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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아멜리에, 관계 맺기의 달인!

by 낭만_커피 2011. 12. 5.
“도토리야, 너는 살아남아야 해. 그래서 이 세상하고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해.”
“관계를 맺는다는 게 뭐지?”
“그건 마음속에 오래 품고 있던 꿈을 실현한다는 뜻이야. 너는 너 자신의 꿈뿐만이 아니라,
우리 낙엽들의 꿈까지도 실현시켜야 할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 “놀라지 마라, 도토리야. 네 몸 속에는 갈참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어.”

- 안도현 시인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관계》 중에서 -


우리, 관계 맺을까?
‘나’, 하나만 덜렁 있다면, 관계는 없다. 그래, ‘너’, 좋다. 나와 너가 합쳐서, 함께 하면 ‘우리’가 된다. 그것은 관계 맺기의 기본. 즉, 관계 맺기는 원맨밴드가 아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 사물, 그 누군가가 됐건, 무엇이 됐건.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가진 무언가들 사이, 관계가 나타난다. 사람과 사람 뿐 아니라 사람과 사물, 자연과 사람 등 모든 자연지물 사이에 나타나는 일종의 의식. 그것이 관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헌데, 가슴 한 구석을 텅 비워야만 살 수 있는 이 역겹고 험한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관계 맺기 아닐까. 그럼에도 세상은 부인할 수 없이, 관계 맺기의 연속이다. 하다 못해 이글을 읽는 당신과 나도, 독자와 필자라는 ‘관계’가 될 수 있겠다. 그래서 우린 ‘관계인’이고. 관계가 우리 둘 사이에 있다. 이 어찌 그냥 두고 넘기겠는가 말이다.
 
생각해 봤다. 웃고 울고, 기쁘고 슬프고, 행복하고 불행하며, 홀가분하고 참담한, 사랑하고 무관심한, 세상 모든 감정과 우리가 느끼는 것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직장을 그만두는 이유? 일이 힘들기보다 인간 관계 때문이라지 않나. 아무렴. 나는 학교에서 배우고 알려줘야 할 것은, 국어, 영어, 수학 따위가 아니라, ‘관계학’이라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사랑, 우정, 미움 등의 모든 관계가 세분화될 수도 있겠다.


왕따에서 행복 전도사로 

그땐 좀 그런 게 어려웠다. 학교는 물론이요, 누구 하나 가르쳐주지 않았던 탓도 있고, 깊이 생각해보질 않았다. 직장에서 동료라곤 하지만, 이거 사사건건, 부딪히기만 하니, 어떤 상사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무조건 옳았다고 내세울 건 아니지만, 그 관계들, 참 어려웠다. 나를 비롯해 다들 지가 잘났다고 고집하는데, 스파크가 튀고 마찰이 생겼다. 여자친구와의 관계 역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 맺기의 꼬임. 아, 어쩌란 말이냐.   

그럴 때, 세상 속에서 관계 맺기가 어렵다고 느꼈던 그 때,  아멜리를 만났다. 《아멜리에》. 와우, 보면서 놀랐다. 그녀는 그야말로, 관계 맺기의 명수였다. 그것도 ‘행복 바이러스’를 세상에 별빛처럼 뿌리는 행복 전도사.

그렇다고 그녀가 처음부터 관계 맺기의 달인이었던 건 아니다. 아빠의 오해가 낳은 심장병 때문에, 그녀는 외롭게 자랐다. 관계 맺기가 심장에 줄 충격을 염려해, 제대로 관계 맺기를 못했다. 그런 아멜리가 변신하는 것은, 관계 맺기의 달인으로 바뀌는 것은 극적인 이야기를 품는 것으로 처리됐다. 다이애나 비가 교통사고로 죽던 날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낡은 상자의 구슬, 플라스틱 군인, 빛바랜 사진 따위가 아멜리의 삶을 통째로 바꿔놓는다. 이렇게 말하는 건, 사실 와 닿지도 않고,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 영화를 보고 느껴야 할 따름이다. 말과 글의 한계다.

하여튼, 낡은 상자는, 절망을 담았던 판도라의 상자와 다르다. 그 상자와의 만남은 행복을 나눠주는 기쁨을 가르쳐주는, 결정적 장면이다. 상자만 아니었다면 아멜리는 아마도, 흐지부지, 지리멸렬, 엄벙덤벙에 불과한 소녀이자 여자였을 것이다.  

다시 태어난 순간, 그녀는 그 어렵다는 관계와 무척 친해진다. 희한하게도, 그녀는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던 관계도 초강력 오공본드처럼 척척 그리고 단단하게 붙여줄 수도 있고, 관계를 행복하게 만든다. 혹시 그녀는 초강력 슈퍼접착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인간의 마음과 마음이 부딪히는 와중에서도 아멜리의 능력은 신통방통이다. 

신경과학자들이 그랬다. 인간의 마음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은, 천체물리학도, 뇌수술도 아닌, 자신의 관점을 포기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견해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이 곧, 관계 맺기의 핵심이 아닐까. 
아멜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 경우다.
 

아멜리, 이 깨물어주고 싶은 깜찍녀

변신에 이어 아멜리가 꾸미는 음모는, 앙증맞고 깜찍하다. 종횡무진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폐쇄적이 된 아빠를 위해, 친구에게 부탁해 세계 각지에 아빠의 인형 사진을 놓고 찍는다. 그렇게 아빠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 실종된 남편을 기다리는 아래층 아줌마를 위해 남편의 편지인양 가짜 편지를 보내고, 50년 전 추억의 상자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담배 가게 아가씨와 그 주변을 맴도는 총각을 연결해주고, 착한 야채가게 청년을 구박하는 주인아저씨를 혼내주고... 굳이 정의를 위해 나서진 않더라도 상관 없다. 원더우먼이 따로 없다. 아멜리가 원더우먼이다.

아멜리의 관계 맺기는 환상적이다. 그녀가 맺는 관계 속에, 행복의 꽃이 가득 피어난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바이러스를 팍팍 뿌려대는데, 왜 부메랑이 돌아가지 않겠는가. 니노와 눈 맞은 아멜리. 달콤한 미소를 지닌 정체불명의 그 남자, 니노. 행복은 이제 아멜리 차례다.

아멜리의 심장은 주책없이 방망이질을 해대고 사랑은 찬연한 불빛을 뿜어댄다. 모든 관계 속에서도 제일은 ‘사랑’ 아니겠는가. 아! 두근두근 콩콩!! 국보자매의 노래, '두근두근'이 아니라도, 심장이 뛴다. 독고진(<최고의 사랑>)이라도 그럴 것이다.  

행복 포자의 생명력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엉뚱한 행동이 결합된 아멜리의 행복 포자가 더욱 사랑스러운 이유가 있다.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이들의 삶을 바꿔놓기 때문이다. 수고롭고 짐진 자에게 행복을. 그것이 바로 아멜리식 관계 맺기의 정수가 아닐까?

아멜리는 자신을 위해 산다. 행복을 주는 것이 기쁘다. 단지 그것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자신이 행복해지기 때문에 그녀는 바이러스를 살포한다. 아멜리가 있어 모든 무생물들도 금방 숨 쉬고 뛰어다닐 것처럼 생명력을 가진다.

아, 내가 행복해야 하는 구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남을 돌아볼 수도 있고, 관계 맺기를 제대로 할 수 있구나.

아멜리를 찾습니다, 혹은 내 자신이 아멜리?

모든 관계는 상호 작용을 통해 고래처럼 숨 쉰다. 아멜리가 꿰어 맞추는 관계의 앙상블은, 이 동정 없는 세상에는 없는, 아니 있을 수 없는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가깝게 평택의 쌍용차도 그랬고, 지금 부산의 한진중공업이 그렇다. 그 속엔 관계라곤 찾아볼 수 없다. 특히나 있는 자들의 행태는 가관이다. 관계 맺기 자체를 거부하는 그들만의 세상.  

그래서였을까. 아멜리가 펼쳐놓는 판타지에 한없이 중독되고 싶다. 기실 동화적 판타지임을 알면서도, 그 도저한 선한의지의 전염성에는 마찰 계수를 계산하고 싶지 않다. 

20세기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이 일갈한 자신의 삶에 대한 규정을 관계 속에서도 대입해보고픈 욕심이 생긴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그리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덕분일까. “당신 없는 오늘의 삶은 어제의 찌꺼기일 뿐”이라는 관계망의 형성에 나는 마음을 뺏기고야 만다. 헤어짐이 잦은 세대, 그냥 가벼운 눈웃음만으로 충분한 관계를 가져가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했지만. 안도현 시인은, 이 세상 어른들은 ‘눈사람을 만들 줄 모르는, 단지 눈사람을 발로 찰 줄만 아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판타지를 기대하는 것도 어렵지만.

묻고 싶은 거지.
 
관계로 인해 행복하십니까?
관계 덕분에 살림살이 많이 나아지셨습니까?

아, 현실은 여전히 냉랭하고... 어딨니? 아멜리...

다시 관계를 생각한다.
좋은 관계는 삶을 재밌고, 풍요로우며 흥미롭게 만든다. 뭣보다 살아갈 용기와 열정을 제공한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더 나은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좋은 관계란 그런 것이다. 내가 경험한 가장 좋은 연애는 그런 것이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

참, 직장에서의 관계 맺기는 어떻게 됐냐고? 아멜리가 돼서 직장의 화목한 웃음을 책임졌냐고? 아니. 그런 마찰적 관계 맺기에 내 마음을 더 이상 썩어 문드러지게 할 필요는 없겠더라고. 나갔지. 내 진짜 마음을 감춘 채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건, 더 나쁘다는 걸 아멜리가 알려줬거든. 그러니, 안녕. 

다만, 함께 본 여자친구에겐 더 깊고 너른 관계 맺기를 시도하게 됐었지. 그녀를 나는 '아멜리'로 불렀고, 그녀는 아멜리처럼 내게 행복포자가 됐다. 물론, 과거형이지만. ^^; 그래도 행복했다, 아멜리. 고맙다, 아멜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