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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영화하나객담] 중독된 당신에게 고함, 꿈은 죽었다!

by 낭만_커피 2011. 3. 12.
<블랙 스완>의 히로인은 나탈리 포트만이지만,
숨겨진 히어로는 감독인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아닐까.
지금은 없는, 종로의 코아 아트홀에서 내가 본 그의 첫 영화, <레퀴엠>.
그 때 받았던 충격은 상당했다. 흔들리는 스크린은 충격에 휘둘린 내 심정이었다.



그나저나, 제니퍼 코넬리는 뭘 어찌해도 치명적이고, 아름답다. 여신, 맞다. 
'치명적 지성미'라는 그녀를 수식하는 말에 나도 한 표 보탠다.

중독된 당신에게 고함, 꿈은 죽었다!


<레퀴엠>은 ‘중독’된 인간들의 비참함을 때론 현란하게, 때론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영상을 대면하는 동안 먹먹해지는 가슴은 감독의 의도인 듯하지만, 심장이 아래로 뚝 떨어지는 듯한 감정을 피할 수 없다. 피폐함이 밀려오고 갈증도 수반된다. 데뷔작, <파이>로 미국 독립영화계의 앙팡테리블이 된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두 번째 장편인 <레퀴엠>의 원제는 <Requiem for a Dream (꿈을 위한 진혼곡)>
.

중독된 자들의 추락사

<레퀴엠>은 중독된 인간들의 비극과 같은 꿈을 다룬다. 현대사회의 ‘중독’에 대한 가감 없는 표정과 뜨악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절망에 대한 보고서다. 중독이란 ‘늪’에 한발씩 다가서면서 파멸로 향하는 등장인물들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현대사회의 빛과 어둠사이 간극을 접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중독의 이면에 존재하는 ‘결핍’까지.

<레퀴엠>은 도입부에서 아들과 어머니의 신경전을 통해 각자가 집착하는 -내면적 고통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서- 중독을 한 꺼풀씩 드러낸다. TV다이어트쇼 시청이 유일한 낙인 어머니와 그 TV를 팔아 마약비용을 마련하는 아들간의 허무맹랑한 핑퐁식 공방은 차츰 외연을 확대하는 모양새다.


어머니, 사라(엘렌 버스틴)는 TV다이어트쇼와 다이어트약에 빠져들면서 환상에 빠진다. 아들, 해리(자레드 레토), 여자친구, 마리온(제니퍼 코넬리)과 친구 타이론은 마약과 본격적인 거래를 튼다. 그들에게 마약은 정신적인 만족뿐 아니라 폼나는 삶을 꿈꾸게끔 만드는 ‘무기’다. 그들은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이나 다름없다.

중독의 확장성은 놀랍다. 차츰 일상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게끔 유도한다. 그 과정은 계절의 바뀜을 통해 드러난다. 뜨거운 여름의 뙤약볕은 중독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는 그들의 경쾌한 발걸음처럼 빠르고 희망적으로 채색되지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을 지나 겨울에 도달하면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다. 결국 그들에게 ‘봄날’은 오지 않는다. 만물의 소생을 알리는 봄은 결코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을 계절로 망각되고 만다.

그 절망의 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희망, 꿈은 바로 여기에 있어’라고 간드러진 울림으로 그들 삶의 구심점이 됐던 중독은 단숨에 갈라진 목소리로 ‘카운트 블로’를 날린다. ‘이건 현실이 아냐’라고 거부하는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로 산산조각난다. 누구도 그들을 구원할 수 없다. 환멸로 가득한 시선만이 배회할 뿐이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한 그들에게 남은 건? 맞다. 결핍’밖에 없다. 사라에겐 좋았던 시절의 가족에 대한 공허함이, 해리는 꺾어져 버린 지난 꿈에 대한 상실감이 둥지를 틀었다. 마리온에겐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애정이 결핍돼 있다.

한편으로 영화는 중독과 결핍, 파멸의 수순을 숨 가쁜 영상으로 표현한다. 관객이 흡사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강렬한 영상 메시지를 전파한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반쪽으로 조각내고 하얀 가루, 동공의 숨 가쁜 움직임, 덜거덕거리는 이를 빠르게 교차 편집한 몽타주(감독은 이를 ‘힙합 몽타주’라고 명명했다). 편집은 정교하고 빠르다.

그러나 이 같은 현란한 스타일과 테크닉을 담은 화면이 영상의 기교로서만 존재하진 않는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인간 내면의 풍경을 극한으로 끌고 가면서 관객을 화면에 부착시킨다.

중독은 자기 증식한다


사라는 중독의 자기 증식과정을 적나라하게 토로한다. TV부터 다이어트, 약물로 이어지는 중독의 확대 재생산. 냉장고는 ‘변신괴물’이 되어 사라를 집어삼킬 듯 덤벼들고, TV다이어트쇼의 환영들은 스멀스멀 브라운관에서 기어 나와 사라뿐 아니라 관객을 혼비백산하게끔 만든다. 중독의 심화로 치닫는 계단을 통해 현대인이 맞닥뜨린 현실이 섬뜩하게 드러난다.

중독은 ‘소비’를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인 산물이다. “소비하라, 그러면 너희들은 행복해질 것이다”고 무차별적인 공세를 퍼붓는 자본의 횡포는 이미 일상을 주무르고 있다. 일례로 자동차와 핸드폰으로 대변되는 한국 사회의 문명화는 인간 영혼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준족의 발전(?)을 이룬 상태다.

헤로인, 코카인, 엑스터시 등 마약에 대해 ‘중독’이란 단어를 우선 떠올리지만 기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TV, 음식, 과자, 섹스, 다이어트, 게임 등 버라이어티한 상품이 진열된 자본의 백화점은 일상 속에 깊이 침투해 있다. 중독이라고 느끼지도 못할 만큼! 무언가에 미쳐야 한다고 강요하고 자본은 끊임없는 소비를 통해 낙오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즐기는 것을 넘어 집착과 의존의 단계로 점프하는 순간, 삶은 다름 아닌 중독과 마주대하게 되는 셈이다.

<레퀴엠>의 원작자이자 시나리오를 쓴 허버트 셀비 주니어는 “그러한 판타지의 뒤를 좇을 때 마음속에는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인간은 무언가에 중독돼간다”라고 일갈했다. 구멍은 곧 결핍을 뜻하고 중독은 자연스레 결핍과 공존을 꾀하는 ‘자웅동체(雌雄同體)’일지도 모른다.

꿈이라고 자위하면서 더욱 집착하는 중독은 상품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대통령병’이라는 치유 불가능한 중독 증세를 보인 사람들을 보아왔고 ‘신용카드’란 이름의 병폐를 겪고 있다. 미디어를 가장한 중독성 전파는 여전히 횡행하고 인터넷도 자칫 잘못하는 순간 중독의 늪에 빠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고 있는 셈이다.


알게 모르게 어딘가에 중독돼 있을지 모르는 우리네 모습. 그 사실을 확인하려면 중독된 영상에 빠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오는 금요일(9일) 밤 0시 55분 KBS1TV 독립영화관에서 <레퀴엠>을 방영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2004년 7월 국정브리핑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