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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1%의 극과 극이 서로에게 삼투하는 법

by 낭만_커피 2012. 3. 25.

나와 이건희(맞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작자!)는 전혀 다른 세계다. 같은 성씨를 갖고 있지만, 누가 됐든, 한쪽은 화성인이다. 서로간의 거리? 아마도 지구와 안드로메다의 거리정도? 건희 일가가 지배하는 기업은 ‘또 하나의 가족’을 주야장천 부르짖지만, 개소리다. 가족은 개뿔. 그건 그저 거짓부렁 상술이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언터처블(Untouchable)이라고 해도 되겠다. 건희(개인이 아닌 계급을 상징한다는 측면에서 그리 일컫겠다) 입장에서 보면, 나는 불가촉천민. 내 입장에서 건희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총수님 되시겠다. 그와 나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건희가 멘붕(멘탈붕괴)된 금치산자(?)라는 루머 따윈 고려하지 말자. 쉽다. ‘돈’이다. 우리 둘은 화폐(의 많고 적음)로 갈라진다. 건희는 돈이 천문학 망원경을 끼고 바라봐야 할 정도로 미친듯이 길게 늘어서 있고, 나는 당장 눈앞에 돈도 안 보인다. 왜? 없으니까!

그런 우리, 서로에게 삼투할 수 있을까? 화해 가능한 사이가 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지구인과 화성인이 어찌 눈이 맞을 수 있단 말인가. 지구와 안드로메다의 사이가 어찌 가까워질 수 있단 말인가. 돈이 우리를 만날 수 없는 사이로 만들었다. 내가 됐든, 건희가 됐든, 누구든 레떼강(망각의 강)을 건넌다면 모를까. 우린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그래서 슬프냐고? 아니. 나는 그닥 슬플 것 없다. 애초 화성이나 안드로메다를 동경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건희가 슬플까? 아니, 그럴 리가. 진짜 멘붕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촉천민을 동경할 화폐는 없다. 우린, 만날 일도 없고, 서로를 동경할 일도 없다. 그러니 서로에게 삼투하는 건 건희가 삼성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는 확률과 같다. 나는 건희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못 되 처먹은 삐뚤어진 놈이고, 건희는 나 따위의 인간은 없는 존재일 테니 우리는 어떻게든 만날 수 없는 관계다. 

그런데, 이 영화, <언터처블 : 1%의 우정>. 희한하다. 각자 1%의 위치, 즉 상위 1%와 하위 1%에 있는 존재가 서로에게 삼투한다. 그것도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교육이나 학습에 의한 주입이 아니다. 지금 1:99의 시대, ‘언터처블’한 관계가 ‘터처블’한 관계로 바뀌는 마술.     

영화의 제목인 ‘언터처블(Untouchable)’. 인도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민을 뜻하는 ‘불가촉천민’과 같은 뜻이다. 이 영화에서 언터처블을 꼽자면 드리스(오마르 사이)다. 프랑스 이민자들의 섬이자 소외된 삶의 공간인 방리유(banlieueㆍ도시외곽지역)에 사는 흑인 하층민. 절도죄로 감옥살이도 했고, 희망을 말하는 것조차 사치인 삶이다.

반면 필립(프랑수아 클루제)는 가진 건 돈밖에 없다. 패러글라이딩 사고로 얼굴 부위를 제외한 전신불구가 됐다. 24시간 돌봐주는 손길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백만장자. 그러므로 두 남자, 전혀 다르다. 딴판이다. 극과 극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 (돈으로 나눠진) 계급이 있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난 것은 필립의 간호인을 뽑는 자리다. 드리스는 실은 그런 일, 관심 없다. 사회복지사들이 맡아야 할 영역 같은데, 그는 무일푼 건달이다. 복지수당을 타기 위한 사인이 필요할 뿐이다. 필립이 그런 드리스에게 보인 관심의 시작은 호기심이다. 경직된 채 빤한 대답을 내놓는 다른 간호인 후보자들과 다른 면모.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섞일 수 없는, 파국이 예정된 관계. 무거운 주제다. 그런데 드리스의 넉살이 이를 뛰어넘는다. 돈 때문에 고통당해도, 그는 돈 앞에 굽실거리지 않는다. 그리고 쉽게 무언가를 동정하지 않는다. 전신마비의 장애인을 돌보게 일이지만, 그의 머리엔 동정이 없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내뱉고 행위 한다.

놀라울 뿐이다. 어떤 사회복지사도 할 수 없는 일, 그는 한다. 사회복지와 관련한 이론과 논리가 무색하다. 장애인을 다루면서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법칙이 없다. 고용주에게 어떤 자세로 해야 한다는 복무규정도 없다. 그에게 필립은 그냥 사람이다. 돈 많은 고용주도 아니요, 전신마비의 장애인도 아니다.

그러니 그의 농담과 유머는 어떤 악의도 없다. 순진무구함이라고 해도 좋고, 사려 깊음이라고 해도 좋겠다. 어울리지 않을 두 단어가 자연스레 혼재한다. 드리스의 눈에 필립은 욕망을 지닌 똑같은 사람이다. 다른 상류층의 행위 또한 그에겐 우습다.

영화는 그래서 상류층의 허위와 위선도 유쾌하게 꼬집는다. ‘구별 짓기’를 하고 싶은 1%들에게 날리는 드리스는 똥침이라고 할까. 최상류층이 즐기는 오페라에 함께 한 드리스는 우스꽝스러운 무대의상과 알아듣지 못하는 독일어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에게 한 방 먹인다. 그림은 또 어떻고. 고상한 단어를 써가며 펜팔을 하며 간을 보는 필립에게 드리스는 바로 전화를 걸도록 만든다.


쓸데없이 엄숙해서 숨 막힐 듯한 상류층의 예절 따윈 가라. 이 얼마나 불편하고 피곤한가. 그런 틀에 사로잡힌 필립에게 드리스는 공기요, 산소다. 다친 이후 당최 맛볼 수 없었던 새벽녘의 공기를 마시며 두 사람이 함께 담배를 나눠 피는 장면. 누가 전신마비 장애인에게 담배를 나눠 피자고 할 것인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큰 일 날 것처럼 펄쩍 뛰겠지만 필립의 표정은 그 모든 것을 휘발시킨다. 그토록 행복한 표정이라니. 유리벽처럼 분리된 계층 간의 벽이 그 순간만큼은 허물어졌다. 명장면이다.

더불어 클래식 연주로 무장됐던 필립의 생일 파티. 드리스의 해석은 간단하다. 휴대폰 소리요, 광고이자, <톰과 제리>의 음악일 뿌니다. 이어 드리스의 MP3플레이어에서 나오는 ‘Boogie Wonderland(Earth Wind and Fire)’. 그 모든 엄숙함과 진지함을 뛰어넘어 모두의 춤을 이끈다. 필립에겐 피하고 싶은 생일파티가 새롭게 탄생했다. 드리스의 힘이다.

이 두 명장면, 나를 사로잡았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계급이 서로에게 삼투하여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런 상황. 그것이 가능이나 한 것일까, 하는 의심도 없었다. 그것이 설혹 판타지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그 순간만큼 건희와 나 사이에 놓인 강을 건너고 싶었다. 용매가 스며들면서 두 액체의 농도가 같아진다는 삼투현상에 나는 가슴이 시원하고 상쾌․유쾌했다. 재기 넘치는 진짜 우정. 

무엇보다 실화란다. 놀랍다. 소소한 일상에서 길어낸 농담 같은 현실에 나는 그만 감동 먹었다. 터처블한 것이다.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만큼의 농담. 엄숙하지 않아서 좋다. 음악이 무엇보다 이들의 관계를 더욱 따스하게 감싸준다. 멋진 영화다. ‘언터처블’이 ‘터처블’로 가는 과정, 그것에서 우리는 또 하나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