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기지의 환경오염 현황 및 정화계획, 정화사업 진행 상황이 상시 공개된다는 경기도의 발표가 있었다.
진즉, 말 안해도 당연해야 할 것이 선심쓰듯 발표되는 것이 나는 못마땅하지.
지들끼리 꿍꿍따, 놀고 있는 꼬라지, 졸라 못마땅.
그렇게 미국만이 유일하게 해외에 군사기지를 두고 있지, 잘났어 증말.
사실, '괴물'은 여전히 서식 중이다.
2년 전 온 천하에 정체가 드러났음에도, 뻔뻔도 하지.
이젠 새끼까지 깠다.
그 쉐이는 근데 돌연변이인지, 변태인지, 쥐새끼 닮았다. 찍찍.
괴물 찌끄레기로 설쳐대는 꼬라지, 장난 아니다. 머리 용량은 꼴랑 2MB란다.
콱 쥐어불고 싶은 쥐쉐이.
젤로 짜증나는 건, 그 쥐쉐이, 약자들만 물고 늘어진다는 게다.
괴물 찌끄레기다보니, 만만한 건, 그저 약하고 없는 자들 뿐이다.
딴데 가선, 찍소리도 못하는 쥐쉐이.
토건사업 한답시고, 기실 시궁창이나 뒤지던 쉐이라, 악취만 진동하는 쥐쉐이.
70년대의 구호가 그랬다지. "우리 동네 남은 쥐를 모두 잡자"
어쩜, 그리 70년대 구호와 딱 어울리시나. 이 쥐쉐이.
절대 괴물이 되지 못함을 알면서도, 괴물을 욕망하는 꼬라지하곤.
2006년 7월27일, '괴물'의 존재가 세상에 공개적으로 처음 드러났던 날이었다.
영화 <괴물> 개봉.
1300만이 넘는 흥행의 첫 테이프를 끊으며 등장했던 괴물은,
끝내 박멸되지 않았다.
2년이 지난 지금, 괴물은 되레 서식지를 넓힌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우리 안의 괴물도 점점 더 커져간다.
2년 전에서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외려 뒤로 밀리고 있는 우리 동네.
쥐쉐이까지 득세할 정도로 서식환경이 더 나빠진 탓이다.
괴물과 쥐쉐이의 서식앞에 우리의 생존법은, 아마 '하악하악'(?)
이에 한국과 미국은 환경치유와 절차 등을 놓고 1년6개월여 동안 ‘협상’을 진행해 왔다고 한다. 한국정부는 ‘오염자부담원칙’을 들어 주한미군의 책임을 주장했으나 ‘합의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오염정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기지들을 돌려받게 된 상황. 힘 센 놈의 ‘강압’에 의한 것인지, 그렇지 못한 자의 ‘포기’였는지는 몰라도, 이른바 ‘합의’는 이뤄졌다. 그렇다면 이른바 깡패에게 삥 뜯길 때도, ‘합의’는 된 거다.
한국 정부를 대표한 환경부는 미국과의 합의 결과를 “우리 정부가 원하던 수준에 미흡하다. 나머지 오염 치유는 반환 이후 우리나라(국방부)에서 치유할 계획이며, 국민부담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환경부는 그 치유 비용을 기준에 따라 277억원~1205억원이 들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환경단체 등에서 추산한 수천억과는 큰 차이가 난다.
☞ "오염 미군기지 반환, '협상'이 있긴 있었나"
☞ 14개 미군기자 환경오염 실태 또 드러나
#2. 2000년 용산 미군기지 영안실 부소장 맥팔렌드 앨버트는 한국인 직원에게 주검 방부처리용 약품인 포름알데히드 475㎖짜리 480병(20상자)을 싱크대 하수구에 버리도록 명령했다. 포름알데히드는 장기간 노출될 경우 백혈병 등 암을 일으키는 발암물질로 물에 희석돼도 독성이 없어지지 않으며, 하수구에 버릴 경우 하수관을 타고 퍼지는 가스도 유해하다. 이른바 ‘맥팔렌드 사건’.
당시 명령을 받고 이를 방류한 군무원은 이를 미8군 34사령부에 보고 및 진정을 제기했으나 미군은 별 내용없이 유감만을 표시했다. 이에 녹색연합은 당시 토머스 슈워츠 주한미군 사령관과 맥팔렌드 부소장을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서울지검은 포름알데히드 무단방류 지시 혐의로 맥팔렌드를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했고 서울지방법원은 정식재판에 회부했다.
담당재판부는 공소장 부본을 맥팔렌드에게 송달하려 했으나, 주한미군 당국은 수차례 수령을 거부했고 현재까지 공판은 열리지 못하고 있다. 더 웃긴 건, 미군은 맥팔렌드에 대한 자체적으로 감봉 30일의 징계처분을 했다는 공식입장을 발표했으나 얼마 뒤 맥팔렌드는 영안소 소장으로 승진까지 한 반면 이 범죄행위를 시민단체에 제보한 한국인 군무원은 해고당했다. 웃기는 짬뽕이다.
똥배짱과 굴욕 사이
환경오염 관련 국제 원칙은 ‘오염자’ 부담이다. 그리고 범죄가 저질러졌다면 처벌받는 것이 당근 아닌가. 오염자와 범죄자가 누구인지는 명약관화하다. 그런데도 저지른 자는 ‘똥배짱’이고 피해를 입은 자는 ‘굴욕’이다. 줄 거는 다 주면서도 돌려받는 건 불신뿐인 이 괴상망측한 상황. 지금의 한미관계는 예를 들자면, 부하가 살인을 저지른 조폭 두목을 위해 큰집까지 갔으나 가족들도 돌봐주지도 않고 배신당한 그런 형국 같다. 최소한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말,은 여기서는 통용될 것 같지 않다. 이미 ‘괴물’이 돼 버린 마당 아닌가.
잠깐, 괴물(怪物)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1. 괴상하게 생긴 물체.
2. 괴상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괴상(怪常)의 의미는 또 이렇다. 보통과 달리 괴이하고 이상함. 보통 정도의 수준이라면 저런 어이없는 작태를 보일 리도 없다. 한마디로 수준이하다. 수준 이하의 것들을 이제부턴 ‘괴물’이라 부르자.
현실사회가 낳은 ‘괴물’
개봉 직후 승승장구, 파죽지세인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 이런 미국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반미감정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일정부분 맞다. 한강변에 나타나는 괴물의 탄생비화(?)를 다룬 첫 장면. 주한미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한국인에게 포름알데히드의 무단방류를 지시한다. 그렇다. ‘맥팔렌드 사건’이 자연스럽게 대입된다. 독극물을 먹고 자란 괴물은 한강을, 서울을, 한국을 공포로 잠식한다. 미국이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현실사회에 대한 노골적인 메타포(은유)다.
이와 함께 미국(정확하게는 부시정부)의 괴상스러움은 다른 형태로도 풍자된다. 괴물의 탄생에 일조한 독극물의 방류에 이어 대중에 공포심을 주입하는 ‘(괴물)바이러스’. 기득권이 자신의 세력과 힘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은 알려져 있다시피 간단하다. 공포와 위험을 조장하는 것. 기득권의 개인기다.
영화 속에서도 이 같은 기제는 고스란히 작동한다. 있지도 않은 괴물 바이러스는 미국과 당국에 의해 존재하는 것처럼 규정된다. ‘에이젼트 옐로우’. 웃기지도 않은 바이러스 퇴치단의 존재에서 국제 정세의 한 단면이 연상되지 않는가. 그렇다. 이라크전. 전쟁광 카우보이들의 전쟁 명분은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WMD)와 생화학무기였다. 이미 일을 개차반으로 벌려 놓고선 ‘잘못된 정보(miss information)’에 의한 것이라고 당당히 말한 카우보이 괴물.
미국은 최근에도 ‘잘못된 정보’를 나불거렸다. 지난 6월 수니파 종교지도자를 7시간이나 구금해 수니파 이라크인들의 강력반발을 사기도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란을 향한 군사공격 위협 역시 마찬가지다. 부시정부는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하는 작자들의 모임 혹은 저질러 놓고선 나중에 ‘아님 말구’라며 뻔뻔하게 들이대는데 일가견 있는 집단이다.
그런 한편으로 기득권(지배자)이 만들어놓은 바이러스 포비아의 악영향은 세상을 우울하게 만든다. 사람들 사이에 만드는 간극. 극 중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행렬이 이를 대변한다. 기침하는 사람에 대한 따가운 눈총. 이를 통해 문득 AIDS바이러스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떠올린다. 전염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을 조장하고 동성애에 대해 폭력을 가하도록 만든 어떤 편견. 이 편견 또한 우리 안의 괴물.
☞ 편견과 차별 그리고 자본, 감염인의 생명을 노린다
☞ 감염인에게 날아드는 해고통지서, 직장검진
그렇다. 괴물이 미국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괴물’은 다층적이다. 시작부터 ‘독극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괴물>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사회를 그렇게 투영한다. 무고한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안겨다주고 생명을 빼앗는 괴물의 존재는 도처에 깔려 있다. 동맹을 무기로 때론 한국민의 삶을 억압하는 미국, 없는 자를 더욱 핍박받도록 시스템을 강권하는 신자유주의, 어이없는 명분으로 전쟁을 도발하는 패권주의, 한국이라는 땅에서의 비극 혹은 재난 등등.
현실사회의 메타포
봉준호 감독은 미군으로부터 잉태된 괴물의 활약상(?)을 현실사회의 여러 모습과 결합시킨다. 괴물로 인한 재난은 그동안 우리네 사람살이를 끔찍하게 만든 인재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영화상의 설정이 낯설지 않다. 제대로 된 근대화를 거치지 못한 채, 비호감을 급호감으로 바꾸고자 노력했던 세월. 정권과 기득권의 호령에 억지춘향식 끌려 다닌 부작용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허우대 좋은 조어를 만들어놨지만, 음습한 곳에서 키운 한강의 괴물은 결국 우리네 사람살이를 위협하는 꼬라지.
봉 감독은 이를 위해 한강변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한 가족을 등장시킨다. 현서만 완전소중 챙기는 빈둥빈둥 소시민 강두(송강호)를 비롯, 운동권 출신 대졸실업자 남일(박해일), 늘 타이밍을 놓쳐 늦되는 남주(배두나), 강두의 현명한 딸 현서(고아성), 그리고 과거세대의 초상을 대변하는 할아버지 희봉(변희봉). 잘난 것도, 별달리 대수로울 것도 없고 가끔 사고 치면서 근근이 하루하루 버티는 루저 가족.
이들은 우리네 사람살이의 비극을 보여준다. 외부 혹은 내부의 적들에 둘러싸인 눈물나는 분투 혹은 애환. 현서를 찾기 위한 박씨 일가 앞에 우리 내부의 괴물이 떡하니 나타난다. 죽은 줄 알았던 현서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박씨 일가의 말을 씹는 건 미군도 아니고, 바로 내부에 있었다.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에 노출된 위험인물로 낙인을 찍는 것은 물론, 말을 씹는 것도, 우리를 지켜주는 존재로 알았던 ‘공권력’.
그들은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아이를 잃은 슬픔 따윈 안중에 없다. 또 다른 병균의 숙주로 치부해버리곤 감금과 치료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딸을 찾고자 애원하는 강두를 가볍게 정신병자로 몰아세우는 의사의 정신병적 매몰참은 또 어떻고. 뇌물 요구하는 공무원, 그림에만 몰두하는 언론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등등 우리 안의 괴물은 똬리를 튼 채 언제든 우리네 삶을 그로기로 몰고 갈 태세다. 강두 가족은 그저 누구의 도움도 없이 고군분투할 도리밖에.
뭐 글타고 이런 알레고리를 심오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익숙한 기제들 아닌가. 그저 웃으면서도 서글픈 심정이 밀려듦을 막을 순 없지만.
혹자는 바이러스에만 골몰하고, 괴물을 잡는데 띄엄띄엄한 정부나 당국의 처사가 이상하다고도 했지만, 나는 그것 역시 이 땅의 현실을 넌지시 알려주는 상징이 아니었나하는 싶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 구해주기보단 뒷북만 열라 쳐대는. 늑장대응, 수수방관..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봉 감독이 그걸 감안했다면 빙고~, 아님 말구.^^; 혼자만의 해석일 뿐이니 다른 생각이라면 나에게 돌을 던져도 좋다만ㅋㅋ
어쨌든 영화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나 현실을 적나라하게, 혹은 넌지시 떠올리게 만든다. 악몽 같은 일들을 여느 일상처럼 겪는 이 땅의 특수한 상황에서 괴물은 바로 바로 우리를 자양분으로 삼아 태어난 것이 아닌가. 이 풍자를 웃으며 바라봐야 하는 씁쓸함. 이 쓸씁함과 슬픔을 블랙유머로 풀어낸 봉 감독의 솜씨야 여기저기서 주야장천 떠벌린 마당이니 생략.
이 과정에서 봉 감독은 정치적 함의를 다분히 품고 있음에도 프로파간다로서의 괴물을 직조하진 않는다. 그의 시선이 꽂히는 것은 괴물 등쌀에 부대끼는 소시민의 삶과 그들의 연대다.
약자들은 뭉치고 서로를 보호해야 한다
<괴물>은 우리가 슈퍼맨이나 X맨 등 기존 할리우드 영화들이 보여준 영웅상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존재와 맞닥뜨리도록 한다. 그건 일방적 구원이 아니다. ‘상호 보호’라는 테제를 간직한 한국형 영웅이라고나 할까. 그들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 악을 무찌르는 익숙한 영웅의 전형과 다르다.
그들은 자기 삶을 지키려는데 충실하다. 굳이 가족애나 가족주의란 테두리를 짊어지지 않아도 좋다. <괴물>은 일견 현서를 구하기 위한 강두를 비롯한 박씨 일가의 ‘괴물(무찌르기) 원정대’의 좌충우돌기 같지만 결론까지 보자면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괴물에 잡힌 현서가 그 출구 없는 하수구에서 더 작은 아이를 보호하려 애쓴다. 탈출을 시도하다 두 명 모두 괴물의 입에 먹혔을 때도 현서는 그 아이를 자신의 작은 몸으로 에워싼다. 그리고 강두가 그 아이를 거두는 과정.
그들은 약하긴 매 한가지지만 경쟁이나 생존을 위해 더 약한 자를 밟고 일어서지 않더라. 봉 감독이 인터뷰에서도 밝힌 내용도 그렇다. “...서로가 서로를 계속 보호하려는 이런 설정은 제가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기도 해요.”
미군의 악행과 공권력의 부재로 괴물은 설쳐대고 가족은 갈기갈기 찢긴다. 나약한 소시민들이야 ‘보이는 위협’ 앞에 움츠러들고 타인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그건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아무 액션 없이 무너질 수 없는 것이 사람살이다. 괴물로부터 위협당해도 더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힘이 필요한 곳엔 손을 내밀 것을 권하는 것이 내가 본 <괴물>이었다.
누군가를 짓밟고 일어서라는 무한 경쟁의 구도를 주입시키지 말았으면 한다. 약육강식이 아닌 상호보호가 필요한 시대. 자국민들의 안위를 보장하지 못하면서 실체 없는 국익을 들먹이며 ‘걱정마라’는 흰소리만 해대는 정부가 누구에겐 괴물일 수도 있다. 대체 누구를 위한 이익인가. 양심을 걸고 했다지만, 그의 양심을 믿는다손, 그 양심이 지켜줄 것은 정작 약자들이 아닌 강자의 이익일 수 있음을 모르는 걸까, 알면서 그러는 걸까.
비슷한 경제수준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느끼는 나라의 비극(MBC다큐멘터리 '행복'을 보니 그러더라). 강자는 괴물이 되고 약자는 노리개로 전락하는 사회. 장삼이사의 사람살이는 세계평화나 정의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조금이라도 더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뿐이다. <괴물>의 괴물이야 보이는 위협이지만, 21세기를 휘감고 있는 괴물은 워낙 얍삽하지 않은가. 그 괴물에 맞설 수 있는 건 서로 손을 맞잡는 것 밖에 더 있겠나.
그러나 사실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남의 고통엔 관심없는, 그래서 너무도 엄혹한. 최근의 일만 놓고 봐도 그렇다. 포항 건설노조의 포스코 본사 점거를 놓고 ‘왜’라고 물으려 하지 않고 그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시선, 평택 대추리 농민의 절규·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울부짖음에도 되려 그들을 배부른 자들의 농땡이 정도로 치부했던 눈길. 악의 평범함. 누구 말마따나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것이 미덕이라고 강요당하는 시대, “너의 불행과 아픔이 곧 나의 행복과 기쁨”이 이 시대의 명징한 징후 아니던가.
과연 이런 상황에서 연대가 가능하고 희망을 끄집어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신기섭 한겨레 논설위원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기득권층은 원래 그렇다 해도, 이들과 엇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은 달라야 한다. 그런데 왜 그들조차 점점 외면할까? 제 스스로 고통을 감당하기도 버겁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이웃의 고통에 예민해지는 것이 함께 사는 길이다.”
이글, 일독을 권한다
☞ 남의 고통에 무덤덤한 사회
최소한 인간은 아니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괴물이 되지 않는 길도 명징하지 않는가. 나도 당신도, 우리 안에서 키운 괴물에 잡아먹히는 일은 끔찍하다. 그리고 그것 자체도 인식하지 못한 채 사는 것은 더 끔찍하다.
<괴물>을 보면서 새삼 이 문구가 떠올랐다.
“약자는 뭉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너지는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약속의 장소는, 물론 없을 지도 모르지만, 이런 곳이다. 약자들이 뭉치는 곳.
그래서 나는 <괴물>이 좋았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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