 나치에 대한 정치적인 신념이나 이념적 복무가 없었다손 전범이 아닌가. 한나 아렌트가 묘사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경우처럼. 그는 가정에 충실하고 직장일에 성실한 가장이었다. 아렌트는 그를 '비판적 사고 없이 명령만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그랬다. 또 "아이히만은 말하기, 생각, 판단의 무능성을 지닌 지극히 보통사람이었으며, '나치에 대한 몰이해와 비판적 사고의 부재'가 거대한 악을 실행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말했다. 


무지 등을 이유로 나치를 찬양하는 영화를 만들거나 비서로 살육의 현장에 동참했던 사실을 씻을 수는 없다. 또 시대에 떠밀려 '어쩔 수 없'는 친일 행위를 했다손, 그 과오가 지워질 순 없다.


네빌이나 개코가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에 충실했다는 이유로 죄를 사할 수는 없단 얘기다. 백호주의라는 분별 없는 신념(혹은 열정)의 이름으로, 피의 순결함에 집착하는 행위가 가져온 타인의 삶의 파괴.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보호'라는 명분으로 이를 합리화하려 하지만, 그것은 패악이다. 타인의 자연스런 삶을 망치고 억압했다. 백인은 문명은커녕 야만의 씨앗을 뿌렸다. 


나는 소망한다, 강요당하지 않는 삶을...


철거가 일상이 된 시절이다. 자본은 토끼몰이처럼 원주민(세입자)을 내몬다. 용역깡패까지 동원한다. 철거라니, 도대체 그 무지막지한 단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자본의 피는 자본만의 울타리를 치고 싶다. 순수하고 싶은 것이다. 왜 가난한 자들까지 자신들이 먹여살리고 함께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철거 용역 깡패는 그래서 자본의 군대다. 그들이 복무하는 건, 자본이다.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역사는 형태를 바꿔 되풀이될 뿐이다. 우울함을 지울 수 있을 턱이 없다. 몰리는 엄마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토끼 울타리 뒤에 숨어살아야 했다. 호주에서 원주민 격리수용 정책이 폐지된 것은 70년대다. 그들은 "도둑맞은 세대"로 불렸다. 강요와 억압을 피해 자유를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평생을 숨어 지내야만 했다.


21세기. 별 다를 바 없다. 자본은 더욱 세차게 토끼몰이를 한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산다. 고작 자본이 만들어놓은 울타리 안에서 말이다. 우리는 강요 당하고 억압 받고 있다. 자유는 없다. 자유롭다는 착각만 유령처럼 떠돌 뿐. 노예의 편안이다. 철거 깡패의 무력이 두렵다. 



그러나, <토끼 울타리>는 돌직구처럼 직설로 우리의 사고를 깨운다. 갇힌 안온함보다는 거칠고 험한 자유가 낫다! 14살의 몰리가 그것을 몸소 보여주지 않는가 말이다. 깡패 자본주의에게 더 이상 '도둑 맞은 세대'처럼 숨어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토끼 울타리를 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