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현재 서식지 근처의 다리, 한남대교.
경찰과 119, 수상안전요원들을 비롯해 시민들이 북적거린다.
뭥미?
빠꼼 고갤 내밀어 경찰에게 물었다. "무슨 일?"
심드렁하게 답한다. "사람이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아, 갑자기 아득해진다.
다리 한 번 쳐다보고, 물 한 번 쳐다본다.
저 거리. 물리적으로 잰다면, 글쎄 한 30미터? 50미터? 잘 모르겠다.
고개를 한 번 들었다 놓았다 하면 충분한 그 거리.
그 거리가 누군가에겐 세계를 들었다놨다할 거리가 된 셈일까.
누가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 모른다.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어떤 뉴스도 정보도 없다.
어제 처음 물어본 뒤, 한참 지나 다시 물어봤지만, 경찰은 찾지 못했다고 했다.
정확힌 모르겠지만,
아마 찾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지금 고인이 됐을 것이다.
어제 새삼 경험한 이물감은,
같은 공간에서 한 세계가 그렇게 무너져버렸건만,
다른 세계는 그 세계의 무너짐에 무심한 듯 웃고 떠들고 달리고 걷고.
카페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풍경.
지척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노래가 흐르고, 사람들의 왁자찌껄함은 여전.
물론,
다른 세계도 아주 조금씩 균열을, 그 슬픔 혹은 아픔을 어떤 식으로든 감내하리라.
한 세계의 무너짐과 아주 무관한 세계를 살고 있는 건 아니니까.
뭣보다,
누군지 모르겠으나, 그 세계의 무너짐으로 당면한 슬픔을 감내해야 할 남아 있는 사람(들)이 밟힌다.
그 거리를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은 저승과 이승의 거리.
그 물은, 입 속의 검은 잎이었던 걸까.
3월7일 새벽, 21년 전.
기형도는 뇌졸중으로 세계에 작별을 고했다.
그만의 절박한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꽃샘추위가 봄 기운에 취하는 것을 막기 때문일까.
어떤 한 세계의 무너짐이 기형도를 깨웠기 때문일까.
기형도는 더 버티고 견뎠어야 옳다. 예술은 그래야 한다.
요절은 일종의 최면이다. 그것이 환기하는 심리나 정서는 강력하다.
죽음에서 기형도를 파생하는 건, 너무 익숙한 클리셰지만,
기형도의 시 곳곳에 박힌 죽음은 어쩌면 버티고 견디기 위한 몸부림이 아녔을까.
궁금하다.
검은 잎 속으로 뛰어들어야했던 몸부림은 얼마나 치열했을까.
우리는 어떤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일까.
고인의 명복을 빈다.
☞ 기형도는 봄이다...
☞ 3월7일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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