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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성년의 날 특집①] 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by 낭만_커피 2012. 5. 19.

‘성인’ 혹은 ‘성년’의 꼬리표는 그냥 오지 않는다. 세월 먹는다고, 시간 보낸다고 거저먹거나 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무살이 되면 으레 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건 편의상 정한 제도일 뿐이다. 성년의 날도 그렇다. 스무살이 됐다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변화는 그리 분명치 않다. 19년 364일과 20년 1일 사이의 간극이 그리 클리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아이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 그건 그만한 고통을 수반해야 한다. 성장통이라고 불리는 피할 수 없는 그 무엇. 세상은 내 의지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본격적으로 깨닫기 시작한다. 맘먹은 대로 안 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세상 아니던가. 자고로 어른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점점 더 많아지는 시기이다. 어릴 때야 떼 쓰고, 어리다는 이유로 넘어갔던 것이 이젠 그렇지 않다.

 

그렇다. 훌쩍 커버리는 어느 날이 온다. 그건 그만한 고개를 넘어왔기 때문이다. 그건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다. 스스로 몸으로 체화해야 한다. 소화불량이 될 수도 있다. 뒤죽박죽이 되기도 한다. 역시 성인이란 타이틀은 그냥 딸 수 없다.

 

한편으로 성인은 홀로 갈 것을 명받는 나이이다. 그 어린 날 함께였고 함께일 거라고 생각도 했던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진다. 나를 지키고 돌보는 건 수호천사의 몫이 아니다. 이젠 ‘홀로서기’라는 것도 배워야 한다. 불안이 엄습해 온다. 어린 새는 둥지를 벗어나기 위해 날개 짓을 하지만, 그 날개가 처음부터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 아득한 추락의 이미지까지 감안하면서 어린 새는 날개 짓을 습득한다. 온전하게 혼자서 날기가 되는 날, 어린 새는 온전한 새로서 자리매김한다. 


청춘, 부유하면 또 어떠리


신지와 마사루(마짱). <키즈리턴>은 아이에서 어른이 돼 가는 그들을 덤덤하게 담는다.

 

이른바 문제아로 불리는 마짱은 신지를 ‘시다바리’ 삼아 하릴없이 부유하고 다닌다. 그들, 어떤 목적이나 목표도 없다. 선생님을 희화화해서 골탕 먹이고 학생들에게 삥을 뜯거나 성인영화를 보면서 전전할 뿐이다. 그들에게 인생은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잔혹사가 아니다. 적당한 거리감과 적당한 밀착으로 대충대충 연기하는 무대다. 


대부분의 사람들, 그런 그들에게 이런 말로 잣대를 들이댈 것이다. 희망 없는, 싹수 노오란 놈들. 이름도 있고 존재도 있지만 세상은 그걸 알아주지 않고 외면한다. 그들에겐 따뜻한 시선보다 무시 혹은 무관심의 그늘이 익숙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에게 권투가 온다. 불온한 목적으로 권투도장에 나간 마짱과 달리 신지는 권투가 재미나고 신난다. 적성에도 맞는 것 같다. 신지는 권투에 더욱 몰두한다. 체육관의 유망주로 도약한다.

 

그런 신지와 달리 마짱은 권투를 떠난다. 대신 야쿠자로 편입돼 차츰 인정을 받는다. 조직내에서 위치도 올라간다. 이러다 보니, 끈적끈적하던 두 부유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발걸음을 달리 하다보니, 서먹해 진다.


인생은 늘 그렇게 우연 투성이다. 운이 좌우한다. 그들, 예기치 않게 누군가를 대신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다가온 길을 걷는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특별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성년으로 치닫고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도 않다. 주어지니까 할 뿐이다. 새장에 갇힌 새들은 먹이가 주어지니까 먹을 뿐이고 날지 못하니까 날개가 퇴화한다. 영화는 그저 덤덤하다. 그들 각자 가는 길, 묵묵히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그래도 달린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달린다. 자전거를 타고 혹은 다리를 움직이면서. 혹은 끊임없이 만담을 하는 누군가도 있다. 현실은 거칠게 나누면,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꾸준히 자신의 꿈을 향해 매진하는 인간과 이리저리 부유하고 치이다가 어느 순간 어딘가에 있는 인간.

 

<키즈리턴>에선 콤비 만담가를 꿈꾸던 두 녀석들만 자신들만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승승장구 하던 신지, 실패한 선배 퇴물복서에게 끌려 다니다가 패배에 익숙해진다. 중간보스까지 올라선 마짱,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시쳇말로 '깝'치다가 고꾸라진다.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돌진하던 두 놈,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후 그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신지와 마짱,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오래 전 봤던 그 모습 그대로다. 그리고 그 모습, 영화는 끝을 맺는다. 성인이 되기 전과 다를 바 없는 현실 같다. 각자의 길이랍시고 거닐었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길을 확신하지 못한 채 낙마했다.

 

신지, 묻는다. “우린 이제 끝난 건가요?”

마짱, 대답한다. “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두 사람, 절망을 겪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자전거는 그들이 다시 달릴 것임을 예고한다.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끊임없이 좌절하게 만드는 것일까. 세상은 아직 성인으로 돋움하지 못한 아이들에게도 공포를 심어주기에 여념이 없다.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조정하기 위한 꼼수다. 아픈 것은 기득권이 조작한 사회 시스템 때문이다. 


마짱이 먼저 앞서나가고 신지가 뒤를 좇는 모양새는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의 관계와 같다. 앞바퀴가 그어놓은 흔적과 절망은 뒷바퀴가 수습하고 쓰다듬는다. 절망을 지우려는 희망의 목소리는 “다시 시작한다”로 귀결될 것이다. 그들, 이전의 절망도 어쩌면 달콤했던 것으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자전거 페달을 돌려 단절된 희망의 속삭임을 되살리려 노력할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있다. 그럼에도 되풀이되는 것들도 있다. 자전거를 다시 타고 나타난 그들처럼, 커피하우스에서 데이트를 신청하는 그 누군가처럼. 하지만 그들은 이전과 다르다. 비포와 애프터. 되풀이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미 강을 건넜다. 더불어 강에서 노를 젓는 노하우도 익혔다. 그렇기에 다른 강을 만나더라도 쉽게 그 기억을 잊지 않을 것이다. 성장은 그렇게 몸에 익는 무엇이기도 하다. 

 


나는 어른이 되는 날, 축복해주고 싶다. 설혹 그것이 앞으로 닥칠 절망과 고생의 가시덤불을 예고하는 스타트라인일지라도 말이다. 껍데기를 벗고 세상에 알몸으로 뒹굴어야 하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언젠가 그들은 마짱과 신지와 같은 품새로 “다시 시작”을 얘기할 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우리는 싱긋이 웃어주면 된다. 그게 우리였고, 우리일 테니까. 절망의 기운이 뚝뚝 떨어진 그곳에서 누군가는 희망의 페달을 밟고 있을 테니까. 궁상맞고 우스꽝스러울 지라도 누구에게도 성장은 비껴가지 않는다. 비록,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이 영활 만든 기타노 다케시. 좋은 어른이다. 무턱대고 희망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세상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아파한다. 흔하지 않은 좋은 어른이다.

 

그리고 축하한다. 너의 성인됨을. 그리고 미안하다. 아프라고 강조하는 이 세상의 가혹함 때문에. 그렇게 만든 어른들의 잘못이 가장 크다. 그러니, 더 좋은 세상, 더 나은 세상 함께 만들면 좋겠다. 함께 자전거를 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