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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그 사람 인 시네마

심장을 겨누다, 눈물을 자극하다!

by 낭만_커피 2010. 11. 1.
이런 경험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관, 극장이다. 스크린에 눈을 박고 있는데, 꺼이꺼이 소리내 펑펑 울고 싶은 그런 경험. 으이구! 그게 뭔, 쪽 팔림에 주책이냐고 타박할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다. 아주 가끔은 그러고 싶을 때가 온다. 물론, 영화 때문이다. 혹은 영화에 나온 배우 때문일 때도 있다.

어제, 그러니까 시월의 마지막 날에 그랬다. 그대가 예상하듯, 맞다. 내 청춘의 한 얼굴(내 낯짝과는 무관하다만!)이었던, 리버 피닉스의 기일. 17주기였다. 된장, 하늘은 부끄러운 듯 맑았고, 날씨는 한량처럼 부드러웠다. 하긴, 여기는 한국이다. 리버 피닉스가 쓰러진 미쿡이 아니다.

어떤 커피를 마시느냐, 고민도 눈앞에 놓인 커피노동의 고단함 앞에 쉽게 꼬리를 내렸다. 미쿡이잖아. 아메리카노. 올해는 어쩔 수 없다. 대신, 나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밤 10시로 예정된 거사(!)였다. 리버 형의 기일에 스크린을 통해서 만나는 리버 형의 영화라니! 리버루야~

내 오랜 시간 형의 기일을 기려왔건만, 이런 영광은 없었다. 기껏해야 DVD로 때워야 했던 내 가난하고 소박한 의식. 그런데, 어쩌다 이런 은총이! 오래 살고 볼 일 맞다. 더구나, 이번에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는 작품은 <허공에의 질주(Running on Empty)>.  서울국제가족영상축제였다. 처음 가는 장지역 가든파이브의 CGV송파도 문제될 게 없었다. 리버 형아 만나러 가는 길에 그까짓 초행길쯤이야!

음, 이런 특정한 날, 이런 특정 영화를 보는 관객들 아우라는 여느 영화의 것과 다르다. 다양한 영화적 기호나 취향을 갖고 자리에 기댄 게 아니다. 오로지, 리버 피닉스. 그 이름에 기댄 영화적 경험을 위함이다. 그러니, 공기부터 다르지. 이들과 나는 리버 피닉스라는 끈으로 서로의 마음이 묶인 그런 기분. 물론, 옆에 앉은 내 친구처럼 꼬드김에 의한 관람도 있겠지만. ^^;
 

그래, 초장부터 "야구는 내 인생이야(Baseball is my life)"라고 나오는 영화에 무장해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금발의 열여덟 살 소년, 리버 피닉스가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고 그런 대사를 친다. 물론, 야구는 극중에 아무런 존재감이 없다. 나 혼자서, 좋아서 히죽거렸다.

리버 형은 시종일관 알흠답다. 어쩜 인간이 저렇게 알흠다울 수 있는 거야. 저러니, 하늘이 천국을 장식하기 위해 일찍 데려가지. 알흠다운 건 알아가지고 말야. 하나님 취향도 거참. 난 오래 살겠구나, 된장. 박제된 알흠다움에서 숨막힘을 느껴야 하는 살아남은 사람들.

아참, <허공에의 질주>? 베트남전의 연장선상이요, 68혁명의 이음선이었다. 가족영화이면서 성장영화였다. 그런데, 여느 같은 장르의 영화와 다른 지점이 존재한다.

반전운동 차원에서 군사실험실 폭파를 시도했다가 예기치 않게 경비원을 다치게 하고, FBI를 피해 15년간 도망다니는 가족. 이름은 수시로 바꿔 진짜 이름도 헷갈리고, 집은 살 엄두도 못낸다. 평생 직장은 고사하고, 일자리만 구해도 다행이다. 친구? 세상엔 그런 단어도 있어? 재학증명서나 성적증명서 같은 건, 다른 별 얘기다. 

이런 '운동권 히피'를 봤나, 싶고 혁명 운운하면서 뭔가 가르치고 계몽하려 들지 몰라, 의심하면 당신은, 틀.렸.다. 아니면, 가족은 무조건 떨어져선 안 되고, 떼려야 뗄 수 없는 끈끈함 그 자체다, 라는 가족의 소중함을 설파할 거라고 단정한다면, 꿀밤 한 대 맞고 시작하자.


제목은 절묘하다. (세간의 기준으로) 허공에 대고 그들은 삽질만 한다. 그런데, 조낸 열심히, 어떤 설명적 훈계 없이, 그렇다고 뚜렷하거나 특별한 목적지 없이 도망가고 또 도망간다. 세상과 불화하는 가족의 도망자 신세를 표현하는데, 제목은 딱이다.

리버의 존재감이 빛나는 것은, 모태집시적 몸짓이, 불안과 욕망 사이에서 드러나는 흔들림이 완벽하게 체화된 듯하기 때문이다. 그에겐 어떤 도망자의 몸짓과 표정이 있다. 이 세계의 것에서 벗어나고야 만.

더불어 사랑 앞에 그저 한없이 약해지는 열여덟의 순정에 나는 펑펑펑 울음보를 터트리고야 말았다. 가족과 꿈·사랑 사이에서 안간힘을 쓰는 대니는 리버가 아닌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물론, 영화는 극적인 임팩트도 준비해 놓는다. 도망자의 굴레와 운명 속에서 가족의 선택은, 심장을 겨냥하고 눈물샘에 꽂힌다.

어머니 애니와 아버지 아서의 결정이 어떤 미래를 낳을지 뻔히 보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일도 있다. 그 선택 전에 차곡차곡 쌓아둔 그들의 관계와 사랑, 굴곡을 우리는 알기에 '팡' 터질 수밖에 없다. 하긴, 더 잃을 것도 없다, 그들은.

본투비 (전통적) 혁명가였던 아서가 대니에게 길을 열어주며, "네 자전거를 타라. 넌 이제 너의 길을 가는 거야. 변화는 네 몫"이라며 떠나는 장면에선 온전하게 폭발한다. 아서는 대니의 미래를 가족에게 옭아매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과거와 '다른' 혁명적 모색을 하라는 68세대의 전언처럼 느껴진다. 혁명의 단절이 아닌 시대에 맞는 혁명의 변신.

대니는 아마 줄리어드에 입학했을 것이며, FBI의 짜증나는 밀착 감시를 받았을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해리는 가뭄에 콩나듯 스쳐 지나듯 만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의 음악적 재능이 진보했으리라 장담은 못하겠다. 그럼에도, 나는 대니의 미래에 모든 것을 베팅할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대니를 자신의 것처럼 엮은 리버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리버 때문에, <허공에의 질주> 때문에, 끝난 뒤 나는 눈물범벅이었다. 곳곳에서 들린 눈물 범벅 소리에 나도 일조를 하고야 말았다. 시월의 마지막 날은 접혔고, 미치도록 알흠다운 남자를 생각했던 하루도 지났다.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었던 소박한 의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 영화, 어떤 영화평론가든 관객이든, 1993년 이후 제대로 된 칼날 비평을 하긴 글렀다. 아무렴. 리피 피닉스 때문이지. 안녕, 내 청춘의 한 자락. (정)은임 누나도, 안녕. 구름의 저편에서 리버를 만나 얼마나 좋아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