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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그 사람 인 시네마

늙은 사자를 갱생하게 만든 절대 뮤즈의 힘!

by 낭만_커피 2010. 3. 28.

늙은 사자의 갱생기. 딱 이 한마디로 정리가 가능한 영화 <크레이지 하트>를 세간에 주목받게 한 것은, 늙은 사자를 연기한 제프 프리지스 덕분이다. 연기와 배우가 따로 분리되지 않는, 온전히 배우 그 자체의 영화. 누군가의 말마따나, ‘일생에 한번 있을 영화와 만난 경우’다. 세간의 관심을 외면하지 않은 아카데미는, 그에게 첫 오스카(남우주연상)를 안겨줬다. 아카데미나 대중 모두에게 행복한 선택이었다. 불만은 없다. 아마 영화를 본다면 당신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한쪽으로 치우친 관심 때문에 상대적으로 외면당한 이름을 꺼낸다. 진 크래드독. 그러니까, 이를 연기한 매기 질렌홀. 위험을 무릅쓰고 감히 말하건대, 매기가 아니었다면, 제프를 향한 세간의 관심도 없었다. 밤하늘의 별이 혼자 빛나는 법, 없다. 이 뮤즈, 완벽하다.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뮤즈는 생각할 수가 없다.


<크레이지 하트>의 늙은 사자, 배드 플레이크(제프 브리지스). 한때 잘 나갔던 컨트리 뮤지션이었다. 나오는 족족 히트를 쳤고, 후배 뮤지션들은 그의 곡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꽤나 많은 여성 그루피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 사자도 늙기 마련이다 보니, 이빨은 거의 썩어 문드러졌고, 갈기는 숭숭 빠졌다. 축 처진 뱃살, 덥수룩한 수염, 공연이라 봐야 시골 선술집이나 볼링장 콘서트. 취미래야, 싸구려 모텔에서 포르노 틀어놓고 술을 입에 달고 있는 것. 서커스 장에서 단물 쓴물 쪽쪽 빨아 먹힌, 묘기 사자와 다를 바 없다.



이런 늙은 사자가 죽기보단 재기하는 것, 사실 익숙하다. 누군가에겐 진부할지도 모르겠다. 스크린에서도 많았을 뿐 아니라, TV를 켜거나 책을 봐도, 이런 이야기 흔하다. 황혼기에 새로운 기회가 오고, 생기를 되찾는 이야기구조 자체가 지닌 한계도 있다. 뻔하다는 관습적인 구조를 피하기 어렵다. 지난해 우리가 본 <레슬러>는, 확실히 셌다. 미키 루크라는 스토리텔링이 워낙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자면 <크레이지 하트>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하지만, 그런 빈틈을 메운 것이 배드의 뮤즈, 진. 영화를 이끌어간 것이 배드라면, 이를 지탱한 것은 진이다. 


진은 그렇다. 뮤즈다. 늙은 사자가 더 이상 나락에 떨어지지 않고, 삶을 회생시키는 동력이다. 아니 모든 것이다. 내가 스크린을 통해 본 것도, 여느 평범한 남자의 로망이자 판타지라는 한계, 인정한다. 늙은 사자를 취재하러 온 신참내기 기자. 싱글맘. 배드는 아마도 자신이 진에게 빠지리라는 생각, 그로인해 삶(의 태도)이 바뀔 거라는 상상, 추호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잠시 거친 간이역에서 하룻밤을 나눌 상대로 생각하고 추파를 던졌을 것이다.


별 일 아닌 것에서, 사소한 것에서 삶은 균열이 일어나고, 모든 것이 변한다. 재미있다. 삶의 병적인 유머센스가 발현되는 순간. 어느 순간, 진에게 빠진 배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음악이다. 늙은 사자에게도 있던 당연히 있었던 발톱과 이빨. 진은, 사자에게 발톱과 이빨이 있음을 깨우는 조련사다. 그렇다고 채찍을 든 것도 아니요, 먹이로 유혹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부드럽고, 조용하며, 복잡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배드의 삶에도 그렇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 스펀지에 물 스며들듯, 그녀는 쑥 들어찬다.


알겠지만, 그건 의식적으로 상대를 대하거나 의도를 갖고 접근할 때 가능한 게 아니다. 흔해 빠진, 식상한 말이지만, 그건 ‘진심’이다. 그녀는 섹시한 몸매와 자태를 지닌, 혹은 초절정 아름다움을 지닌 미녀, 아니다. 한 순간에 사람을 뒤흔들어놓을 그런 여자도,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묘하게 사람을 당기는 매력을 지닌 여자랄까. 흰 티셔츠와 청바지만으로도 충분히 섹시함을 드러내는 사람.



배드가 다른 뮤즈를 만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가 어떻게든 갱생하게 됐을 거라고 생각이 들진 않는다. 이야기를 진즉에 그렇게 꾸민 것 아니었냐고? 아니, 그건 온전히 매기 질렌홀이 연기한 진이었기 때문에 설득력을 획득한 거다. 앞서 언급했듯, <크레이지 하트>는 매기의 진이 있었기에 지탱가능한 이야기다. 두 사람의 교감은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충분히 알 수 있을 거다. 사랑을 하면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세상에 사람은 많지만,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그 누군가는 흔치 않다. 진이었기에 배드의 삶도 변할 수 있었고, 자신의 안에 있는 음악을 끄집어낼 수 있었던 거다. 진이라고 다른가. 그 망가진 늙은 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 위험하고 앞이 보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안다. 진짜 나를 위하는 것, 당장 내 행복을 위해 해야 하는 것. 나쁘고 위험하다는 전제가 아니라, 그것 따위 상관없이 내 마음이 향하는 것.


그녀는 약하면서도, 강하다. 무엇보다 사랑스럽다. 두 사람 모두 결함투성이이기에 가능한 결합. 배드는 아마 나쁜 남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진은 왜 빠졌냐고. 그건 진의 마음만 알 수 있는 거다. 나쁜 남자, 나쁜 여자라고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늘 완벽한 사람을 만나는 것, 아니잖나. 우리는 늘 부족한 무언가를 채워주고, 채워지기를 바라면서 살고 있다.


진이 이 영화의 주춧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뭣보다 배드가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진짜 사랑은, 자신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거다. 육체에 빠져도 좋고, 마음 씀씀이에 혹해도 좋다. 그럼에도 나는, 조금이라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나를 만나게 해주는 그런 사랑에 혹한다. 진이 배드에겐, 그런 사람이다. 그건 의도한 것도 아니요, 바꾸길 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러운 마음과 몸의 흐름이 세계를 바꿔놓은 것이다.


사랑에 빠진 진이 배드에게 했던 이 말, 아직 생생하다. 다친 몸으로 진의 침대에서 음악을 만드는 배드에게 건넨. “당신이 내 침대에서 그 노래를 부르고 있잖아! 당신은 떠날 테지만 난 침대에 누울 때마다 그 노래가 생각날 거라고!” 마음이 짠... 사랑하는 당신과 나눈 사소한 시간, 그것이 10초, 1분에 지나지 않을 거라도, 마음은 그냥 저장하고 마는 걸. 내 기억은 그렇게 당신을 담아버리고 마는 걸.


어떤 자극적이고 화려한 아름다움보다 더 마음을 움직인 여자, 진을 연기한 매기 질렌홀은 제프 브리지스에 비해 저평가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온전하게 이 영화를 함께 지탱한 양대 축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크레이지 하트>에 대한 찬사를 한다면, 마땅히 그녀에게도 가야하고, 그것만이 찬사가 온전해질 수 있다. 티셔츠와 청바지, 스니커즈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섹시하고 멋진 여자, 진. 이 영화, 늙은 사자의 갱생기도 맞지만, 뮤즈의 힘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겠다.



매기는 이 한편으로 내가 모셔놓은 배우 만신전에 올라섰다. 비록, 올해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만 오르고 수상은 놓쳤지만, 뭐 어때. 수상자만 기억하는 ‘더러운’ 오스카보다 나의 만신전에 올라 영원히 내게서 남아 있는 것도 나름 괜찮을 듯. 그녀는 이제 나의 여신, 아니 뮤즈. 이 여자, 정말 사랑스러워 미치겠다!!! 


참, 만신전에는 누가 있냐고? 천천히 말해주마. 기다려주시라. 싫음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