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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기억의 저편

'일기쓰기'를 통해 삶을 지키다, 안네 프랑크

by 낭만_커피 2012. 7. 7.

바람의 딸, 한비야도 지치고 힘들어서 위로 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녀를 달래주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일기, 또 하나는 베스트 프렌드, 나머지 하나는 하나님. 물었다.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그녀, 일기를 들었다. 그녀, 여전히 매일 같이 일기를 쓴다. 틈날 때마다 쓴다. 현재와 순간을 살아가는 바람의 딸에게 일기는 일상다반사. 그녀는 말한다. “아마 나는 일기를 안 썼으면 건달이 됐을 거예요. (웃음)”


그녀 이전, 일기쓰기로 삶을 지탱한 사람이 있었다. 


안네 프랑크(Anne Frank, 1929. 6.12~1945.3.12). 


일기는 나치 치하의 유대인 소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안네의 일기》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한가운데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안간힘의 결과였다. 개인적인 것이 곧 역사적인 것임을 상기시켜준 《안네의 일기》. 그것은 어떻게 한 소녀를 지켜준 것일까. 6월, 안네가 태어나고, 일기를 처음 쓰기 시작한 달. 학살과 억압을 뚫고, 세계를 품은 여인들의 정신을 지켜준 ‘일기의 힘’을 엿보자.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6월12일, 안네가 태어난 날이자, 《안네의 일기》가 시작된 날이다. 1942년, 피난 생활 중이었다. 안네는 13세 생일 선물로 붉은 체크무늬 일기장을 받았다. 안네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키티(Kitty)’라는 이름을 붙였고, “생일에 테이블에 놓여 있는 당신을 보았다”고 적었다. 일기는 일기 이상이었다. 열세 살 소녀는 일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일기는 자연스레 안네의 친구가 됐다.

 

친구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는 소녀의 모습처럼, 안네는 키티에게 시시콜콜 털어 놓았다. 일기는 그렇게 가혹하게 바뀐 주변 환경에서 마음 둘 곳 없는 소녀의 절친이었다. 자신을 돌아보는 기제도 됐다. 그녀는 외로웠다. 친구도 없었다. 아니, 친구를 둘 수 없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녀는 일기에 그것을 토로한다.


“내가 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가를 말할 차례인데, 한마디로 마음을 털어 놓을 만한 참다운 친구가 내겐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할게요. 열세 살 먹은 여자 아이가 이 세상에서 외톨이라고 느끼고 있어요. 아니 실제로 외톨이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요.”


외롭고 또 외로웠다. 몸의 자유를 박탈당하면서 마음마저 닫아야했던 억압적인 상황. 세상이 좁다며 발랄하게 뛰어다닐 열세 살 소녀에게, 현실은 감옥이었다. 독일군을 피해자니 어쩔 수 없었다. 은신처가 세상의 전부였던 소녀. 밖을 돌아다니는 것은 곧 죽음이었다. 친구를 만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법을 차츰 터득한다. 일기를 쓰면서 자아를 완성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암스테르담 '안네 프랑크 하우스'(www.annefrank.org)에는 각국에서 번역된 《안네의 일기》가 전시돼 있다.


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를 담는다. 그럼에도 개인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개인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안네의 일기》에는 시대 상황이나 나치의 만행 등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십대 소녀의 눈으로 본 세상이 고스란히 담겼다. 하얀 백지는 안네의 마음이 쓴 필체로 채워졌고, 거기엔 안네가 또박또박 새겨졌다.


소녀는 글의 힘, 종이의 힘, 일기의 힘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안네의 일기》, 이런 대목이 나온다.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딥니다.” 그녀의 생은 너무도 일찍 지고 말았다. 하지만, (일기를 쓴) 종이는 남았다. 잘 참고 견뎠다. 오래오래 남아 지금까지도 남았다. 십대 소녀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른들이 만든 참혹한 세상에서 일기라는 창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던 소녀는 일찍 어른이 됐던 것일까.


일기를 통해 성숙해진 소녀


실은 안네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192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은행가 오토 프랑크와 어머니 에디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개혁파 유대교 신자로 자란 그녀에게 시련이 닥치기 시작한 것은 1933년부터였다.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자, 유대인에 대한 온갖 박해와 차별이 이뤄졌다. 수위는 점차 높아졌고, 1938년 홀로코스트가 자행됐다. 거주의 자유를 박탈당한데 항의하던 17세 소년 헤어쉘 그린츠판, 파리주재 독일대사관의 에른스트 폼 라트를 살해했다. 이를 구실로, 나치는 유대인들에게 집단 테러를 가했고, 학살을 본격화했다.


유대인이었던 안네의 집안 역시 그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다. 삼촌들은 미국으로 망명했으나 안네의 아버지는 미국 망명에 실패하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그녀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1942년,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했고, 유대인을 색출해 수용소로 끌고 가던 시절이었다. 안네 가족(과 다른 가족들)은 옴짝달싹도 못한 채 네덜란드 프린센흐라흐트 263번지 건물 창고에 숨죽이며 살았다. 건물 내 비밀공간이 그들의 주거지였다. 오로지 작은 라디오 하나와 외부에서 도움을 주는 소수의 지인만이 유일한 소통 통로였다.


 안네 프랑크 우표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은 살고야 만다.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하는 것이 인간이다. 먹을 것을 비롯해 모든 것이 부족했고, 한 공간에서 부대끼면서 갈등도 많았다. 어머니나 언니와 말다툼을 했다. 불만도 쌓였다. 다른 가족들과의 반목도 있었다. 오랜 감금에 따른 스트레스와 우울증도 따랐다. 반면 작고 소박한 행복이라고 그들을 지나치진 않았다. 특히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의 성적인 호기심과 사랑도 일기장 곳곳에 자리한다.


안네는 일기를 통해 성장했다. 또한 일기를 통해 갑갑하고 꽉 막힌 생활에서 탈주했다. 상상력이 나래를 폈고, 언젠가 찾아올 자유를 기다렸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녀의 키는 계속 자랐고, 그녀의 글도 점점 깊어진다. 그러나 그 일기, 1944년 8월 1일로 끝이 난다. 8월 4일 밤, 나치의 게슈타포가 은신처를 급습, 전원이 체포됐고, 안네 가족은 수용소로 이송했다. 더 이상 일기를 쓰지 못한 그녀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1945년 3월 12일, 열여섯의 나이, 안네는 영양실조와 장티푸스로 죽었다. 나치로부터 해방되기 불과 2달 전이었다.


은신처에서 함께 지내면서 사랑을 느꼈던 페터도 사라졌다. 안네의 아버지만 유일하게 생존했다. 게슈타포가 휩쓴 은신처에 덩그러니 남겨진 일기장을 보관하고 있던, 은신생활을 도와준 미프 기스에게 일기장을 건네받았다.(미프는 지난 2010년 1월, 100세로 타계했다.) 아버지는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선 안 된다’며 안네의 일기장을 출간했다. 우리가 아는 《안네의 일기》는 그렇게 빛을 보게 됐다. 물론 첫 출판 당시 아버지는 안네의 성적 호기심과 부모와 다른 가족을 비난한 부분을 삭제했었다. 무삭제판은 안네 사망 50주기를 맞아 출판됐다.


일기를 쓰면서 여성은 강해진다!


안네의 은신생활을 견디게 한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일기쓰기’를 통해, 자유를 박탈당한 엄혹한 시절을 버텼다. 다른 것을 하기도 힘든 환경이었지만, 안네의 글쓰기는 어머니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글 쓰고 있는 안네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프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보다시피, 나의 딸은 작가랍니다.”


어머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니, 결과적으로 과소평가됐다. 작가 앞에 ‘엄청난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생략된 셈이다. 《안네의 일기》는 약 60개 언어로 번역돼, 약 3200만 권이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한 소녀의 기록이 후세에게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과감 없이 보여줬다. 안네가 쓰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시대의 공기를 그만큼 정교하게 포착하진 못했을 것이다.


한비야도 그랬지만, 그 이전에 안네 프랑크가 있었다. 일기를 쓰면서 강해지고 세상을 좀 더 품게 된 여성들을 우리는 이제 안다. 삶이 힘겹고, 위로 받고 싶다면, 일기를 써보는 건 어떨까? 내 작고 사소한 글쓰기가 세상을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삶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에서 조금씩 치유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조 : 《안네의 일기》, 위키백과

 

[서울여성가족재단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