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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윔블던>, 사랑과 일 사이에서 위태로운 사람들에게

by 낭만_커피 2011. 6. 18.
지금, 윔블던 시즌이다. 그렇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유명한 테니스 대회, 맞다. 세계 4대 메이저 대회의 하나로, 유일하게 잔디 코트에서 펼쳐지는 메이저 대회다. 올해 20일부터 125회째 대회가 열리고 있다.

여름이 왔을라치면, 칙칙한 영국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는 6월 중순이면, 런던의 한 지역 윔블던은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었다. 윔블던의 잔디는 그야말로, 푸릇하다 못해 심장을 초록빛으로 물들일 것 같았었다. 말하자면, 윔블던 두근두근. (국보자매의 히트곡 '두근두근'의 6월판이랄까!)

역시 맞다. 과거형이다. 테니스, 잘 치진 못해도, 룰을 아주 잘 알진 못해도, 테니스 스타를 줄줄줄 꿰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비외른 보리부터 시작해서, 존 맥켄로, 지미 코너스, 보리스 베커,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슈테피 그라피, 안드레 애거시 등등 80~90년대를 풍미했던 테니스 스타들의 몸짓에 들썩거렸다. 오죽하면 야구공 대신 테니스공으로 야구를 했을까! (사실은 야구공이 딱딱해서 맞으면 아프다보니, 소심한 우리 아해들은 테니스공을 즐겼다.ㅋ)

뭐, 요즘은 나달이니 페더러니, 조코비치니 하는 아해들이 깝쭉대지만, 그네들은 앞선 코트의 스타들 아우라에 비길 바가 아니다. 물론 순전히 내 기준에서만. 내겐 안드레 애거시가 거의 마지막 테니스 스타였다.(애거시 은퇴에 대해 뱉었던 소회도 다음에 공개하겠다.) 이후, 샘프라스라는 걸출한 플레이어가 있었지만, 그는 내게 사그라드는 (테니스를 향한) 마지막 불씨였다.

사랑이냐 일이냐, 선택의 기로

그러니 윔블던. 더 이상 심장박동이 멈춘 마당에, 윔블던 소리를 들어도, 테니스공이 팍, 팍, 하고 튀는 소리를 들어도, 시큰둥. 세월은 그런 변덕도 부려댄다. 테니스가 야구가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다. 그럴 때, 흘러간 가요마냥 접했던 이름, '윔블던'. 영화였다. <윔블던>. 테니스 영화? 그럴 리가, 테니스를 빙자한 연애질! 로맨틱 코미디다.

윔블던(테니스 대회)을 향한 애정이 식었다손, 영화를 외면할 순 없는 법. 룰루랄라 윔블던을 향하는 마음은, 마냥 이야에로~ 공이 오가는 대신, 사랑이 오갔던 <윔블던>. 아, 테니스 코트엔 공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아무렴, 사랑볼이 통통 튀기는 잔디 코트. <윔블던>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당신의 사랑과 일은 안녕하신가!


맞다. 이 고전적이고 진부한 명제. ‘사랑이냐, 일이냐.’ 이는 여전한 위력을 지닌다. 갈팡질팡이다. 사랑을 따르자니 일을 망칠 것 같고, 일을 택하자니 사랑이 저만치 갈 것 같다.

선택은 가혹하다. 선택의 연속이라는 인생도 그래서 가혹한 것일까? 사랑과 일, 그 호락호락하지 갈림길은 가정을 허용치 않을뿐더러, 기회비용을 감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테니스공이 네트에 걸려서 넘어가느냐 마느냐를 놓고 희비가 엇갈리듯, 사랑과 일은 서로 그물이 되어 넘을 것이냐 마느냐를 놓고 가슴을 조인다.

헌데, 이 선택! 어쩐지 불온한 냄새도 난다. 선택을 강요하는 객체가 있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척하지만 그 이면에는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는 타자가 있기 마련이다. 사랑과 일의 양립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이 아니다.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사랑에 반대하는 누군가 혹은 ‘나보다 일이 더 중요하냐’며 사랑을 저울질하려는 누군가. 사랑과 일 사이, 양립을 어렵게 만드는 불온한 자장이 있다. 과연 이 선택에서, 온전한 자유의지의 발현은 가능한 것일까. 

이런 선택에서, 불리한 쪽은 여성일 가능성이 크다. 사랑과 일의 양립을 더욱 힘겹고 어렵게 만드는 것이 현실이니까. 남녀평등이 상식이라곤 하지만, 세상이 어디 상식처럼 움직이는가. 일에 대한 기회 자체가 여성에게 적게 주어질 뿐 아니라, 일을 하면서도 남성들의 카르텔에 의한 견제나 불합리한 대우를 견뎌야 하며, 더 많은 공력을 쏟아내야만 견딜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사랑까지 병행하려면 여성에게 ‘슈퍼 우먼’은 필수다. 원하건 그렇지 않건 말이다. 더구나 자녀 양육까지 겹친다면 대개의 경우, 여성에게 일은 포기하거나 뒤로 물릴 수밖에 없다. 자유의지? 장난치냐. 사회는 여성에게 개인으로서가 아닌, 한 남자의 아내나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따지고 들 것이다. 자유 운운말라며, 시덥잖은 충고를 해댈 것이다.

이 비극적(?) 선택. 사랑과 일의 함수는 어쨌거나 꼼꼼히 따질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 방정식을 풀기는 만만치 않다. 과연 사랑과 일은 서로 융합될 수 없는 대극의 존재일까. 이른바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윔블던에서 생긴 일!

<윔블던>은 사랑과 일 사이에서 공을 넘기면서 경기를 펼치는 영화다. 로맨틱코미디의 명가(名家) ‘워킹타이틀’이 만든 영화답게, <윔블던>은 사랑과 일을 손쉬운 대립항으로만 만들어놓지 않는다. 사랑과 일을 놓고 티격태격하던 이들이 해피엔딩으로 내달을 것임을 충분히 예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네트를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사랑과 일의 스매싱! 박진감 넘치는 테니스경기를 보는 것 이상이다. 유후~

자, 우선 조합을 보자. 별 볼일 없는 테니스 선수생활 끝에 은퇴를 목전에 둔 우울한 남자. 그리고 세계 최강자로 매력적인 외모를 갖춘 쌩쌩한 여자. 이런 극과극의 만남은 뻔한 스토리를 상정한다. 특히 이런 구도는 이전에도 워킹타이틀이 써먹은 적이 있다. 그렇다. <노팅힐>. 세계적인 할리우드 스타 여배우와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의 허름한 책방주인의 오렌지쥬스(로 맺어진) 로맨스. 이 어울리지 않는 주인공들의 갈팡질팡 로맨스는, 애틋하면서도 상큼한 감상과 짜릿함을 안겨줬다.

<윔블던>도 태생적으로 같은 어머니를 둔 때문인지 궤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운 좋게 윔블던 대회의 와일드카드를 따낸 ‘피터’(폴 베타니, 참고로 이 남자, 내가 좋아하는 배우, 제니퍼 코넬리의 남편이다)는 <노팅힐>의 윌리엄(휴 그랜트)와 조응한다.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도 받아본 적도 없고, 테니스 선수로서 더 이상 욕심도 없다. 그저 은퇴 후 유한부인들의 테니스 강사나 하면서 지낼 작정이니까.



반면 ‘리지’(커스틴 던스트)는 <노팅힐>의 안나(줄리아 로버츠)마냥 세계 최고의 테니스 여왕이다. 실력이면 실력, 돈이면 돈, 외모면 외모. 남 부러울 것도 없고 움직임 하나하나가 매스컴의 관심을 끈다. 테니스를 더 잘하고 싶으면서도 자유의지로 살아가고 싶다. 욕심쟁이, 우후훗~


이 두 사람. 쉬이 만날 것 같지도 않고, 만나봐야 별 스파크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그들. 헌데 그러면, 영화가 되지 않잖나. 그들을 맺어주는 건, 이번엔 오렌지쥬스가 아니고 샌드위치다. 물론 우연을 가장한, 샌드위치 로맨스.

그리고 이어지는 데이트와 사랑의 시작. 그런데 이들은 테니스선수로서 테니스대회에 참가한, 즉 일을 하러 온 것이 아니던가. 그것도 윔블던 대회다. 4대 그랜드슬램의 하나로 테니스계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

사랑은 꽃이 막 피려고 하나, 일도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두 사람 각자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 은퇴를 작정한 피터에게야 그저 닐리리 맘보다. 그저 마지막 대회 이상의 감흥은 없다.

반면 리지는 자기 앞에 잘나가는 선수는 없고, 수성만이 필요한 세계 최고의 스타다. 행여나 삐끗할 경우, 매스컴과 매니저를 보는 아버지의 등쌀과 눈총에 시달려야 한다.

일을 대하는 두 사람의 처지는 극과 극이다. 이런 마당인데, 사랑이 서비스 에이스처럼 꽂히고야 만다. 아, 과연 사랑은 일을 방해할 것인가, 사랑은 일을 업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랑과 일의 두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받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강서비스, 사랑을 엮다

로맨틱코미디의 습관성 서비스는 늘 우연에 꽂힌다. 우연으로 서비스 포인트를 얻는 습성이 있다. 피터와 리지의 만남과 사랑도 그러했듯, 별 볼일 없는 선수로 나이브하게 대회에 임했던 피터의 승승장구 또한 이변과 우연으로 점철된다. 우연찮게 시작한 사랑과 함께 일(테니스)에서도 시너지효과를 얻게 되는 케이스. 사랑과 섹스의 스매싱은 쌩쌩한 20대를 상대하기 힘들 것만 같던 30대의 피터를 구원한다. 우연이 빚어낸 기사회생.

그러나 그 사랑, 리지에게도 똑같은 효과를 내는 게 아니다. 경기 전의 섹스가 실제 게임에서도 도움이 될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리지는, 막상 시합에서 꼬리를 내린다. 서로 사랑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와중에서 두 사람은 엇갈린 길을 걷는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강해지는 피터와 시합을 망치면서 세계 최고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리지.

사랑이 깊어지는 만큼 각자의 일도 따라주면 좋으련만, 흑. 한쪽은 잘되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을 경우, 갈등은 깊어진다. 사랑 때문에 일이 울고, 일 때문에 사랑이 운다. 사랑과 일은 정녕 양립할 수 없단 말인가. 


사랑과 일 사이에서 삐걱거리는 두 사람의 행보. 익숙하면서도 즐겁게 네트 위를 오간다. 사랑 때문에 시합을 망치는 리지가 ‘사랑과 일의 양립’이 어려운 여성의 입장을 보이는 것도 같지만, 리지의 선택은, '사랑이냐 일이냐'는 진부한 명제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건 윔블던의 선물이다. 커스틴 던스트의 매력이 물씬이다. 이 여자, 생긴 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매력적이다. 

사랑과 일, 모두를 거머쥔 피터도 한쪽만을 위해 코트를 내달리지 않는다. 그는 중요한 결승전을 치르면서도, “우승하면 리지와 결혼해야지, 나와 취향이 다르면 어떡하지?”라며 딴 생각을 하는 남자다. 어찌 보면 중요한 일(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그가 황당하면서도, 그는 살아있고 입체적인 남자라는 느낌을 준다.

사랑과 일은 양립 가능하다. 지난 1월에 만난 명로진은 일 잘하는 사람이 사랑도 잘 하고, 사랑 잘 하는 사람이 일도 잘 한다는 '믿음'을 내놨다. 사랑 때문에 일을 못한다거나, 일 때문에 사랑을 못한다는 말, 그건 변명이다. 딱 그만큼만 사랑하고 일을 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일 때문이라는 어줍잖은 핑계를 댔던 적이 있다. 사랑은 늘 상대에게 거대하고 큰 것을 주는 것이 아닌데도, 나는 헛발질을 했다. 아마, 그것이 윔블던에 참가하지 못한 이유? ^^; 미안하다. 어줍잖았던 내 변명.

사랑과 일 사이의 외줄타기.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윔블던>의 두 사람은 그 와중에서도 각자의 내면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다. 리지와 피터가 은근슬쩍 건네는 메시지는 이런 거다. 사랑과 일 어느 하나가 ‘내부수리중’이라도 하나를 버리고 취하는 것보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랑과 일이 양립 불가능하다는 편견을 깨준 리지와 피터에게 감사. <윔블던>의 미덕.


아울러, 좋건 나쁘건 상대방 코트에 서비스를 넣고 볼 일이다. 매치포인트를 얻고 그렇지 않고의 문제는, 그 이후에 생각할 일이다.

아, 윔블던에 가고 싶다. 6월 중순의 런던을 보고 싶으니까. 그러면 혹시 아나. 샌드위치로 로맨스를 만들 수 있을지... 아니, 난 그냥 커피로 하련다. 난, 커피 만드는 남자니까!!! 이름하여, 윔블던 커피. 그러니까, 사진속 피터가 쥐고 있는 저 커피. 두 사람의 웃음과 행복을 증폭시켜주는 커피 되시겠다.


6월 중순, <윔블던>을 보고, 혹은 윔블던 테니스 대회를 보고, 나랑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하자. 내가 당신을 위해 만드는 커피 메뉴, 윔블던. 당신을 만나고 싶다. 당신을 위해 뽑아주고 싶다.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서비스 포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