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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사랑, 글쎄 뭐랄까‥

‘로맨스 그레이’는 살아 있다

by 낭만_커피 2008. 11. 27.

‘로맨스 그레이’는 살아 있다

‘황혼의 사랑’ 다룬 어떤 작품들을 보고 든 단상


“파란 대문의 우리 집 / 넓은 마당엔 널 닮은 유채꽃 / 니가 좋아하는 상추, 고추, 강아지도 몇 마리 기르고~ / 아침 햇살이 밝으면 / 새벽등산은 언제나 그대와 / 밤엔 도란도란 둘의 얘기 / 너의 손을 꼭 쥐고 자는 꿈.”


그리고 거듭 강조한다. 진심이라고. 이제는 돌아오라고. 내 꿈을 받아달라고. 사십년 동안 품어왔다는 그 꿈. 어떤 황혼녘, 사랑을 원하는 한 남자의 노래다. 갈구다. 욕망이다. 고백이다. 한 여인 앞에서 그는 여느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광경이 익숙하지 않다. 왜냐고. 고백하는 그와 고백 받는 그녀는, 눈에 익은 ‘젊은’ 이가 아니다. 그들은 이른바 ‘노인네’들이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등이 구부정하며, 어두침침한 눈과 잘 들리지 않는 귀를 가진,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존재감을 잃고 있는 이들.


묻고 싶었다. 그 익숙하지 않음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그들은 사랑하고 받을 자격도 없는 존재들인가. 그들의 욕망은 그저 늙은 자의 ‘노망’이고 ‘주책’인 걸까. 그 대세라는 ‘동안(童顔)’이라는 이름의 분별없는 열정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어리게 보임 혹은 젊게 보임’에 대한 과도한 찬사가 야기하는 늙음 혹은 나이듦에 대한 차별은,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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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뮤지컬이 가져온 단상이었다. 여관 혹은 모텔이라 부르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다섯 빛깔 사랑을 그린 뮤지컬,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이하 ‘사랑소묘’)>. 소노여남(小老女男)의 ‘사랑’을 버무린 이 뮤지컬은 1996년 연극으로 초연된 뒤 뮤지컬로 변신한 작품이다. 연극시절부터 <사랑소묘>는 캐릭터보다는 드라마의 힘이 강한 작품이었다. 뮤지컬로 변신하면서도 드라마의 힘을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무엇보다 보는 사람을 동감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연극 때 봤던 작품을 뮤지컬로 보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것은, 연극에서 힘을 발휘했던 언어가 뮤지컬에서의 음악으로 무난하게 변신하면서 조화를 이룬 덕분이다.


다시 돌아가자. 나는 어떤 노년의 사랑과 욕망을 다룬 작품들을 함께 떠올렸다. 그것은 절대 추하거나 주책스럽지 않았다. 여느 사랑이나 욕망과 다르지도 않았으며, 신성시해야 할 무엇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사랑’ 혹은 ‘욕망’의 한 단면이었다. 그 주체의 육체나 외모의 나이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랑이 아름답고, 욕망이 당연했을 뿐. 영화 <죽어도 좋아>가 떠올랐고, 영화 <어웨이 프롬 허>가 머리를 스쳤고, 만화이자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다가왔다.


<사랑에 관한 다섯개의 소묘> 중 '할아버지 할머니'

뮤지컬 <사랑소묘>의 마지막 에피소드, ‘할아버지 할머니’ 역시 노년의 사랑을 다룬다. 앞선 에피소드인 ‘love start’가 시대착오적인 젊은이들의 다소 억지스런 사랑 풍경을 그린데 반해 이 사랑은 깊고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추억 한자락 담은 첫 사랑 앞에서 주춤거리는 모습은, 사회의 모진 시선 때문임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노년 혹은 황혼의 존재를 사회는 감추고 싶기 때문일까. 으레 사랑은 노년 아닌 젊은 사람들의 몫으로 인식한다. 늙어서 하는 사랑은 ‘주책’이라고 치부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사랑과 욕망에 인색하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것이 못내 아쉽고 불만이었다. 수줍음 많던 시절의 첫사랑을 만나 노년의 로맨스를 꽃피우고 싶은 할아버지의 바람(물론 부인은 이미 사별한 상태다)과 고백이 왜 온전하게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는지, 그런 할아버지에게 분명 마음이 있음에도 할머니(역시나 남편과 사별한 상태)는 자식들의 온갖 눈치를 다 살펴야하는지. 그것이 어쩌면, 지금 우리의 자화상 아닌가. 늙으면 판단력도 떨어지고,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의지해야 살 수 있다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편견. ‘젊은’ 우리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노인’의 역할이나 틀에 가둬 그들을 사육하려 하는 건 아닐까. 이건 존재에 대한 예의를 잃고 있는 사회의 거친 풍경이다. 중요한 것은 노인을 돌보고, 노인에게 친절한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심신에 어떤 변화가 있고, 어떤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늙었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섣불리 규정하는 그 오류가 문제다.


나는 그 ‘로맨스 그레이’가 애틋하고 뭉클하면서도, 할머니의 주춤대는 마음이 못내 걸렸다. 옆집할머니가 죽기 전에 그 할머니의 남편이 꿈에 나와 함께 가자고 했다면서, 나는 누구 손을 잡고 가야 한다고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던 할머니의 에두른 고백도, 파란대문 너른 마당에 도란도란 함께 사는 꿈을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의 욕망도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장성한 자식들의 눈치를 살피고 주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주춤거림 속에서 그들(의 욕망)을 억압하는 사회의 단면을 봐야만 했다. 도대체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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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좋아>는 노인에게도 분명 성(性)생활이 있음을 보여줬다. 박치규 할아버지와 이순예 할머니를 통해 노년의 성은 부끄럽고 노망난 일도 아니며, 성은 젊음의 특권도 아니며, 노년의 성은 마땅히 누려야 할 인생에 있어 가장 즐거운 성 중의 하나임을 각인시켰다. <어웨이 프롬 허>는 치매에 걸린 노년의 아내와 그런 아내에 대한 기억과 사랑으로 그리움 가득 쌓아올린 남편의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삶의 다른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노년의 어떤 사랑이 보여주는 웅숭깊음을 품고 있었더랬다. 한동네에 살고 있는 여든을 바라보는 네 노인네의 사랑을 보여주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역시 이 사회가 간과했던 사랑의 한 풍경에도 눈을 돌릴 것을 권한다. 젊고 예쁜 것들만 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며, 노년 혹은 황혼의 사랑도 분명 축복하고 박수를 쳐야 할 일이라는 것도. 젊고 예쁜 것들도 나이를 먹고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 노인을 위한 사랑이 있는 것도, 현재의 젊고 예쁜 것들에게 하나의 희망이 되지 않겠는가. 


궁금하다. 과연 이 사회는 노인들의 욕망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을까. 노인 복지가 한낮 그들에게 안주하고 쉴 곳을 보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틀렸다. 노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 선의는 따지자면 위선이다. 나이는 숫자다, 나이가 뭐 중요한가, 라는 말. 노인들에게도 그 말은 적용된다. 느리고 더딜 지 몰라도, 그 욕망이, 그 사랑이, 젊디젊은 이들의 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르고, 왜 다른 시선을 적용해야 하는가 말이다.


“사랑이 어때서?” <사랑소묘>에서 할아버지는, 이렇게 버럭한다. TV에서 나오는 사랑이야기에 할머니가 궁시렁대자, 할아버지의 대꾸다. 모두가 하는 사랑, 우리라고 하면 안되냐, 는 투다. 맞다. 하나도 틀리지 않다. ‘동화(童話)’도 있건만, ‘노화(老話)’는 없다. ‘육아(育兒)’도 있는데, ‘시노(侍老)’에는 무관심하다. 노인에 대한 무지와 무례가 기가 찰 정도다. 더 많은 노인의 사랑과 욕망을 다룬 작품이 나와야 한다.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그 무엇이 될 때, 단지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로맨스 그레이에 감탄할 때, 그런 때가 와야 하지 않겠는가. 좀더 아름답고 품격 있는 노년은 누구나 바랄 터. 그것은 누구나 늙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로맨스는 끝나지 않는다. 황혼의 욕망도 존중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과장되게 얘기하자면, 생의 근원이다. 오래 살자.


아울러 파란대문집 너른 마당에서 상추․고추․유채꽃 기르며, 강아지도 키우고, 아침엔 새벽등산, 밤엔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손을 꼭 쥐고 꿈나라로 가고픈 할아버지의 사랑이 이뤄지길.


추신. 나도 늙어서도, 계속 사랑하련다. 사랑아, 우리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