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종드 쭌/기억의 저편

샤넬, 스타일 혹은 혁명의 또 다른 이름

by 낭만_커피 2010. 1. 10.
'샤넬'.

한때는 사치의 대명사로 치부했었다.
그것은 오산. '샤넬'이라는 이름 안에 얼마나 풍성한 이야기가 있는지 알기 전의 오해.
명품이라고 일컫기 이전의 샤넬은 그야말로 어떤 혁명. 특히나 여성들에겐 해방의 이름.

샤넬은, 곧 코코 샤넬.
진부하고 식상한 이야기 한 토막.
세기의 섹스심벌, 마릴린 먼로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밤에 뭘 입고 주무삼?" (그따위가 궁금하더냐, 이 기자놈아!)
마릴린 먼로의 우문현답. "샤넬 No.5다, 이놈아." (먼로에 대해서라면 다음 기회에~)

그렇다. 샤넬은 본능이었다.
전세계 여성이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핸드백이,
샤넬 '2.55 퀄팅백'이라지?
1955년, 코코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선보인,
퀼팅(누빔)처리한 가죽백에 금색 체인을 달아,
어깨에 멜 수 있도록 만든 이 제품.
하나의 2.55를 위해 180여개 공정을 거쳐 장인 6명이,
일주일 이상 정성을 들인다는 이 제품.

(여성의) 손을 해방시킨 것은 물론, 샤넬을 갖는 것을 로망으로 삼게끔 했다.
당시, 오죽하면 이런 말도 있었단다.
"샤넬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여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여자가 아니다." 허허.

스타일, 샤넬의 모든 것.
카디건 슈트, 샤넬 슈트, 샤넬 No.5...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터.
하나로 정리하자. 샤넬 스타일(Chanel style). 독창적인 시그니쳐 룩.
가식 따윈 아듀~ 쓸모없는 복장에 대한 저항.

장 콕토는 말했다.
"매력적이면서 호감을 주고, 인간적인가 하면 잔인하며, 때론 너무 지나쳐 보이기도 하는 여자. 분노, 변덕스러움, 친절함, 유머, 반짝이는 생각, 검소함, 그리고 관대함이 샤넬이라는 다시 없을 독특한 여자의 모든 것이다."
장 콕토도 샤넬, 무척 좋아했었나보다. 행간마다 꼼꼼한 애정이 넘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어떻게 표현할까.


물론 과장도 있었겠다.
코코는 스스로 "마음이 고약하고 화를 잘 내며 도둑에다 거짓말쟁이, 엿듣기의 명수"라 말했다.
의상 제작에 있어 여성 해방을 적극적으로 내비친 적도 없단다.
그저 샤넬 스타일이, 여성 해방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지점이 나타난 게고, 
사후 누군가가 과장했을지도.
코코는 또 사랑에 빠져, 독일 나치의 스파이 노릇도 했다.

왜 샤넬 이야길 꺼냈냐고?
1971년 1월10일, 39년 전, 코코 샤넬이 파란만장한 영욕의 세월을 꺾었다.
미터기도 아닌데, 왜 꺾냐고. 내릴 때가 됐으니, 꺾는 게지.
어쨌든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샤넬은 (여성) 몸의 혁명을 만든 장본인이다.

샤넬, 알고 입으면 당신은 더욱 멋진 사람.
내게 샤넬은 더 이상 사치의 대명사, 아니다.
샤넬의 옷이건 액세서리건 향수건, 당신의 스타일을 위해서라면 향유해야지.
그러면서 샤넬의 것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코코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나는 당신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겠소이다. 하하.
샤넬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샤넬이 된다면, 더더욱 얼쑤~~~

P.S. 샤넬은 여전히 개인기업 형태로 운영된단다.
말인즉슨, 주주나 투자자에게 공개한 주식회사가 아니며 경영실적을 공개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인 사업의 확대나 이윤의 추구만이 샤넬이라는 기업의 모토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란다. 믿거나 말거나, 당신의 몫.

영화 <코코 샤넬>은 보고 싶었는데, 아직 못 봤다. 어떻든가?
오드리 토투의 샤넬. 정말 구미 당기는 조합이긴 하다.

==============


문화․예술 혁명을 기대한다, 당신도 샤넬처럼

20세기 여성을 해방시킨 패션혁명가에서 엿보는 우리 시대


“20세기 여성 해방에 가장 기여한 사람이 샤넬이다. 코르셋을 벗을 수 있게 만든 사람이 아니냐. 물론 코르셋 없는 속옷을 만든 이는 따로 있지만, 상품으로 팔릴 수 있도록 예쁘게 만든 사람이 샤넬이다. 핸드백에 끈을 달아, 한 손을 풀어준 사람도 샤넬이고. 샤넬은 화도 잘 내고 말도 막 한 사람인데, 살면서 가장 분노했던 사람 중의 하나가 크리스티앙 디오르다. 디오르는 H라인, A라인 등을 만들었는데, 남성의 눈으로 남성이 보기에 괜찮은 옷을 만든 사람이다. 샤넬은 디오르를 향해 반동이라는 말을 썼다. 20대들은 샤넬을 소비하고 싶은 사람이 아닌, 샤넬이 되면 된다. 샤넬은 돈도 잘 벌고 재밌게 살았다. (웃음)”


- 우석훈 (≪88만원 세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의 저자)의 강연 중-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는, 늘 달라야 한다”


지난 1971년, 39년 전 1월10일. 한 시대가 저물었다. 코코 샤넬. 본명은,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 별칭이 코코(Coco). 패션 브랜드이자 아이콘으로서 주로 회자되던 그 이름. 산책을 한 뒤 자신의 침대로 향했던 그녀가 갑자기 소리쳤고 가정부가 달려왔다. “이것 봐, 이렇게 죽는 거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의 죽음 치고는 황망했나. 아니, 그렇지만도 않다. 어쩐지 죽음을 예감한 뉘앙스 아닌가. 향년 87세. 1월의 찬바람을 살짝 만끽한 뒤, 육신을 접은 것은 영원한 스타일리스트이자 혁명가의 센스일지도.



샤넬의 이름 앞에 혁명가라는 레떼르가 낯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떠올려보자. 여성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킨 것, 그것은 몸의 혁명이 아녔을까. 샤넬 이전, 복잡하고 불편한 옷을 감내하고 살아야했던 여성들이었다. 샤넬은 ‘왜 여성만’이라고 반문했다. 손을 움직였다. 우아하면서도 격식을 차리지 않는 의상디자인이 그녀의 손끝에서 나왔다.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성이 많은 옷에서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여성미가 넘치는 스타일이 나왔다.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저지드레스, 슈트, 나팔바지, 단발머리, 트렌치코트, 터틀넥스웨터, 리틀블랙드레스 등. 이른바 샤넬 스타일의 시작이었다. 유행은 흐르고 바뀌어도, 변함없이 애용되는 바로 그것, 샤넬 스타일.


또 들어볼까. 핸드백으로부터 손을 자유롭게 한 것, 무릎 근처로 올라간 치마로 땅에 닿는 긴 치마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 것도 샤넬의 공이었다. 여성용바지 또한. 무엇보다 철 지난 것이 아닌 불멸의 것으로 스타일을 창조한 사람. 기존의 것과 달라야하는 것. 그것은 혁명의 다른 이름. “패션은 복장에만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패션은 하늘에도 거리에도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이자 늘 새롭게 일어나는 그 무엇이다.” 잊거나 모르고 있지만, 여성을 옷뿐만 아니라, 시대의 속박으로부터 자물쇠를 연 사람, 샤넬이다. 당신에게 지금 샤넬 제품이 없을지 몰라도, 둘러보라, 샤넬 스타일은 있다.


“일할 시간과 사랑할 시간 외에 또 다른 시간이 필요한가”



샤넬은 사랑하며 살았고, 후회 없이 일했던 사람이었다. 한편으로 세간의 입방아로 비유하자면, 스캔들 메이커였다. 어린 시절의 불행을 보상받으려는 듯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했다. 1895년, 그녀 나이 12살.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아버지는 샤넬을 포함한 세 자매를 고아원으로 보냈다. 아버지가 버젓이 있는데도 고아가 돼야 했던 소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18세, 낮에는 보조양재사로, 밤에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 코코란 별칭도 이때 얻었다. 본인은 이를 내켜하지 않았지만.


커리어의 시작은, 젊은 장교 발잔과 연인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그녀는 남성용 승마복과 스웨터 등을 여성용으로 개량하는 솜씨를 발휘했다. 1910년, 발잔의 친구이자 영국 폴로 선수인 아서 카펠과 사랑에 빠진 그녀는 카펠의 도움으로 파리에 여성용 모자 가게를 열고 곧 스웨터, 스커트, 액세서리 등도 취급했다.


하지만 카펠의 죽음은 샤넬에게 지울 수없는 상처를 남겼다. 영국 귀족의 딸과 결혼한 그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뜨자, 샤넬은 “모든 것을 잃었다”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녀가 남긴 이 말은 카펠의 죽음이 남긴 상흔이 아녔을까. “나는 사랑을 원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성과 사랑하는 의상 가운데 선택해야 했다. 나는 의상을 택했다. 내 인생에서 남성들이 없었다면 나의 ‘샤넬’이 가능했을지 가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도빌룩, 리블블랙드레스 등을 통해 패션의 전설을 기워나갔다. 남성의 눈이 아닌, 여성의 편리에 초점을 맞춘 샤넬 정장도 만들었다. 샤넬은 옷으로부터 만들어지는 혁명을 진두지휘한 혁명가였다. 1921년 5월5일 선보인 ‘샤넬 넘버5’는 당시 연인이자 샤넬이 결혼을 꿈꿨던 러시아의 귀족 드미트리 파블로비치의 소개로 만난 향수전문가 에르네스트 보에게 제작을 의뢰해 선보인 제품이다.


샤넬은 일과 함께 사랑도 멈추지 않았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 폴 이리브 등과 사랑에 빠졌던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첩보원으로 활동한 사건도 있었다. 물론, 이는 그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었다. 13살 연하의 독일군 장교 한스 귄터 폰 딩클라게(슈파츠)에게 빠져 ‘모자 견본’이라는 작전(암호)명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독일에 협력한 배신자로 구금됐다가 처칠의 영향력으로 풀려났으나, 슈파츠와 함께 스위스의 호텔을 전전하면서 모르핀을 주사했던 시기를 거쳤다.


“패션은 건축, 그것은 균형과 비율의 문제”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여정이었다. 1939년 사업상 부티크를 닫아야했던 샤넬이 패션계에 복귀한 것은 1954년, 71세 때였다.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뉴룩’으로 패션계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 앞서 말했듯, 샤넬에게 그는 가장 분노한 대상이었다. 기껏 여성들이 주체가 되는 옷을 만들어놨더니, 남자의 시각에서 여성을 재단한 옷으로 흐름을 바꿔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도 그녀는 트위드 슈트, 앞부분이 까만 구두, 금색 체인의 누빈 가방 등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샤넬 스타일을 창조했다.



샤넬은 그렇게 자기 주체적으로 모든 것을 만들고 자존감을 세운 혁명가였다. “나는 자신이 사용하는 향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여성들이 불쌍하다. 향은 그 자체가 말해야 한다. 향은 은밀하게 속삭인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녀는 늘 달라야한다는 혁명적 주체였기에, 문화예술계에 대한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염문설도 끊이질 않았고. 그녀는 피카소 등 예술가와의 우정을 위해 최초의 남자 향수 ‘뿌르무슈(Pour Monsieur)’를 만들기도 했으며, 달리, 장 콕토, 스트라빈스키, 헤밍웨이, 콜레트, 그레타 가르보, 마를리네 디트리히 등 수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창작활동을 도왔다.


대문호 앙드레 말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세기(20세기) 프랑스에는 세 이름만 남을 것이다. 샤넬, 드골, 피카소.” 폴 모랑도 그녀를 향해, “19세기의 막을 내린 천사”라고 일컬었다. 그 말은 과장이 아니다. 패션을 건축과 비유하면서 균형과 비율을 강조했던 샤넬은, 종합예술가였다. 스타일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세계이길 바랐던.


그는 늘 시대를 읽고자 애를 썼으며, 시대에 함몰되지 않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남들만큼, 남들 보기에’라며,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를 대세처럼 늘어놓고, 획일화될 것을 강요하는 이 몰개성의 시대. 샤넬을 사는 것보다 샤넬이 되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가장 현실적인 혁명을 향한 디딤돌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당신을, 기대한다. 


  [뷰즈 2010 1·2월호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