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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우리는 신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일까?

by 낭만_커피 2012. 5. 20.

최근 '사령카페'라는 기이한 모임이 입길에 올랐다. 한 젊은이의 죽음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사령(死靈)'. 즉, 죽은 사람의 영혼을 뜻하는데, 사령카페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낼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란다. 이들은 사악한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 사령을 불러내 함께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칠게 말해 종교적 의식의 일환인데, 물론 그것을 종교라고 말할 순 없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최진실 지옥의 소리'가 뒤를 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지옥에서 형벌을 받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이 소리, 한 교회 목사가 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해프닝으로 밝혀졌지만, 이건 해프닝 이상이다. 사람들의 공포를 끊임없이 자극하면서 종교의 이름을 빌린 사기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지옥불 같은 현실에서 구원받고 싶은 사람들의 약함을 악용한 사기극이다.

 

 

<제7의 봉인(The Seventh Seal)>. 1957년의 스웨덴 영화가 그런 즈음 개봉한 것은 우연일 것이다. 종교(기독교)가 득세한 시절, 중세의 십자군 기사가 저승사자와 맞닥트린다.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자, "죽음의 사자"라고 답한다. 그러고선 별다른 놀라움도 없이, 기사와 죽음의 사자는 체스를 둔다. 이기면 24시간 죽음을 유예한다는 조건을 걸고. 

 

<제7의 봉인>은 체스의 승자인 기사가 24시간 세상을 돌아보는 것으로 풀어나간다. 신, 종교, 죽음, 구원 등이 그의 행보에 따라붙는다. 중세를 빗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의 원초적 질문을 던지는 구조다. 끊임없이 사유하도록 만드는 구조.

 

이 영화의 미덕은 그것이다. 영화가 사유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 종지부를 찍었다. 영화를 얕본 지식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거기에 잉마르 베리만이라는 거장이 있었다. 지난 2007년 7월30일 세상을 떠난 스웨덴의 영화철학자.

 

그도 신의 존재와 종교적 구원이 궁금했나 보다. 저승사자와 승산 없는 내기를 펼치는 기사 안토니우스 블로크(막스 폰 시도우)의 존재는 그것을 대변한다. 신의 부르심이라는 명분을 내 건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 10년 만에 돌아온 그를 반기는 것은 페스트다. 그런 배경부터 베리만은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내기에서 이겨 24시간 세상을 돌아보지만, 그가 원하는 구원은 보이질 않는다.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은 별로 살 만한 곳이 아니다. 교회를 찾아가도 그렇고, 마녀사냥을 당하는 소녀를 지키봐도 그렇다. 어딜가도 죽음만 횡행한다. 신(종교)가 말한 구원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와중에 광대 부부를 만나 평화를 느끼고, 블로크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동행한다. 영화가 흑백톤을 유지하는 것은 재밌는 경험이다. 흑백이라는 형식은 사유를 또 다른 공간으로 이끈다. 그러나 마냥 재밌지는 않다. 간간이 끼어드는 유머가 흑백톤의 무거움을 상쇄하지만, 기본적으로 최근의 영화적 스토리텔링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런 형식이 버거울 수 있겠다. 

 

뭔가 삐가번쩍한 자극도 없다. 그저 사유를 끊임없이 요하는 스크린 앞에 자극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영화적 몰입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 허나 그것이 이 영화의 헛점은 결코 아니다. 죽음과 구원, 혹은 종교에 대한 이 영화의 화두는 극장 밖에서 충분히 이어질 테마다.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 죽음이라지만, 그 죽음마저도 악용되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사령카페도 그렇고, 최진실도 그렇다.

 

 

여전히 신의 존재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 되고, 종결되지도 않겠지만, <제7의 봉인>은 신과 구원에 대한 우리의 성찰과 사유를 요구한다. 기사의 여정이 우리의 일상적 삶과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 그 때문이다. 신도 지금의 세상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신이 원한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신과 함께 가고 있는 것일까?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