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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영화하나객담] 지금 필요한 건 뭐? 민중봉기 곡사!

by 낭만_커피 2011. 8. 27.
<최종병기 활>의 미덕은 뭐니뭐니해도, 쏜살같이 날아가는 화살이 과녁을 뚫을 때의 통쾌함이다. 물론 그것은 적을 상정했을 때의 이야기다.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 군대라는 적, 사지를 갈기갈기 찢을 정도의 육중한 육량시를 든 청나라 군인. 그들이 조선의 동생을 납치하고, 조선의 양민을 죽이고, 조선을 희롱했으니까.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의 긴장감이 곧 관객인 나의 긴장감이다. 나는 곧 화살이 된다. 나는 스크린을 향해 날아간다. 나는 꽂힌다.

영화를 지배하는 활의 쾌감은 짜릿하다. 군더더기 없이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겨냥한 덕분이리라. 납치된 내 동생 찾기(살리기). 즉, 동생 찾아 삼만리를 떠난 오라버니의 추격과 청나라 군의 대결은 황홀경에 가까웠다.

더구나 곡사와 애깃살(편전) 그것만 믿고 전쟁에 홀로 뛰어든 남이(박해일)와 온몸으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쥬신타(류승룡), 수컷 냄새 진동하는 두 야성이 숲과 벼랑, 폭포와 들판에서 펼치는 활극은 근래 보기 드문 진경
(珍景)이다. 비록 (CG)호랑이가 옥의 티처럼 삽입된 것은 아쉬움이 되겠으나!

 
<최종병기 활>은 그것으로 충분한 영화다. 병자호란이라는 시대나 배경은 중요한 역할이 아니다. 역적의 자손이라는 남이의 처지나 청나라에 무릎 꿇은 조선의 굴욕 같은 것도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 이야기다. (영화를 보면서 반드시 연관지어 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나는 스치듯 지나가는 그 이야기들이 지금-여기의 현실과 오버랩 되어 망막에 남고 뇌리에 주름을 지웠다.

병자호란. 1636년(인조14년) 12월,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한 전쟁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국제 정세를 오판하고 외교적 실수를 거듭하면서 빚어진 전쟁.

전쟁 발발 직후, 순식간에 청나라에 함락된 조선의 운명은 인조의 실기에 다름 아니었다. 역적으로 몰려 죽은 남이의 아비가 남긴 말이 그것을 방증한다. "외교를 모르는 자들이 조정을 장악하니 이 나라가 곧 전쟁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것이다"


뭐, 실기는 인간이니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치자. 그것이 임금이라도. 중요한 것은 실기 이후의 태도와 자세다. 인조는 용서 받기 힘든 자였다. 청의 용골대가 이끄는 병력이 한양으로 밀고 들어오자, 궁궐뿐 아니라 백성을 버렸다. 강화도로 가려다가 그러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해 들어간 그에게 남은 것은 백성의 원망이었다.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그 유명한 남한산성 항전이 끝난 이듬해 1월,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을 향해 굴욕(삼배구고두례·여진족이 천자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을 당했고,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청 장수가 인조를 호위하며 강을 건너자 백성들이 역시 울부짖었다.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인조라고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지 않았겠느냐마는, 그가 왕위에 오르면서 백성은 고난을 겪고, 국가는 굴욕에 다다랐다. 지금-여기를 어찌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남이가 동생을 구하고자 죽도록 고생하는 것의 근원도, 인조의 '반정'이라는 명분을 빌린 임금 욕심이 아녔을까. 공정과 공생을 부르짖으나 허울 좋은 말뿐이고, 외교적 헛발질에 여념이 없는 쥐쉐이가 그렇고, 아이들에게 밥 주기 싫다며 징징거리다가 물러난 5살 훈이가 그렇다.

배밖으로 임금(대통령) 욕심이 드러난 자들에게 권력을 쥐어준 게 죄라면 죄다. 형벌은 고스란히 백성(국민)들의 몫이 되는 것도 똑같다. 그들이 버리는 것은 늘 똑같다. 그들은 버리고 갈 뿐이다. <최종병기 활>은 남이의 입을 빌어, 시대를 관통하는 진실 하나를 쏜다. 

"나라를 버리고 백성을 버린 그 임금은 이미 큰 죄인이오."

오로지 동생만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장애물을 넘어 온 남이의 자세를 보라. 청 진지에 잡혀 있는 동생에게 그는 나지막하게 말한다. "무사하냐? 미안하다... 늦어서..." 인조(혹은 국가)는 이런 자세였어야 했다. 오로지 백성만 구하겠다는 일념만으로도 부족한 것이 임금의 자세이건만, 그들은 미안함도, 죄스러움도 없는 파렴치한에 불과하다. 


가만 보자. 한국의 국민, 서울의 시민도 툭 하면 버림 받는다. 물론, 있는 사람들은 전혀 상관이 없는 얘기다. 그러나 김진숙이라는 이 시대의 상징적 아이콘과 접속하기 위해 '희망 버스'를 타고, 해군기지로부터 강정마을을 지키기 위해 '평화 버스'를 몰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대적 버림'에서 자신과 물론 우리를 구해내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 오로지 개인의 힘만으로 동생을 구하기 위해 역적의 오명을 감수하고 압록강을 건넌 남이의 모습과 겹친다.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로 끌려간 사람이 무려 50만이었다. 임금과 나라는 그러나 그들의 송환을 위해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소수의 사람들만, 살고 싶거나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만, 스스로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거나 어떻게든 살아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고, 아주 일부만 가까스로 돌아왔다. 

힘겹게 압록강을 건너오는 자인(문채원)과 서군(김무열)의 모습이 있다. 압록강을 넘어섰기에 다시 나라가 받아주지 않을까, 걱정하는 그들의 모습은 '희망'과 '평화'를 다시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우리네 모습과 오버랩됐다. 아주 일부만 가까스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 희망과 평화의 온전한 회복이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최종병기 활>은 작은 힌트도 주고 있었다. 포로가 된 조선의 백성들이 청나라로 보내지기 전, 압록강에 다다랐을 때다. 청 군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포로의 생사여탈을 놓고 장난을 벌이는데, 이때 나타난 최종병기 남이가 청 군대의 대오를 흩트린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분분하게 일어나는 민중봉기. 포로였던 그들은 단숨에 청 군대를 휘어잡는다. 민중봉기의 바람직한, 좋은 예. 그들은 순식간에 전세를 뒤집는다. 봉기는 성공했고,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된다.

희망을 찾고, 평화를 갈구하는 우리의 몸짓이 그런 봉기가 됐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민중봉기 곡사. 곧이 곧대로 가는 활이 아니라도 좋다. 팽팽한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이 호랑이 꼬리처럼 말아서 휘어 들어가는 곡사. 적들이 지 아무리 꽁꽁 숨어 있어도 소용없다. 그 매복의 순간을 타고 단숨에 목을 관통하고야 마는 곡사 같은 봉기. 천박한 자본(가)으로부터 자유를 되찾는 우리의 노동, 우리네 삶. 

국가가 국가이길 거부하고, 기업이 되고자 자본 앞에 투항한 시대. 그것은 청나라 군대 앞에 손쉽게 무너지고 무릎을 꿇고 만 군대와 임금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되레 개인적 동기가 결합돼 혹은 비관적 처지 앞에 개개인의 연대로 청 군대를 무찌르는 백성들의 모습. 그것이 지금의 김진숙(들)과 강정마을 지킴이와 연결됨이라니. 이 영화, 묘하게 시대상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최종병기 활>의 또 다른 미덕 중 하나는 자인의 역할과 태도였다.

영화를 보기 전, 그녀는 꽃으로, 장식으로 끝나고 말 역할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칼을 만지고 활을 쏘는 자인은 생사여탈을 스스로 책임지고 결정하는 멋진 여성이더라. 자신을 능멸하려는 청의 왕자 앞에서, 그녀는 닭꼬챙이를 먹고는 그를 향해 꼬챙이를 휘두른다. "죽어도 그냥 죽지 않을 것이고 살아도 그냥 살지 않을 것이다." 멋지다. 여자라면, 자인처럼.


그리고,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지켜야 할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끔 웃음을 주면서도 칼을 내동댕이 치지 않고, 자신의 여자를 지키고자 애를 쓰는 서군이 나는 멋져 보이더라.

나도 내 여자, 내가 지키겠다. 멋지다. 남자라면, 서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