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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저도 늙어간다고 말하고 싶어요..."... 에드워드 양 감독의 유작 <하나 그리고 둘>

by 낭만_커피 2007. 7. 2.
비를 타고 에드워드 양 감독의 타계 소식이 들려왔다. 어떤 준비도 미처 돼 있지 않았다. 이런 갑작스런 소식으로 7월을 열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하나 그리고 둘> 이후 언젠가 선보일 차기작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차기작 소식은 언감생심. 환갑을 채우지 못한 채 힘겨운 투병생활을 끝냈다는 소식이 먼저였다. 결국 <하나 그리고 둘>이 유작이 돼 버린 셈이다.

괜히 허해진다. 후미진 골목에서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생을 둘러싼 통찰을 넌지시 건네주던 멘토 혹은 스승을 잃은 기분이랄까. <하나 그리고 둘>은 나에게 그런 존재감의 영화였다. 그가 대만 출신의 감독이라거나,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거나 등의 거적은 내게 필요없었다. 그는 내게 생의 한 단면을 알게 해 준 고마운 이였다. 그것이 -한번 만나본 적 없어도- 그의 죽음이 내게 비통한 이유다.

결국 3년 전 국정브리핑에 올렸던 <하나 그리고 둘>의 감상평을 다시 한번 되새김질 해 본다.
에드워드 감독님의 새로운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그래도 남은 그의 자식(영화)들을 보며 그를 기억하련다.

안녕, 감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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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팍한 현대인의 일상. 속도와 경쟁의 논리는 현대 문명의 대표 논리다. 속도와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결국 삶은 일견 구차한 것으로 전락했고 거짓부렁 철학은 삶을 기만한다. 등 뒤에, 어깨 위로 놓여진 짐은 점점 무게감을 더하건만 우리에겐 뒤돌아볼 여지도 많지 않다. 이젠 반성이란 단어도 텍스트 속에서만 맴도는 단어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니 말이다. 앞만 보고 달리니 성찰할 틈이 어딨나. 그저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작동기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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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당에 스스로 볼 수 없는 뒤통수는 또 어떻게 볼 것인가. 볼 수 없고 겪을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불신. 현대인들은 그렇게 쓸쓸한 내면으로 침잠하고 있다. <하나 그리고 둘>은 그런 현대인들의 흔들리는 자화상을 미니멀하게 그려낸다.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삶에 대한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뚜렷한 메시지를 전파한다. 세상 어디에 있건 충분한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이야기로 말이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이라고 칭얼대는 도회적 삶. 앞만 보고 뒤를 보지 못하는 반쪽 시선은 그래서 불완전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파편 같은 이야기 속에서도 <하나 그리고 둘>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파도와 풍파에 이리저리 휩쓸리던 모래알들이 지난날의 상처를 통과의례로 삼고 한자리에서 연대감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뒤통수는 영원히 뒤에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뒤통수를 제대로 봐 주는 사람의 소리를 듣는 건 그야말로 행운이다. 삶은 그렇게 지속되고 진전되기도 한다.


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나 그리고 둘>이 지난 미덕 중 하나는 삶의 구석구석에 대한 관찰과 애정이다. 영화는 현미경을 들이댄 것처럼 삶의 미묘한 조각과 원자들을 한 꺼풀씩 벗긴다. 사실 <하나 그리고 둘>에서는 주인공이 없다, 아니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삶은 마냥 쪼개진 채 흩뿌려지지 않는다. 파편같이 조각난 삶의 그림들이 모여 하나로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각 개인의 캐릭터에 초점을 맞춰 그들의 동선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 한 물줄기를 본다.

아버지, NJ는 소란스러운 처남 아제의 결혼식에서 첫 사랑과 우연찮게 해후한 뒤 혼란을 겪게 되며 어머니(민민)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초라한 삶에 지쳐 가족들을 잠시 떠난다. 그리고 갑자기 쓰러진 할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지닌 채 사춘기의 혹독한 연애담을 겪는 딸(정정)과 꼬마철학자 같은 풍모로 감정에 미묘한 파동을 주는 아들(양양). 이밖에 이들이 이야기를 풀어나갈 시초를 주는 할머니와 어쩌면 도회적인 일상의 플롯을 간직한 아제(외삼촌) 등 <하나 그리고 둘>은 3대의 가정·개인사를 통해 연애담, 사업, 돈, 결혼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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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남 결혼식에 모인 NJ의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건 꼬마철학자, ‘양양’이다. 양양은 감독(에드워드 양)의 대변자이자 관객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다. 양양의 호기심은 간단하지만 만만치 않다.
“아빠가 보는 걸 난 못보고 난 보는데 아빤 못 봐요. 둘 다 보려면 어떻게 하죠? 왜 우린 뭐든 반밖에 못 보죠?”
이에 아버지(NJ)가 권한 카메라는 양양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도구다.
“왜 뒷모습을 찍느냐”는 물음에 양양은 대답한다. “못 보니까 보여 주려고요”

자기가 볼 수 없는 뒷모습을 다른 사람은 볼 수 있다는 것. 그야 누가 뭐래도 자명한 사실이고 모르는 사람도 없을 법한 얘기지만 누군가의 입 혹은 어떤 글이나 영상을 통해 그것이 발설될 때 그 의미는 자못 심장하다. 일상에서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부분이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깨달음과 관련을 맺을 수 있다.  

<하나 그리고 둘>은 또 한번 살다갈 인생의 소중함을 넌지시 속삭인다. 윤회사상이나 부활 같은 거듭남보다 현실에 뿌리를 내린,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에 대한 자각. 일장춘몽이라고 그랬거늘, 현실을 도외시한 채 일탈을 꿈꾸거나 일상의 무게감에 짓눌린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현재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가장 많은 힘과 노력을 쏟아야 할 곳”이라는 경구는 진실을 품고 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이를 위해 한 일본인 비즈니스맨을 등장시킨다. 어려워진 회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비즈니스의 추잡한 면모를 드러내는 NJ의 사업 파트너와 달리, 그는 ‘진짜’를 위해 NJ와 대화하고 신뢰를 쌓는다. 그는 이미 NJ가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하루하루가 그 날로선 처음이고 아침마다 새롭다는 사실’을, ‘똑같은 날을 두 번 살지 않음에도 아침에 깨는 걸 두려워하’는 우리네 일상에 의문을 던진다.   

이 말은 후반, NJ의 가족이 고비와 풍랑을 겪은 뒤 다시 되새김질 된다. 부인이 자리를 비운 새 옛날로 돌아갔다 왔음을 고백한 NJ는 깨달음을 읊는다. “삶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 다시 부딪혀 보면 다를 줄 알았어. 하지만 결과는 같고 다를 게 없었어. 다시 태어나는 건 별 의미가 없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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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을 만났던 NJ는 아내에게 이를 고해성사하며 깨달음을 읊는다.


그렇다. 인간은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반성하고 깨달으면서 삶을 지속시킨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다행이다. 미래를 미리 알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건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별다른 고난의 흔적을 남길 여지도 없고 그건 또한 심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예측 가능한 인생이란 여러 노력이 어우러진 성과일 수도 있겠지만 인생은 수시로 예측하지 못한 상황 앞에 휘청거리기도 하는 법이다.

한편으로 세대를 건너뛴 연애담은 엇갈린 갈지자를 그린다. 첫 사랑과 도쿄 출장길에서 재회해 첫 데이트의 감상을 되새김질하는 아버지와 같은 시각 대만에서 첫 데이트에 나선 딸이 병치된다. 또 30년 만에 만나 애틋한 감정의 선율을 보여주는 NJ-셰리(NJ의 첫사랑)와 꼬인 관계 속에서도 결혼 이후 가끔 ‘서비스’를 주고받는 아제-운운(옛 애인)의 두 종류의 재회는 다른 빛깔을 드러낸다. 전자의 경우 피천득의 ‘인연’을 연상시켜 서로 간절히 원하면서도 엇갈릴 수밖에 없는 회한의 감정을, 후자는 지극히 속물적인 욕망에 이끌리는 경박한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가끔씩 뒤를 돌아보자

21세기 인류는 광포한 전쟁의 현장을 그대로 목도하고 있는 한편 일상에서도 총성 없는 전쟁의 작두 위에서 굿판을 펼치고 있다. 살아남는다는 명목으로 타인에 대한 관용을 버리고 무식해지기 위해 자신에 대한 존중을 무시해버리는 현대인의 일상은 충분히 널브러져 있다.

그래서일까. 에드워드 양 감독은 날이 갈수록 잔인의 강도를 더해가고 인간에 대한 배신과 오해를 거듭하는 세상에서 매일 같은 굴레를 자초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단면을 쪼개볼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가끔은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 실패와 실수의 반복에서도 배우거나 깨닫지 못한 일이 많다는 것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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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정정은 할머니에게 고민을 이야기한다.


제목, <하나 그리고 둘>은 어쩌면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는’ 도시인의 삶을 가리키는 지도 모른다. 영화 카피가 “스스로가 보지 못하는 뒷모습 같은, 나머지 진실 반쪽을 담고 있는” 얘기라고 표현했듯, 가끔씩 뒤에도 진실이 있을지 모른다. 내가 걸어온 길 위에 무엇이 나있는지, 나의 뒷모습은 어떨지 물끄러미 되새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어느 순간, 한 꼬마가 당신 뒤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럴 땐 한 마디 해주는 건 어떨까. “그 사진 나에게 주겠니?”라고. 우린 또 다른 삶의 진실을 마주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담담하면서도 인상적이다. 거센 풍랑이 치는 바다를 건너온 가족들은 할머니의 장례식에 모두 모인다. 그런데 할머니에게 평소 얘기를 않던 양양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얘기를 담담하게 읊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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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영전 앞에서 이야기하는 양양.


“할머니 죄송해요.
할머니와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제가하는 말은 죄다 할머닌 아시니까 안했어요.
할머닌 가셨는데 하지만 어디로 가셨죠? 아마 우리가 아는 곳일 거에요.
남이 모르는 일을 알려주고, 못 보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럼 날마다 재밌을 거예요. 할머니 계신 곳도 찾겠죠.
그러면 모두에게 말해서 함께 할머니께 가도 되나요?
할머니 보고 싶어요. 특히 이름이 없는 아기를 보면.
할머니가 늘 늙었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요.
저도 늙어간다고 말하고 싶어요.”

유작이 된 <하나 그리고 둘>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