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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9.11 10년, 슬픔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by 낭만_커피 2011. 9. 11.
가장 최근에 만난, 9.11(의 상처 혹은 트라우마)
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는 <내 이름은 칸>이었다. 무슬림계 인도인 칸이 미국에서 겪어야 하는 생의 균열. 


"나는 칸입니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


칸이 그 말을 미국 대통령에게 전해야 할 이유는 절실하고 절박하다. 무슬림을 향한 무조건적인 공격성과 배타성, 편견의 심화. 칸은 희생자다. 희생자를 만드는 이유는 하나다. 9.11. 미국인들의 심장에 박힌 테러의 쓰라린 기억 때문이다. 물론 그 테러는 무슬림과 상관이 없다. 편견이라고 했잖나.

9.11이 꾸준히 삶에 틈입한다. 그건 나와 상관 없는 일이 아니다. 세계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는다. 영화를 통해서도 9.11은 그 자장이 퍼진다. 직접적으로도 다루고(<화씨 911>, <플라이트 93>, <월드 트레이드 센터)), <내 이름은 칸>처럼 간접적으로도 다룬다.

간접적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건 어줍잖은 분류다.
9.11의 자장에서 직간접적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9.11로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이 더 참혹하다 하겠지만, 우리의 마음은 누구할 것 없이 이미 상처 입고, 고통에 짓눌리고 있다. 9.11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그것을 잘 모르고 간과할 뿐이다.  

<레인 오버 미>는 쓸쓸했다.

2007년 9월, 9.11 6주기 즈음 개봉했던 이 영화를 본 곳은, 지금은 없어진, 당시 압구정의 스폰지하우스(구. 시어터 2.0)였다. 작은 극장에 관객은 많지 않았고, 홀로 찾아든 극장은 왠지 숙연했다. 9.11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코미디 배우로만 각인된 애덤 샌들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 영화는, 9.11이 한 사람의 삶을, 한 세계를 어떻게 바꿨는지, 가슴을 서서히 파고든다.

찰리 파인먼(애덤 샌들러)에겐 단 하루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생의 균열은 대개의 경우 그러하듯, 순식간에 다가온다. 수많은 '만약'을 잉태하면서 말이다. 찰리에게도 다르지 않아서, 2001년 9월11일은 생의 모든 의미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아내와 세 딸을 잃은 남자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찰리에게 과거는 악몽이고, 그 기억은 그의 현재와 영혼을 잠식했다. 그 상흔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그는 자발적 외톨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의 대학시절 룸메이트이자 치과의사 앨런(돈 치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찰리는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감각을 닫고 살아가는 자폐증 환자나 다름없다. 생의 감각을 열었다간 그 상처를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까.


자신 앞에 닥친 슬픔은 감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당신은 슬픔을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이를 감당하나.


요즘 나의 가장 큰 화두다.

일상이 늘 슬픔에 잠겨있지 않지만,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슬픔 앞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한없이 침잠한다. 멀쩡하게 돌아가는 세상이 불쑥 미워져서 세상에 한 대 아구를 날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아프고 슬픈데 다른 사람의 마음이 다 무언가.

그런데 한 쪽에서는 네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게 뭐지?

네가 왜 이렇게 아프고 슬픈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아니? 그렇게도 묻는다.  

<레인 오버 미>의 찰리가 자신을 철저하게 닫았다면, 
앨런은 타인의 시선에 포박된 삶을 살았던 경우다. 이른바 '남들 보기에' 부러울 것 없고, 버젓한 삶이었는지 몰라도, 그건 순전히 타인의 시선에 복무하는 삶이었다. 그가 갑갑함을 느끼고, 진짜 자유를 맛보고 싶은 욕망을 가지는 것, 그래서 당연하다. 

그런 앨런에게 자기 탐구의 길을 열어주는 존재가 찰리다. 
세상에 문을 닫은 찰리에게 혼자가 아님을 상기시켜주는 존재가 앨런이다.
 


세상엔 같은 슬픔과 아픔을 공유해도, 서로를 할퀴거나 튕겨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내를 잃은 찰리와 딸을 잃은 장인·장모가 그렇다. 상처의 골이 한없이 깊어서일까. 함께 보듬고 안아도 부족할 마당에 각자의 상처를 후벼파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걸까.

그것이 한길 마음속 알 수 없는 사람일지 몰라도,
한 사람을 이해하고 보듬는 게 얼마나 힘든가. 더구나 예기치 않은 사고로 슬픔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그때, 대단한 리액션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찰리와 앨런이 서로에게 건네는 것은 눈물겨운 위로나 포옹이 아니다. 일상을 함께 호흡하면서 견디고 버티자고 건네는, 고요한 사투다.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안아줄 수 있을까. 
누구나 상처 입고, 피를 흘리는 참혹한 세상에서. 그래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찰리와 앨런이 그랬던 것처럼.  

레인 오버 미(Reign over me).
'나를 지배해달라'는 액면가로 읽는 것은 오독이다. 
아마, 내 곁에 있어 줘, 정도가 좋겠다.
앨런이 찰리를 감싸고 도움을 주는 것 같은 관계는 액면이나, 오독이다.
앨런과 찰리는 서로에게 삼투한다. 충돌과 마찰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서로의 곁에 머문다. 앨런은 고요한 사투를 통해 찰리의 슬픔에 비로소 접근한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포박되지 않은 삶을, 조금씩 되찾는다. 그가 일방적인 도움을 준 것이 아니다.

슬픔앞에서 아무 일 없었던 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갈 자신이 없다.
지금이 그렇다. 과거의 슬픔(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슬픔의 폭과 깊이가 같지도 않고, 겪어도 겪어도 그건 익숙해지지 않는 무엇이다.

남이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보다 자아탐구가 필요하구나.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이리 말했단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진정한 성장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룸메이트였던 찰리나 앨런이 다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소울에이트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융의 말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성장했을 것이다. 슬픔을 한 순간에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슬픔은 딱지가 생기기 마련 아닐까.

모두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9.11이 알려준 이야기 중의 하나였다.
10주기가 된 9.11. 얼마나 많은 일이 생겼는지 생각해보라.
9.11은 그런 당신의 10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가위면서도 9.11이 겹치는 시간. 묘한 순간이다.

레인 오버 미. 지금 내게 필요한 자아탐구의 시간이다. 당신도 있어줬으면 좋겠다. 나도 당신 곁에 있고 싶다. Reign over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