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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남자다움의 생산적 파괴, <빌리 엘리어트>

by 낭만_커피 2011. 7. 8.
To. 빌리(Billy).

안녕, 빌리. 소식, 들었어? 아마 지금 넌, 뉴욕 주에 살고 있어서 그 소식에 환호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긴 한데. 뉴욕 주의 동성 결혼 합법화! 동성 커플이 결혼할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됐고, 동성 커플도 이성 커플이 받는 기초적 보호를 누릴 수 있게 됐잖아.

물론 앞서 미국의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코네티컷, 아이오와, 버몬트 주가 동성 결혼을 제도화한 바 있어서, 이번 뉴욕 주의 담대한 결정은 6번째였지만, 인구(1900만명)를 감안했을 때, 그 파급 효과는 남다를 거란 분석도 나오더라.

너도 만났을지도 모를 이 사람. <천재소년 두기>에서 두기 역을 맡았던 닐 패트릭 해리스. 5년 전 프러포즈를 했던 동성 약혼자와 곧 결혼하겠다고 하더라. 몇 년간 약혼반지만 끼고 있어야했던 고문(!)은 이제 끝이라지? 그래, 다행이고, 잘 된 일이야.

남들 다 하는 ‘결혼’이 그렇게 어려웠던 사람들. 뭔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음모를 꾸민 것도 아니요, 그저 죄라면 사랑한 죄? 사랑하면 결혼하고 싶은 것, 당연한데도, 그것을 제도적으로 막는다는 게 말이 돼? 응? 그래, 뉴욕 주의 결정, 잘 된 거지, 잘 된거. 널리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동성을 좋아한다는 게 뭐가 나빠? 미국도 이번에 동성애자 결혼 합법화한다고 하잖아. 그네들 삶인데 그걸 왜, 내가 그렇지 않다고 해서 욕할 필요는 없는 거야.” 데뷔 48주년, 100편이 넘는 연극에 출연한, <예술하는 습관>에서 동성애자 시인을 맡은, 일흔 살의 배우, 한국의 이호재 아저씨는 이런 말도 하더라. 배우 예술을 하는 분이라, 타인의 삶을 잘 이해하고자 하시는 것 같아. ^^



하여튼, 뉴욕 주의 소식을 듣곤, 빌리, 네가 떠올랐어. 뜬금없지? 네가 동성애자인 것도 아니고, (물론 극중에선 너의 성정체성을 알 순 없지만) 영화가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내세운 것도 아닌데, 왜 너였을까?


아마도 그건, 너를 통해 내가 남자다움에 대한 첫 회의를 가지면서 생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거야. 넌 내가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게끔 도와준 거야. 무슨 얘기? 빌리, 그래 천천히 읽어보렴. 이 편진, 온전히 널 위한 연서니까.

<빌리 엘리어트>, 그 다양한 함의들

<빌리 엘리어트>. 그 영화를 통해 널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네게서 꿈을 보았어. 아버지에게, 세상에게 번번이 부딪히고야마는 꿈이었지만, 네가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나갈 때, 나는 꿈을 꾸고 싶은 사람이었거든. 꿈이 있다면 좌절하지 말고, 발걸음을 내딛어라! 그렇게 단순했다. 그것이 발레이든, 무엇이든.

처음 봤을 때부터 <빌리 엘리어트>에 홀딱 반했던 나는, 간혹 널 보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잡곤 했어. 어떻게 널 잊을 수 있겠니. 두 발을 딛고 비상하는 네 모습. 그 한 장면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했어. 헌데, 이상한 건, 널 볼 때마다 영화가 달리 보였다는 것. 희한했어. 그러니, 넌 늘 새로웠다.

다시 만날 때는, 성장 통을 다룬 성장영화였어.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 가는가. 아버지와 아들은 어떻게 갈등을 빚고 화해하는가. 그것도 처음에는 소년이 먼저였지만, 다시 볼 땐 아버지도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모두 성장할 수 있구나. 나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네 아버지의 변심(?)이 정말 놀랍게 보였거든.


그랬던 <빌리 엘리어트>를 다시 봤을 땐, 그것은 신자유주의 반대 영화이기도 했어. 신자유주의의 신봉자였던 마가렛 대처가 빚어낸 광산 공동체의 와해. 지금 폐해를 잔뜩 뿜어내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인민을 짓밟고 일어섰는지, 보여줬던. 노동자들은 어떻게 신자유주의에 대처해야 하는가 등등. 정말, 정치적인 영화였어, <빌리 엘리어트>는.

그것으로 끝이냐. 노노. 연대가 왜 중요한지도 알려준 영화였지. 그것은 꼭 노조의 이야기만 그런 것이 아녔어. 너와 네 친구, 마이클. 너와 발레 선생님이었던 윌킨슨 선생님. 그리고 네 진학을 위해, 없는 살림이지만 삼삼오오 돈을 내놓는 탄광촌 동네 분들. 그래, 네가 살던 그곳에서 느꼈던 짠한 공동체. 당장 눈앞에 닥칠 붕괴 앞에서도, 미래를 굳이 떠올리진 않았겠지만, 널 위해, 공동체의 아이를 위해 주머니에서 페니를 꺼내는 사람들. 그들은 널 희망이라고 불렀지, 아마.

<빌리 엘리어트>가 놀라운 건, 그 다양함 때문이었어. 어떤 시선에서, 누구를 주목해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카멜레온. 넌, 거기서도 물론, 항상 가장 강렬한 포스의 주인공이었지만.

‘동성애 혐오증’이 남자들에게 미치는 악영향

그리고 뭣보다, 날 깨어나게 만들어준 건, 네가 빚어낸 남자다움에 대한 생산적 파괴였어. 처음에 한 얘기를 계속 이어가자면, <빌리 엘리어트> 곳곳에는 동성애 혐오증(호모 포비아)이 묻어나. 광산의 남자들. 거기서 연상되는 정형화된 이미지와 편견도 있겠지만, 그들이, 특히 아버지가 끊임없이 보여주는 행동이 그래.


남자다움. 아버진 네게도 권투를 하라고 강요하잖아. 그건 어쩌면, 널 게이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는 마초 아버지의 눈물겨운 부성애(?)였을지는 몰라도, 난 그 모습이 위태해보였어. 그건 아마도 게이로 비춰지는데 대한 두려움이겠지? 정작 넌,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아버지나 형, 대부분의 광산 남자 노동자들은 그런 것에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시달렸을지도 몰라.

네 아버지도 그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잖아. 고작해야 화내는 게 전부야. 그 화조차도, 자신의 감정을 들키는 것이 두려워서 나오는, 즉 자기 방어본능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그러니까, 동성애 혐오증 같은 거지. 호주에서 연구 결과가 있었대. 이성애자 남자들이 게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자신을 제한하는 여러 방식이 있다는. 가령, 이런 거야. 학창시절, 미술, 음악, 문학 수업을 피한대. 여자들이나 하는 수업이라는 핑계로. 심지어 학문적 기술이 다소 여성적으로 보인다며 일부러 실력 발휘를 하지 않는 형태로도 나온대.

동성애 혐오증은 결국, 이성애 남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셈이야.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재능조차 감춤으로써 진짜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되는 거지. 그게 뭐야. 자신이 자신을 감춰야만 하다니.

연구는 또 말한대. 나이든 남자의 경우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건강을 소홀히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허참, 죽음을 부를지도 모르는 것까지 나아가다니, 그 동성애에 대한 두려움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거야말로 무섭고 두려운 것 아닐까?

빌리, ‘남자다움’의 진짜 의미를 보여주다

마초이즘이 지배하는 광산촌. 그 속에서 너의 결정(발레를 하겠다는)과 너의 행동(아버지에게 저항하는)이 가져다준 충격은 꽤 컸다. 나? 네 아버지나 형보다 아주 조금 덜 했을지는 몰라도, 나, 마초였다. 바닷바람 맞고 자랐다는 이유로, 마도로스의 고장에서 태어났단 이유로, 그곳 남자들은 ‘(비겁한 혹은 비루한) 남자다움’을 은연중에 강요받고 자라거든.

그 남자다움이란 게 이래. 투박하고 무뚝뚝한 것을 자랑처럼 여기는 풍토 속에, 퇴근해서 아내에게 하는 말이 딱 세 마디래. 아(애)는? 밥 도(줘)!, 자자. 남자는 여자처럼 입을 놀리는 것이 아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한단다. 이른바 한국 갱(경)상도 남자들의 전형. 그런 동네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나라고 별 수 있겠어. 발레 하고 무용하는 남자는 머스마(사내)도 아닌 기라. 

조금씩 그런 물이 빠지곤 있었다고 하나, 그 마초이즘이 횡행한 도시가 아니더라도, 한국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이상한 덕목들이 있어. 빌리, 너로선 당최 이해가 안 될 것이긴 한데, 가령 이런 거야. 남자는 세 번 운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

어때? 이 거 이 거, 완전 폭력적인 말이지 않아? 그런데도 그 말이 여기에선, 아직 통용돼. 남자의 눈물이란, 그저 끔찍한 것이거나 지질한 것이거나. 사실이 그러하니, 네 아버지와 형이 단호하게 너의 발레를 반대했던 건, 일견 이해가 가더라. 광산의 힘든 노동과 시위로 일생을 살아왔을 그들에게, 남자가 발레를 한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더구나, 그게 아들이자 동생이? 아유. 그건 동네 창피한 일이자 수치였던 게지.

마초들에겐 때론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것이 모든 것이 될 때가 있어. 특히 어줍지 않은 남자다움에 대한 편견 때문에. 내가 널 보면서, 깨닫게 된 건, 그 남자다움에 대한 허상이었어. 그건 남자다움도 아니요, 남자로서 해야 할 일도 아니었던 거야. 아버지가, 형이, 그리고 세상이 옭아매온 인습과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 그게 진짜 남자다움은 아닐까.

아버지 세대에서 형까지 묻어난 남자다움을 생산적으로 파괴했던 너. 나는 그것이 통쾌했어. 그리고 그 통쾌함이 내 가슴을 흔들어 깨우더라. 나의 남자다움이 얼마나 허술하게 조직돼 있었는지. 눈물 보이지 않으려고 애 쓰고,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미숙하며, 강하지도 않으면서 강하려고 애를 썼던 모습. 내 부끄러움이 보이더라.

동성애라면 미친 사람들이나 하는 짓처럼 여겼던 우둔함까지. 나는 널 보면서, 나를 감싸고 있던 허울 좋은 마초 옷이 날 얼마나 옥죄고 있는 것인지 알았던 거지. 그래, <빌리 엘리어트>는 남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 즉 동성애 혐오증이 어떤 식으로 소년을 가둬놨는지를 보여준 영화였어.

너는 그 감옥에서 빠져나온, 그 마초 옷을 찢고 나온 용감하고 바람직한 남자였지. 모든 남자가 아마 너처럼 운이 좋은 건 아니겠지만, 널 만나 그런 옷을 입고 있고, 그런 옷을 찢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운 좋은 나도 있어.
 


성인이 된 네가 <백조의 호수>에 등장해, 멋있게 도약하고 비상하는 장면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물론, 너의 그 비상을 본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네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건, 네가 이뤄낸 남자다움의 생산적 파괴가, 내 속 좁았던 마음의 도약을 도왔다는 것. 그것으로 나는, 내게도 무언가 다른 것들이 있음을 알아가고 있어. 남자다움에 포박되지 않고, 내 마음과 감정에 조금 더 다가가고 표현할 수 있음에 감사해. 

빌리, 네게 하는 말인데, 너처럼 멋있게 도약하진 못하겠지만, 60이 됐든, 70이 됐든, 나는 발레리노가 될 꿈도 꾼다. 취미일지라도, 나는 네 덕분에 발레가 그렇게 매력적인 것임을, 발레리노가 얼마나 멋진 것인지 알아버렸거든. 그래서, 네가 했던 이 말도 여전히 난 기억해. 춤을 출 때 어떤 생각이 드는지에 대한 물음에 네가 답했던.

음…모르겠어요.

그냥 좋아요.
활활 타오르는 불길같은 느낌,
날아가는 것 같아요.
모든걸 잊어버려요.
춤을 출 때 저는 한마리 새처럼 날고 있어요.

그러니, 내가 한마리 새처럼 날고 있을 그때, 널 초대하고 싶어. 올 수 있겠니? ^.^
고마워. 빌리. 오늘, 이걸로 줄일 게. 안녕.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