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종드 쭌/무비일락

피도 눈물도 없이, 모두 다 죽는다!

by 낭만_커피 2011. 11. 12.

인정하기 싫지만, 세상의 근간은 폭력이다.

자, 스크린을 지켜보자. 주먹을 휘두른다. 손가락을 자른다. 칼로 얼굴을 긋는다. 치과용 드릴로 입 안을 휘젓는다. 젓가락으로 귀를 쑤신다. 몸에 칼을 넣는다. 총을 쏜다. 좀 더 나가볼까? 머리에 보자기를 씌우고 길가의 기둥에 줄을 매달아 달리는 차에서 떨어져 죽게 한다. 
 


상상할 필요는 없다. 세상엔 이보다 더한 폭력(의 기술)이 난무하니까.

악(惡)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냐고? 저건 조직폭력배(갱, 야쿠자)의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믿고 싶을 수도 있겠다. 지금-여기를 보라. 가카의 통치 아래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고 안온하냔 말이다. 뭔 일이 터지든, 가카는 그러실 분이 아니다! 광화문에 산성을 쌓고, 용산에 불을 지르며, 쌍용차나 부산 영도(한진중공업)에 경찰폭력배들을 투입하는 일 따위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분이 하실 일이 아니다.


강력한 위계에 따른 명령과 복종으로 유지되는 조직이 있다. 조직폭력배를 생각할 수도 있겠고, 군대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어디든, 겉으론 그렇다. 허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물리적 행위만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그런 곳엔 '의리'가 있지 않냐고? 왜 이러시나. 그건 이미 박물관에 박제된 유적이다. 의리 대신 탐욕과 배신, 협박이 난무한다. 이권 때문이다. 그것이 폭력과 악을 때론 혹은 수시로 추동한다.

김훈은 악과 폭력의 바탕 위에 세계가 세워졌다고 말한다. 그것에 나는 '이권' 하나 덧붙이고 싶다. 아니, 지금은 이권 때문에 악과 폭력이 발생하는 것 아닐까? 국가마저도 '국익'으로 포장한 '이권'에 몰두하는 세상. 돈이든 권력이든 있는 놈들은 더 많은 이권을 삼키지 못해 안달이다.  

장담컨대, 지금 세상에 순수한 악이나 온전한 폭력은 거의 없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아웃레이지>는 그것을 증명한다. 혹은 선언한다. 악의 순정한 결정체로서, 마초적 폭력의 완성체는 없다!

그래서 이 영화, 여느 갱스터 영화와 다르다. 멋있게 죽는 법이 없다. 하나같이 동정 없이 죽어간다. 죽음과 죽음 사이엔 냉혹함만 흐른다.


참, 많이도 죽는다. 영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죽임과 죽음을 보여준다. 감정을 동반하지도 않는다. 건조하다. 더구나 죽임과 죽음 사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협박을 밥 먹듯 하고 폭력은 몸에 배인 행위다. 배신은 일상다반사다. 이권을 향한 생존본능만 번뜩이는 수컷들 앞에 다른 명분이나 정서의 흔들림은 사치다. 

그 모든 것은 이권 때문이다. 서열 파괴, 의리 박멸, 양심 증발, 모두가 이권이 추동한다.
     

<아웃레이지>의 원제(일본)는 ‘全員惡人(전원악인)’이란다. 글쎄, 순정한 악인조차 될 수없는 이들에게 그런 타이틀, 한편으로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그저 장삼이사 아닌가? 어쩌면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정서적으로 피폐한 건가?


모르겠다. 일상에서 나는 늘 폭력(물리적이진 않아도)을 목격하고, 협잡을 목도한다. 분칠한 협박은 표백제를 뒤집어 쓸 정도고, 악의 평범성은 이제 식상하다. 나라고 거기서 자유롭진 않다.

기타노 다케시의 세계는 여전하면서도 더 촘촘하고 냉정한 유머를 발산한다.  

<아웃레이지>의 결말은 그래서 섬뜩하면서도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이권을 향한 대물림. 사람이 바뀔 뿐, 세상의 근간은 뿌리 깊다. 어디서부터 잘라내야 할지 당최 알 수 없는 견고한 시스템. 우리는 이권과 폭력과 악을 패션처럼 입고 있다. 

<아웃레이지>의 폭력이 잔인하다고? 나는 아니었다. 조직폭력배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세상의 단면을 본 것 같았다. 영화가 폭력을 전시했다고 느끼지 않았던 이유다. 그래서 잔인했다. 세상의 잔인함을 스크린을 통해 새삼 확인해서. 내가 너무, 이권에 예민하고 폭력이 일상화됐으며, 악을 내면화한 인간이어서 그런 걸까? 나는 글러먹었다. 된장. 조심해라. Outrage할지도 모른다. 

물론, 절대 해치진 않아요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