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여명이 분한, <연의 왕후>의 '단난천'도 그랬답니다. 더구나 이 남자, 한없이 선량한데다, 연인의 속 깊은 마음까지 헤아립니다. 그뿐인 줄 아세요?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세상의 또 다른 모습을 가르쳐주고, 꿈꾸는 법도 알려줍니다. 연인에게 세상을 선사하는 남자. 이건 제가 가진 연애의 로망인데, 이 남자, 영화에서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합니다. 연인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무예와 부상과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예까지. 흑, 어쩌란 말입니까. 이런 남자, 세상에 없을 것 같은 남자. 아, 당할 수가 없어요. 혹시 이 얼굴의 반이라도 따라간다면, 이 까칠한 인생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짧은 망상까지. 허허.
(이 영화를 보려는 분에겐, 좋지 않을 수도 있는 스포일러가 있어요.^^; )
뭐 그정도라면, 생물학적 남자만 아닐 뿐, 테스테스토론 왕성한 여자마초 이야기 아니냐, 싶었죠. 그런데, 그즈음 슬쩍 등장한 사내. 바로 앞서 얘기한 그 남자, 여명이 분한 난천. 은둔촌부로 꾸리기 위한 어수룩한 머리 모양새에 얼굴에 억지 시골티를 내 처음엔 어색해 뵈던. 그래도 흠, 제가 좋아라~하는 연애의 묘사가 살짜쿵 끼어들겠군 여겼죠. 양념이겠지, 싶었답니다. 그런데, 어라. 이 남자, 자꾸 '날 봐요'라며 살살 양념을 뿌려댑니다. 비아의 치료를 명분으로 형성되는 러브러브라인. 어느샌가, 전쟁모드에서 방향을 틀어 러브모드로 전환한, 영화. 어어,하다가 그냥 빨려들어가더군요. 더구나, 애틋함을 부르는 사랑의 원형까지 들먹입니다. 선대에서 서로의 조직을 향해 칼을 휘둘러 피를 흘린 과거와 당최 가까워질 수 없는 신분차. 흑, 사랑은 그렇게 험한 장애를 직조해 놓을수록 열매가 달다죠.
'운명같은 사랑'. 어때요, 이런 말. 믿으세요? 사실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사랑 그 자체의 로망입니다. 운명 같다는 건, 달리 말해, (그전까지의) 삶 전체 혹은 개인의 세계를 뒤흔든다는 말과 동의어 아닐까요. 어릴 적부터 설호(견자단)의 사랑을 받고, 그를 가슴 속에 품고 자란 비아지만, 단 몇일. 독침을 맞고 난천의 치료를 받은 그 몇일. 완전 다른 세상의 품 안. 그 새로운 세상이 눈을 아득하게 만들어서였을까요, 아님 뒤늦게 사랑이 찾아와서였을까요. 그만큼 치명적인 것 같았어요. 비아에게는. 구중궁궐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른, 세속과는 동떨어진 자연과 동화된 삶. 전쟁에 대한 생각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순간.
난천은 또 어떻구요. 너무 오래 세상을 등지고 홀로 살았던 탓일까요, 아님 비아의 미모에 홀딱 빠진 탓일까요. 오랫동안 외로웠겠죠. 자연이 친구라지만, 외로움이 친구라지만, 불쑥 아름다운 여인이 뛰어들었는데, 어디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게 남자겠어요. 그 정도면 안빈낙도를 버릴 만도 해요.
내가 아는 어떤 사랑도 그렇답니다. 가을햇살의 눈부심에도 홀딱 넘어가는 것. 25센트 커피 한잔에도 커피향보다 강한 설렘이 가미될 수 있다는 것. 아무리 익고 숙성된 사랑이 있다손, 한순간 다른 향에 마음이 기울어버리는 것. 머물렀던 시간의 길고 짧음은 상관이 없어요.
비아와 난천이 그랬다지요. 괜한 심통이 나서는, <연인>에서 메이(장즈이)와 진(금성무)의 짝퉁 같다고도 했지만, 머뭇거리던 그 사랑을 확인한 순간, 짜릿짜릿. 치료를 마치고, 비아는 떠나야하고. 난천에게 천을 기워 만든 하늘을 나는 열기구, '천등'을 타고 찾아오라는 비아. 때마침 비아공주를 찾아헤매던 연나라 군대가 찾아와 비아가 연나라 공주임이 들통나죠. 자라보고 놀란 가슴, 실망의 빛(아마 신분차 때문이겠죠?)을 숨기지 못하고 "공주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감히 하늘로 오를 수 있겠습니까"라는 난천에게, 비아는 말해요. "당신에겐 공주가 아닌 비아로 남고 싶어요. 저는 당신과 함께 하늘을 날고 싶어했던 여인일 뿐이에요." 제 마음도 후달달. 울컥. 저 뻔한 수사. 닭짓하는 수사. 그럼에도 쿨적함을 숨기지 못하겠더라구요. 흑.
생각했지요. 아무리 함께 머문 시간이 짧았다손, 떠난 사람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 계속 그를 흔들었을 거라고. 그 사랑이 폭발한 찰나가 안빈낙도의 안온함을 이겼을 거라고. 그들이 함께 타고 하늘을 누비는 천등의 모습에선, <타이타닉>이 떠올랐고, 나는 그저 몽클몽클했어요. 이 영화, 이걸로 접어도 좋아,라고 할 정도로. 빗속의 알싸한 키스 장면은 어떻구요. 좀더 진하게 엉기지 못해 아쉬운 감이 있긴 해도. 다짐했지요. 저도 언젠가, 빗속에서 저런 키스를 연출하겠다고. 으쌰.^^;
그러나, 세상은 춘추전국시대. 피 없이, 사랑을 허락할 리 없지요. 나는 사실, 미웠답니다. 설호가 난천에게 달려가 연나라의 위기, 정확하게는 왕실의 위기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난천이 "불안에 떨기보다는 당신에게 원망을 듣겠다"는 뻘소리로 비아에게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 왕위를 버렸지만 백성들이 고통받게 할 순 없어요"라며, 결국 다시 왕국을 찾으러 나서는 비아. 그깟 왕위도 이미 버린 것. 솔직히 저는 끝까지, 비아가 백성보다 자신의 사랑을 지키는 이기심을 발휘했으면 싶었어요. 불안했거든요. 흑. 안 그래요? 천하를 얻으면 뭣합니까. 사랑을 잃게 된다면. 기다리라는 말, 언제나 깨지게 마련인 저 말. 어쩔 수 없었어요. 눈물이 나는 걸 어떡해요. 흑.
<연의 황후>는, 가만 속살 들춰보면, <명장>처럼 그래요. 전쟁, 그까이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부질 없는 뻘짓이라고. 하지만, 어쩐지 그거야말로 붕붕 떠다닙니다. 설득력 없이 외치는 평화는 공허하고. 그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연결고리도 성기고. 마초들의 패권주의나 야욕도 뜬금없이 등장했다, 사그러들고, 다시 억지춘향식으로 끼어들고.
그러니, <연의 황후>는 온전하게 그 닭살 연애짓에 초점을 맞췄어야 했다구요. 사랑이 쉽게 이뤄지고 쉽게 끝이 난다는 감상 또한 나올만 하지요. 아쉽고 또 아쉬워요. 좀더 닭짓하는 러브모드로, 그까이 천하나 백성들 '쌩'까고 연애질이나 계속할 것이지. 아이, 속상해요. "운명을 바꾼 사랑, 천하를 세우다"라는 카피, 아니죠. "천하를 세운들, 사랑을 잃고 나는 우네" 맞습니다. 천하를 세우는 일도, 전쟁 없는 평화도, 결국은 연애를 잘해야 하는 법. 사랑 제대로 했으면, 또 알아요. 천하와 평화도 함께 얻었을런지. 물론, 이건 제 아쉬움이 끌어들인, 질긴 아집이지요.^^;;
아 참, 잊을 뻔 했네요. 노래. 비아와 난천의 사랑이 자체발광하도록, 도와주던 노래. 진혜림과 여명이 함께 부른 연의 왕후의 주제가, '수몽이비'(flying with your dreams). 그 감미로운 듀엣의 선율에 제 감정도 한없이 흔들렸어요. 천등을 타고 사랑을 속삭일 때, 더 없이 빛을 발하던 노래. 참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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