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살아온 바로는,
생은, 신성불가침의 무엇이 아니더라.
생은, 의도하건 그렇지 않건, 곳곳에 생채기를 남긴다.
그것을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또한 생임은, 두말해서 잔소리.
이 여자, 미흔도 그랬다.
(남편의) 사랑 하나면, 다른 무엇도 필요없다고, 생이 충분하다고 믿었던 여자. 남편이라는 이름의 남자, 효경의 '제도 이탈'이 있기 전까지는. 생은 어처구니 없이 돌변한다. 그것이 사람살이의 속성이다. 병적인 유머센스를 발현하는 어떤 순간이 있다. 그건 예고도 없다. 그리고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감식하게 되는 생 혹은 자아.
책을 덮고서, 나는 남편에게 벗어나 홀로 된 미흔이 걱정되진 않았다. 단독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생의 하찮음도, 인간이라는 존재의 시시함도 자각하지 않았을까. 에필로그를 통해 그는 토로한다. "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데도 생에 대한 나의 의욕은 불가사의하다.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며 세상을 향해 인사한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 너무 큰 수업료를 물었지만서도.
그러나, 사설 우체국 직원으로서의 미흔의 실체적 삶은 고단함의 연속일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심리적 의존은 벗었지만, 자본 앞에 벌거벗은 미흔의 실존은 다른 성격의 격랑과 마주대할 것 같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 사랑의 실재와 허구를 건드리고 싶었다는 전경린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나는 미흔의 실존적 후일담이 더 걱정되는 건 왜일까.^^;
어쨌든, 이 소설은 2008년 현재엔 약간 낡았단 생각을 했다. 소설 첫 발간 시기가 1999년이었음을 감안하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책에 나온 사랑, 가족, 모랄, 관습 등은 IMF 직후의 혼돈상에나 먹힐만한 이야기들. 물론 아직 유효하고 현재진행형인 것도 있지만, 소설의 전반적인 아우라는 낡은 뉘앙스를 풍긴다. 기대를 뒀던 탓인지는 몰라도, 금기를 깬 격정의 섬광은 약했고, 화염같은 정염 역시 미진했다. <밀애>(변영주 감독)의 원작이라는 점도 기대감을 일으킨 요인이었나보다.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사랑의 재구성
'사랑밖에 난 몰라'를 외치던 여자, 미흔. 그가 무력해진 것은 사랑을, 생의 완전무결한 테제로 보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충격의 강도가 더 커졌던 게지. 사랑은 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타인에 절대적으로 기댄 사랑은 위험하다. 함정임 작가도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살게도 하지만, 또한 사랑은 죽게도 하는 것"이라고. 미흔의 사랑은, 그렇듯 철저히 관념적이었다. 철저히 실존적이어야 하는 것이 사랑이건만.
사랑은, 또한 제도보다 개인의 모랄에 의해 규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패륜범죄'로 규정됐지만, 시아버지를 죽인 부희가 재판정에서 밝힌 하소연과 부희가 쌓은 사연은, 제도에 억압당한 사랑의 실체를 절감케 한다. 삶은 한 번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음에, 사랑은 그의 실존이자 생의 주인공으로 복귀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리라. 사랑은 교훈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언제 사랑 그 자체로 존재한 적이 있던가. 생에 시비를 걸고 위협하는 것이 일상다반사.
결과적으로 미흔을 불구덩이로 유도하는, '규'는 그런 남자였다(나는 사실 그들의 격정이, 규의 의지라기보다는 미흔이 만든 것이라고 본다). '부질없는 명예욕이나 야심을 갖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 마젤란이라는 책을 읽고', '영웅전의 허를 너무 많이 아는'. 그래서 '사는 게 지리멸렬하고 사랑한다는 따위 귀찮은 결과가 생기는 것은 질색'인 남자. 그럼에도, 게임의 패자로 귀결되는 "사랑해"라는 말을 건네고야 마는 남자. 남은 감정은 영원 속에 익사시켜야 하는 형벌을 받고야 만.
나 아닌 것은 털어내는, '개인'의 모랄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은 개인을 꺼낸다. 조직과 사회 속에 함몰된 그 개인의 존재감. 그리하여, 개인의 오롯한 욕망에 충실할 것을, 자아의 진정한 자립에 힘쓸 것을. 특히 여성을 향해. '아이란, 가정이란 그 아름다운 동화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유폐시키는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이 생에서 실종되는지'.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네 현실도 그러하듯이, 그들도 대부분 어찌할 수 없다. 알면서도 꼬꾸라지는. 그것은 부정맥이다. 사회 의식과 개인의 부조화. 의식이 규칙적인 수축과 이완에 의해, 당대의 생에 대해 통제하고 요구하거나, 시대의 모랄을 시각화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옥죄고 마는 것. 시대의 모랄과 요구와 통제를 전혀 수용하지 못한 채 답습하다가 심근경색에 걸리고 말.
효경도 안다. 다른 삶이 없음을. 다른 철학이 없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제도를, 빌어먹을 그 제도를 혐오하고 싶지만, 그는 또한 뛰쳐나올 용기가 없다. 그는 이미 뼈가 굳었다.
미흔의 친구들 역시 토로한다.
일본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그랬다. "남들이 보지 않으면 갖다 버리고 싶은 것이 가족"이라고. 우리도 안다. 가족의 중요성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도, 어쩌면 우리가 그 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편한 진실을 정면에서 대면하기 위해선 큰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개인은, 그래서 모랄을 내세우지 못한다. 정해진 틀에 맞추지 않으면, 그저 예외로 치부될 뿐이다. 나이 먹고, 때 되면, 으레 해야 하는 것들 투성이다. 정상-비정상을 가르고, 온전하게 타인의 결정과 선택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 이해까지 바라지 않음에도. 결국 떠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저 따돌림을 당한 채 버티고 견딜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이 책을 읽고,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행과 불행을 택하는 것이 아니고, 행과 불행이 우리를 선택한다는 사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버티고 견뎌야 한다는 것.
경쾌해지고 싶었다.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만큼의 농담같은 생을 살고 싶다는 것.
생은, 신성불가침의 무엇이 아니더라.
생은, 의도하건 그렇지 않건, 곳곳에 생채기를 남긴다.
그것을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또한 생임은, 두말해서 잔소리.
이 여자, 미흔도 그랬다.
(남편의) 사랑 하나면, 다른 무엇도 필요없다고, 생이 충분하다고 믿었던 여자. 남편이라는 이름의 남자, 효경의 '제도 이탈'이 있기 전까지는. 생은 어처구니 없이 돌변한다. 그것이 사람살이의 속성이다. 병적인 유머센스를 발현하는 어떤 순간이 있다. 그건 예고도 없다. 그리고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감식하게 되는 생 혹은 자아.
책을 덮고서, 나는 남편에게 벗어나 홀로 된 미흔이 걱정되진 않았다. 단독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생의 하찮음도, 인간이라는 존재의 시시함도 자각하지 않았을까. 에필로그를 통해 그는 토로한다. "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데도 생에 대한 나의 의욕은 불가사의하다.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며 세상을 향해 인사한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 너무 큰 수업료를 물었지만서도.
그러나, 사설 우체국 직원으로서의 미흔의 실체적 삶은 고단함의 연속일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심리적 의존은 벗었지만, 자본 앞에 벌거벗은 미흔의 실존은 다른 성격의 격랑과 마주대할 것 같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 사랑의 실재와 허구를 건드리고 싶었다는 전경린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나는 미흔의 실존적 후일담이 더 걱정되는 건 왜일까.^^;
어쨌든, 이 소설은 2008년 현재엔 약간 낡았단 생각을 했다. 소설 첫 발간 시기가 1999년이었음을 감안하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책에 나온 사랑, 가족, 모랄, 관습 등은 IMF 직후의 혼돈상에나 먹힐만한 이야기들. 물론 아직 유효하고 현재진행형인 것도 있지만, 소설의 전반적인 아우라는 낡은 뉘앙스를 풍긴다. 기대를 뒀던 탓인지는 몰라도, 금기를 깬 격정의 섬광은 약했고, 화염같은 정염 역시 미진했다. <밀애>(변영주 감독)의 원작이라는 점도 기대감을 일으킨 요인이었나보다.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사랑의 재구성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사막에 사는 여자처럼 그 속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었어. 육십 도의 고열도, 육 년 동안의 가뭄도, 뜨거운 모래바람도, 백이십 일간의 부재도, 삶 자체의 남루함과 처참함도...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참을 수 있게 하는 사랑이 박탈된 거야. 넌 단지 부정을 저지른 게 아니라 내 생을 빼앗아버렸어. 안 돼... 난 이제 절대로 예전처럼 될 수 없어. 아무리 시간이 흘러가도 너를 다시 사랑할 수 없어. 삶이 참을 수 없이 하찮아. 사람이 왜 허무해지는지 아니? 삶이 하찮기 때문이야. 마음을 누를 극진한 게 없기 때문에..." (p54~55)
'사랑밖에 난 몰라'를 외치던 여자, 미흔. 그가 무력해진 것은 사랑을, 생의 완전무결한 테제로 보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충격의 강도가 더 커졌던 게지. 사랑은 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타인에 절대적으로 기댄 사랑은 위험하다. 함정임 작가도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살게도 하지만, 또한 사랑은 죽게도 하는 것"이라고. 미흔의 사랑은, 그렇듯 철저히 관념적이었다. 철저히 실존적이어야 하는 것이 사랑이건만.
사랑은, 또한 제도보다 개인의 모랄에 의해 규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패륜범죄'로 규정됐지만, 시아버지를 죽인 부희가 재판정에서 밝힌 하소연과 부희가 쌓은 사연은, 제도에 억압당한 사랑의 실체를 절감케 한다. 삶은 한 번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음에, 사랑은 그의 실존이자 생의 주인공으로 복귀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리라. 사랑은 교훈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언제 사랑 그 자체로 존재한 적이 있던가. 생에 시비를 걸고 위협하는 것이 일상다반사.
'어차피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그를 사랑했다. 애초부터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서 내 손으로 키우기 위해 열아홉 살의 나를 농사꾼에게 팔았다. 그 삶은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아버지를 다시 만났을 때, 재회를 없던 일로 하고 그대로 살까도 했었다. 그러나 난 그를 사랑했다. 그런 사랑을 하면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을 몰랐겠는가. 그날 시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내가 그 낫에 찔려 죽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늘 무서웠지만 나는 사랑을 그만두지 않았다. 나에게 남자는 당신들이 간부라고 부르는 내 아들의 아버지뿐이다. 그러니 나는 절대로 당신들이 말하는 부정한 여자가 아니다' (p63~64)
결과적으로 미흔을 불구덩이로 유도하는, '규'는 그런 남자였다(나는 사실 그들의 격정이, 규의 의지라기보다는 미흔이 만든 것이라고 본다). '부질없는 명예욕이나 야심을 갖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 마젤란이라는 책을 읽고', '영웅전의 허를 너무 많이 아는'. 그래서 '사는 게 지리멸렬하고 사랑한다는 따위 귀찮은 결과가 생기는 것은 질색'인 남자. 그럼에도, 게임의 패자로 귀결되는 "사랑해"라는 말을 건네고야 마는 남자. 남은 감정은 영원 속에 익사시켜야 하는 형벌을 받고야 만.
그리고 규의 이력에 대한 힌트가 있다. 그는 아마 기자였을 것이다. 학창시절, 손등에 가위를 찍어 무림파의 실세로 등극했다던 그는, 사는 게 너무 무료하고 시시했음을 기자질을 통해 깨달은 듯 하다. 그의 그런 출신 때문에 더 눈여겨봤던 것일까. 그의 이력은 미흔에게 건넨 짧은 농담 같은 말에 나와 있다.
"자라서 기자가 되죠. 그리고 사는 게 너무 시시해서 돈 많은 이혼녀와 결혼하고 시골의 우체국장이 되어 건달처럼 사는 거예요."
결론적으로, '규'는 영웅이다. "영웅이란 얻는 자가 아니라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놓는 자"라는 그의 정의에 따르자면. 사랑을 부정하면서도, 결국 사랑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놓고 마는 영웅. 스스로 단독자라고 자부했던 자마저도 무력화시키고 마는 것이 또한 사랑.
"난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벌어먹이느라 늙고 지쳐가는 소시민적인 삶보다는 수상쩍고 고독하고 홀가분한 단독자의 삶을 택했어요. 그 편이 나에게 쉬우니까."(p 85)
지난 1월 전경린 작가와의 만남에서 사인을 받았다.
나 아닌 것은 털어내는, '개인'의 모랄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은 개인을 꺼낸다. 조직과 사회 속에 함몰된 그 개인의 존재감. 그리하여, 개인의 오롯한 욕망에 충실할 것을, 자아의 진정한 자립에 힘쓸 것을. 특히 여성을 향해. '아이란, 가정이란 그 아름다운 동화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유폐시키는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이 생에서 실종되는지'.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네 현실도 그러하듯이, 그들도 대부분 어찌할 수 없다. 알면서도 꼬꾸라지는. 그것은 부정맥이다. 사회 의식과 개인의 부조화. 의식이 규칙적인 수축과 이완에 의해, 당대의 생에 대해 통제하고 요구하거나, 시대의 모랄을 시각화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옥죄고 마는 것. 시대의 모랄과 요구와 통제를 전혀 수용하지 못한 채 답습하다가 심근경색에 걸리고 말.
- 이 나라에선 마흔이 넘으면 다른 삶이 없어. 다른 철학이 없으니까 솔직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거지. 그러니 스무 살엔 혁명을 했다 해도 마흔만 넘으면 모두 현실 속에 귀순하는 거야. 새로운 모랄을 창조하지 못하면 저항이든 혁명이든 아무 소용도 없어. 나도 답답하지만, 대체 무슨 방법이 있겠어? 처자식을 버리고 바랑 하나 메고 속세를 등지지 않는 이상... 어쨌든 이 제도 속에서 벌어먹고 살아야 하잖아. 세금도 내야 하고. (p119)
효경도 안다. 다른 삶이 없음을. 다른 철학이 없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제도를, 빌어먹을 그 제도를 혐오하고 싶지만, 그는 또한 뛰쳐나올 용기가 없다. 그는 이미 뼈가 굳었다.
미흔의 친구들 역시 토로한다.
"가정이란 구역질 아니면 공포라니까... 둘 중 하나야."... 구역질과 공포, 그건 삶이 기획한 조건이기도 했다. (p219)
일본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그랬다. "남들이 보지 않으면 갖다 버리고 싶은 것이 가족"이라고. 우리도 안다. 가족의 중요성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도, 어쩌면 우리가 그 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편한 진실을 정면에서 대면하기 위해선 큰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개인은, 그래서 모랄을 내세우지 못한다. 정해진 틀에 맞추지 않으면, 그저 예외로 치부될 뿐이다. 나이 먹고, 때 되면, 으레 해야 하는 것들 투성이다. 정상-비정상을 가르고, 온전하게 타인의 결정과 선택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 이해까지 바라지 않음에도. 결국 떠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저 따돌림을 당한 채 버티고 견딜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왜 이 땅에선 개인적인 모랄이 생기지 않는 걸까... 왜 젊었을 때는 다르게 반항한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똑같은 것을 추구하게 될까... 왜 좀더 다양한 생이 없을까. 개인적인 창의성의 부족이라는 이유가 아니라면 달리 수긍할 만한 변명거리가 있을까... 나 아닌 것들은 다 털어내버리고 오직 나만으로 구별되고 싶었다... (p119~120)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결혼도 어쩔 수 없는 혼란과 모순과 야만의 부분을 갖는 것이 결혼 아닐까. 어떤 결혼도 그 자체 속에 피할 수 없는 함정을 지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결혼 속에서 모든 아이들은 숙명적으로 울면서 자라나는 것이 아닐까..."(p254~255)
또한 여자들을 둘러싼 구속과 속박은 상대적으로 더욱 견고하다. 자본과 기득권을 지닌 보수주의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어떤 굴레. 미흔 역시 그런 굴레에서 어떤 깨달음도, 그것을 깨치고 나갈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남편의 일탈을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미흔이 동화를 깨는 장면은 그래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좀더 강렬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아이란, 가정이란 그 아름다운 동화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유폐시키는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이 생에서 실종되는가. 그럼에도 나 여기 있다고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어야 했을까. (p114)
이 책을 읽고,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행과 불행을 택하는 것이 아니고, 행과 불행이 우리를 선택한다는 사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버티고 견뎌야 한다는 것.
경쾌해지고 싶었다.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만큼의 농담같은 생을 살고 싶다는 것.
"생의 불행이나 허무나 권태 따윈 이미 자명한 사실이오.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지. 우리가 문제삼아야 할 건 가능한 경쾌해지는 것이오."... 인간의 불행은 자명한 사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 이상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 것이다. (p137)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밀애'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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