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종드 쭌/무비일락

정말 마음을 다해 부르면, 평화가 올까요?...

by 낭만_커피 2011. 12. 5.

<마당을 나온 암탉> 이전, 내겐 <오세암>이 있었다. 

대중적으로 그닥 호응을 얻지 못한 작품이었지만, 당시의 시대상에 비춰, 이 애니는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때는, 카우보이 전쟁광의 온당치 못한 침략전쟁이 일단락됐던 시기였다. 인류사가 지속되는 한, 전쟁은 ‘끝’이란 단어를 쉬이 허용하지 않을 터이지만, 당면했던 전쟁의 포성은 멎었다(고 여겨졌다).

21세기에도 야만이 계속되고 있음. 그것을 증명하는 건, 언제나 전쟁이다. 명분이야 그럴듯해도, 결국엔 이권을 위한 다툼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역시나 이권과 폭력.

인간이 얼마나 아름답지 않은 존재인지 확인하는 과정은 길지 않았다. ‘꽃보다 아름답고 픈’ 바람도 욕심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했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던 부르짖음도 공허한 메아리이자 거짓이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나는 꽃이 사람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자위할 순 있어도. 

문명의 발전이 곧 인류의 진보를 보장하거나 확언하지는 않는다. 문명이랍시고 시작돼 늘 그래왔듯, 세상은 가혹할 뿐이다. 인간은 그런 세상을 조장하거나 혹은 세상에 공조해 왔다. TV브라운관을 통해 나타나는 전쟁이후의 혼란상을 보자니, 상반된 감정들이 파편처럼 흩날렸다. 더 이상의 피를 보지 않고 끝난데 대한 안도감. 그리고 오만한 카우보이 매부리코를 꺾지 못한데 대한 안타까움 혹은 아쉬움.

당시 나는 전쟁을, 파병을 반대한다고 떠들어 댔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목소리를 냈지만, 현실은 바람과 다른 방향이었다. (세상을 바꾸지 못한) 자잘한 메아리들이 희망의 지푸라기를 부여잡게 해 줬지만, ‘힘’과 ‘다수’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던 현실은 존재의 미욱함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나마 전쟁의 포화가 멎었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내 마음의 야비함. 평화를 부르짖었지만 결국 평온함을 갈망했을 뿐인 이기심.

궁금했다. 정말 마음을 다해 부르면 평화가 올까. 알다시피,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그 천인공노할 무력에 흠집조차 낼 수 없는 나의 무력함. 팔다리가 잘려나간 이라크 아이들의 상처입은 눈망울을 향해 눈물밖에는 짜낼 게 없는 허탈함. 분노와 슬픔은 관념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구호와 시위 속에 던져졌지만, 그것은 평화와는 무관했다.

그리고 그 피흘림이 채 마르기 전에 우린 '핵'이라는 위험에 직면했다. 어디 하나 마음 편히 둘 곳 없이 불안을 품고 살아가야 할 현실은 가혹하기 그지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과 역시나 하는 마음의 교차로는 위태로운 사람살이의 풍경을 가감없이 보여줄 따름이다.

그렇듯 마음의 위무가 필요한 시기. 위태롭게 출렁이는 현실의 강 위에서 무엇이 평정심을 안겨다 줄 수 있을까. 슬픔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그런 힘을 가진, 차가운 금속성의 첨단 무기들이 박힌 시신경에 따스함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그런 상상의 세계가 그리워지는 나날이었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지만...

그런 시절을 위로하듯, 그땐 고 정채봉 동화작가의 따스한 감성을 담은 동화 《오세암》이 스크린에 부활했다. 작은 위안이나마 얻을까하고 담채화 같은 풍경을 눈에 넣었다.


영화 <오세암>은 남매의 엄마찾기 여정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얼핏 ‘엄마 찾아 삼만리’를 연상시킨다. 맞다. 엄마를 찾아 길 떠나는 길손이와 감이의 여정은, 어쩌면 그보다 더한 ‘슬픔’을 동반한다. ‘세상에 없는’ 엄마를 찾아야하니까. 문득, 어른들의 전쟁 때문에 엄마아빠를 잃은 이라크의 아이들이 중첩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세암>의 동심은 ‘엄마’라는 거부할 수 없는 소재로 그리움을 덧칠한다. 다른 이름도 아닌, 엄마니까. 다섯살배기 개구쟁이 길손이와 눈 먼 누나 감이, 세상에 둘밖에 남지 않은 오누이. 그들의 여정은 이미 슬픔과 신파를 동반하고 있다. 두 사람의 상황을 보자. “하늘처럼 생긴 물이 꼭 보리밭처럼 움직인다”며 바다의 모습을 길손이가 묘사하면, 누나는 귀를 통해 이를 형상화하면서 세상을 마주대한다. 아름다워서 슬프고, 슬퍼서 아름다운. 이런 형용모순의 순간. 

그러나 뭣보다 감이는 엄마를 보는 것이 소원인 길손이에게 차마 불길에 엄마를 잃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못한다. 세상에 없는 엄마를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게 떠돌던 오누이는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설정스님을 따라 절간에서 겨울을 나기로 한다. 개구쟁이 길손이는 절간을 자신의 놀이터로 만들고 악동짓을 해댄다. 그것이 결코 밉지 않다. 그 천진난만한 동심에 깃든 애틋함이 충분히 보이기 때문이다.  

길손은 그것이 궁금하다. “자신보다 나쁜 아이들에게도 있는” 엄마가 자기에겐 없다는 것. 마음의 눈을 뜨면 무엇이든 볼 수 있다는 스님의 말에 길손이 혹하는 건 당연하다. 설정스님을 따라 길손이 암자로 들어가는 건, 눈 먼 감이가 엄마를 보고도 놓쳐버릴까 걱정이 돼서다.

문제는 거기서 또 발생한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장터로 내려간 설정스님은 거친 눈보라를 만나고, 발을 헛디뎌 의식을 잃는다. 비극이 깃든다. 홀로 암자에 남은 길손. 스님을 기다리다 지쳐 관세음보살과 대화를 시작하고,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엄마를 애타게 찾던 아이는 마음속에서 엄마를 만난다. 다섯 살 아이가 부처가 된 암자, 그래서 ‘오세암’은 탄생한다. 

<오세암>은 이렇듯 길손이 부처가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담았다. 굴곡도 별로 없고 클라이맥스의 극적인 구성도 없다. 다만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감성을 자극하고 동심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의 한 자락을 건드릴 뿐이다.

느린 구성과 듬성듬성 드러나는 어색한 신들은 관객의 감정폭을 극대화시키기엔 역부족이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할 것을 권유하지만 어른도 아이도, 불교적 해탈이나 기적에 대해 쉽게 동화하기 어렵다. 길손의 바람이 이뤄졌다는 기쁨보다, 마무리가 느닷없이 빠르게 치달음으로써 관객들에게 감정의 파고를 조정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라는 <섬집아기>의 선율이 가슴속에 몽클하게 접근하고 한 폭의 수묵 담채화같은 스크린 속 빛깔이 미덕이 될 순 있지만, 이것이 완성도를 보장해 주진 않는다. 한국형 애니메이션을 표방했지만, 일본과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길들여진’ 관객의 눈길을 돌리기엔 힘이 부친다. 

어른이나 아이, 모두에게 일정 간격의 틈을 둔 <오세암>은, 다만 꽃(?)같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동심을 접하고 싶을 때, 미덕이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런데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우리는 현실에서 그렇게 잠시나마 발을 빼고 싶어하는가. 인간은 이미 주변부로 내몰렸음은 부인할 수 없다. 애국심으로 포장된 패권주의가 피를 튀기고 사람을 살육한다. 국가의 이기심은 현대판 흑사병과 같은 사스(SARS)가 창궐하도록 방치한다. 되레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국가의 시스템이자 체제다. 실체도 없는 국익논쟁은 또 어떤가. 거기에 개인은 없다. 인간은 없다.  

서로를 불신하고 피하게끔 만드는 세상의 이기는 점점 파괴력을 키운다. 자본은 교묘하고 이권은 폭력을 수반한다. 그것들은 정감 있고 따스한 세상에 대한 기대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끔 유도한다. 무력함을 심어주는 가장 극악한 방법. 주변에서 힘을 북돋아주기보다 이를 바득바득 갈아서 타인을 짓밟고 가도록 만드는 것들이 더 많은 현실. 영화는 동심은 과연 탈출구가 될까.

정말, 마음을 다해 원하면 세상의 평화가 올까? 지금의 인류에게 그게 가능할까.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된다면
단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 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고 정채봉 작가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