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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무비일락(舞馡劮樂)] 전혀 상관없을 법한 세계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스턴 프라미스>

by 낭만_커피 2008. 12. 15.

[무비일락(舞馡劮樂)]

전혀 상관없을 법한 세계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스턴 프라미스>



소설가 김훈 왈. “인간 마음의 심층에는 기본적으로 악과 폭력이 깔려있다. 나는 악과 폭력의 편은 아니지만 인간은 그런 것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는 세계의 근원을 악과 폭력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는 악과 폭력과 싸우면서 아름다움을 건져 올리는 것이 생이라고 본다. 악과 폭력 안에서 삶의 희망을 얻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 어떤가. 당신은 동의하는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에 동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가장 최근에 내놓은 <이스턴 프라미스>. 전작 <폭력의 역사>가 보여준 날 것의 세계를 기억한다면, 이번 영화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 폭력에 대한, 그리고 폭력을 매개로 구성된 세계의 연결고리. 그것은 세계를 사유하게 만드는 힘과도 연결된다. 어쩔 수 없이 폭력의 인과율에 사로잡힌 인물을 묘사한 것이 <폭력의 역사>였다면, 이번에는 전혀 인과관계나 조응되지 않을 것 같은 세계가 폭력을 통해 어떻게 연결됐는지를 보여준다. 크로넨버그는, 폭력을 잘 묘사해서가 아니라, 폭력이 어떻게 세계에 작동하는지를 탐구하는 폭력의 미학가 같다. 


‘21세기의 <대부>’라는 타이틀도 그리 과장돼 보이지 않는 <이스턴 프라미스>는 시작부터 ‘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놀라지 마시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각난 파편일 뿐. 그것에 눈을 돌린다면 당신은 정면으로 돌파해야 할 현실을 외면하는 것밖에 안 된다. 때는 지금과 비슷한 크리스마스를 앞둔 무렵. 장소는 런던이다. 범죄조직에 유린당하다 출산 과정에서 죽은 소녀 타티아나의 일기장에서 이야기는 외연을 넓힌다. 일기장을 넣은 조산원 안나(나오미 왓츠)가 갱단의 조직원 니콜라이(비고 모르텐슨)을 만나게 되고, 일기장을 둘러싼 폭력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파편이 튀기 시작한다. 이문화 간의 충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계의 만남, 음험한 음모 뒤의 진실. 영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묘하게 수렴되는 지점을 관통한다.


밤에 힘을 발하는 물리적 폭력과 음모는 아침이면 깨끗하게 정리돼 아주 다른 모습으로 치장하듯, 영화는 전혀 다른 세계의 간극을 보여주면서도 그것이 단절된 세계가 아님을 확인시켜준다. 하긴 한 세계에서도 두 얼굴은 가능하다. 갱단의 두목은 온화한 듯 점잖은 태도를 보이지만, 실상 그는 잔혹하고 흉포하다. 니콜라이도 마찬가지다. 다른 목적이 있긴 하지만, 조직의 수하로 명령을 수행하면서도 그는 안나를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쓴다. 무엇보다 평범하고 안온했던 안나(와 그 가족)의 세계도 온전하게 둥지 안에서만 머물 수는 없다. 전혀 예기치 않게 맞닥뜨린 갱단의 세계와 만나면서 그들은 서로 삼투압한다. 그 현실을 직시한 안나의 삼촌 스테판이 타티아나를 가리켜 하는 말, “이 애도 평범한 사람이었어.” 그건 안나의 어머니가 삼촌에게 한 말의 답변이었다. “스테판 이건 우리 세계가 아니에요.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잖아요.”


사실 우리는 영화보다 더 폭력적인 ‘지금-여기’를 관통하고 있다.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흉포한. 그러면서도 우리는 남의 일이라고 이것을 관망하거나 애써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 하수상한 시절에 ‘동쪽의 약속’(<이스턴 프라미스>이 걸린 것은 비범한 계시? 물론, 아니면 말고. 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이름이 생소하다고? 미안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당장 전작들을 챙겨보지 않아도 이 영화는 봐둘만 하다. 



시네마유람객 ‘토토의 천국’(procope.org)

영화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무비일락’은 그래서, 나온 얘기다. 그리고 영원히 영화와 놀고 싶은 소박한 꿈도 갖고 있다. “음식은 1분 만에, 음악은 3분 만에, 영화는 2시간 만에 새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다”는 말도 믿고 있다. 영화를 통해 사유하는 세계를 좋아한다. 그래서 내겐, 가슴 뛰는 영화를 만난다는 건, 생의 숨 막히는 순간을 만나다는 것 혹은 생을 감식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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