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들의 시대, 길을 묻는다
[리뷰] <여행자>
[리뷰] <여행자>
알다시피, 지금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면서 갈 곳을 묻는 이들에게, 국가가 폭력으로 대답하는 시대다. 용산(참사)뿐 아니다.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의무였던 '국가'는 없다. 이 세계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아니, 힘 없고 약한 자를 보듬고 비를 맞지 않도록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국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알았던 것이 국가였는데, 국가는 스스로 의무를 내동댕이치고, '너희들을 이제 지키지 않겠어'라고 선전포고를 했다. 19세기의 천재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데뷔작이었던 「고아들의 새해 선물」이 떠오른 이유다. 랭보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침상 주위에 헝클어진 것들은 흡사 상복 같은데,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의 북풍은 문간에서 탄식하고,
방안에 음산한 바람을 가득히 불어넣는다.
한 차례 휘둘러보기만 하여도 무엇이 부족한가를 누구나 알 수 있다.
이곳에 있는 두 어린아이에게는 어머니가 없는 것이다.
사랑 가득한 미소로,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어린아이들을 지켜보는 어머니가 없는 것이다.
(...) 어린이들 몸 위에 모피나 이불을 자상하게 덮어주는 일도 잊었단 말인가.
“미안하다!”라고 한마디 말한 다음, 떠나기 전에,
새벽녘의 추위로 어린아이들이 감기 들지 않도록
문을 꼭꼭 닫아주어 찬바람을 막아주는 일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진희는, 고아가 아니다. 아버지의 존재를 우리는 목격했으니까. 그러나 진희는, 고아다. 아버지는 그를 버렸고, 그는 고아원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아무리 고아가 아니라고 항변해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진희는 명백하게 지금의 우리를 은유하고 있지 않은가.
많은 우리들은 지금, 고아다. 국가가 있으나, 그 국가는 우리를 버렸다. 국가는, 최소한 엄한 비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우산인줄 알았다. 그러나 MB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국가권력의 비열함과 엄혹함은, 우리에게 우산을 씌워주기는커녕 더 세찬 비를 뿌리고 있다. 19세기 열다섯 천재시인의 눈에 비친, 어머니 없는 고아들의 시절을 21세기에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한다. 진희의 항변이 더욱 세차게 나를 때린 이유였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니까. 이게 대체 말이 되냐고.
진희가 그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여행자>는, 현실의 알레고리로 작동했다. 어쩔 수 없다. 진희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아버지를 기다린다. 새 옷도 사주고, 여행을 떠나자고 했던 아버지였으니까. 고아원은 그저 아버지가 잠깐 다른 볼 일을 보기 위해 진희를 맡긴 곳이었을 거다. 고아원 원장이나 아이들이, 너는 고아야, 라고 말해도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다른 아이들과 난 달라. 아버지가 다시 데리러 올 테니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희의 방황(!)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우리는 아직, 우리를 지켜주는 국가의 존재를 믿고 싶으니까. 진희는 고아원에 차츰 적응한다. 절친도 생기고, 나름 고아원 생활에 익숙해져간다. 진희는 그런 아이다. 다리가 부러진 새를 살리고자 애를 쓰는. 그런 한편으로, 그는 아직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돌아오고, 새는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거라는.
하지만, 고아원의 절친이 하나둘 떠나고, 아버지는 감감무소식이다. 새는 결국 죽었다. 선의와는 무관하게 진희는 새를 죽인 셈이다. 이렇게 기댈 곳 없는 아이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할까. 불안과 공포. 그것이 진희의 마음에 똬리를 깊게 틀었던 걸까. 외국인들이 고아원 아이들을 위해 사온 인형을 뚝뚝 부러뜨린다. 절친이었던 숙희(박도연)가 입양되자, 진희는 방망이로 이불을 두드리며 슬픔을 달랜다. 같이 외국으로 가자고 했던 숙희였다. 같은 고아로 마음을 나눴던 숙희였다.
진희는 다시 혼자가 됐다. 땅에 흙을 판다. 무슨 짓을 하는 걸까 했다. 아니, 무덤을 파고 있는 게 아닌가. 흙을 파서 그 속으로 들어가 눕고야마는 진희. 뭐랄까. 절망의 끝? 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절망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스스로 무덤을 파고 그 속으로 침잠하고픈 아이의 행동이 가슴에 밟힌다. 꾹꾹.
우산이 없으면 내리는 비를 맞을 수밖에 없다. 진희는 결국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 자포자기 혹은 체념. 입양에 관심 없이 뚱하기만 하던 진희였지만, 여느 다른 아이들처럼 이젠 입양을 받아들인다. 친구들이 불러주는 작별을 들으며 뚱한 표정으로 떠나는 진희가 그것을 알려준다. 기다림 끝에 다른 길을 찾았다.
그 작은 아이, 혼자 떠난다.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간다. 혼자 비행기에 올라, 타국에 도착한다. 아버지에 대한 기다림, 아버지가 약속을 지킬 거라는 믿음 때문에 현실을 거부하고 도피도 했지만, 결국 아이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진희가 프랑스에 내려섰을 때의 표정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이 어려운 감정을 보여준다. 현실을 묵묵하게 받아들인 그 깊은 눈망울. 어떤 표정도 담지 않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아이의 눈물. 잊지 못할 그 라스트신.
애잔하고 아프다. 우리도 결국 이 현실을, 이 엄혹한 세계를 받아들여야 하는구나. 부모로부터, 국가로부터, 아이들이 그렇게 우리 곁을, 여행을 떠났겠구나 하는 미안함과 죄스러움도 그렇지만, 어버이 없이 현실을 묵묵히 감내해야 하는 우리도 결국 고아구나, 하는 현실인식 때문에.
<여행자>는 그렇게 가슴으로 더욱 울게 만든 영화였다. 랭보는 「고아들의 새해선물」에서 “어머니의 꿈, 그것보다 더 따뜻한 침구도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건 아마 지금의 우리에게도 명백하게 적용되는 문구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남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거짓이나 만행을 저지르거나,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내 이에 도취해야 하는 뮌히하우젠 심드롬(Munchausen Sydrome)에라도 빠져 있어야 하나.
공항에 도착한 진희의 미래가 어떻게 열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궁금하다. 그 상처 입은 마음은 또 어떻게 치유하고 있는지. 어쨌거나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고, 진희 역시 살아있어야 한다. 그것이 부모이길 포기한, 국가이길 포기한 이들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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