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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기억의 저편

영원한 청춘의 이름, 제임스 딘

by 낭만_커피 2007. 9. 30.
9월30일. 9월의 끝머리엔 결국 '제임스 딘(James Dean)'이 다가온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지만, 내 방에도 지미(제임스 딘의 애칭)형의 브로마이드가 장식하고 있었지. 그의 어떤 영화도 제대로 본 적이 없고,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갖는지 알지도 못하던 소년의 방으로까지 파고들었던 그 청춘. 나는 그저 반항끼 줄줄 흐르던 그의 간지와 눈빛에 매료됐었던 것 같다. 더구나 포르쉐(!)를 몰다가 스물 넷에 장렬하게 산화했다는 이야기에 혹하지 않을 재간이 없던 나이 아니었겠는가.

스물 넷은 그런 나이일까. "아직도 내 자신의 몇 분의 일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에 설렘을 느낀다"던 지미 형이었지만, 죽음 또한 그보다 적지 않은 설렘을 안겨주었던 것은 아닐까. 스스로 산화를 택했는지는 여전히 모를 문제지만,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차사고는 왠지 모르게 청춘의 작렬처럼 느껴진다. "빨리 살고, 일찍 죽는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남긴다 (It lives quickly, it dies early. It leaves a like that most beautiful love...)"고 말했다던 그의 어록에 기댄다면 말이다.

이렇게도 말했다고 하더라.
"사람이 진정으로 위대해지는 것은 한 가지 경우뿐이다.
만일 사람이 삶과 죽음 사이의 간극을 넘을 수 있다면,
죽은 뒤에도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어쨌거나 빠른 속도로 살아야 한다."

그래, 빠른 속도로 시간은 세월을 집어삼켰고, 벌써 52주기. 1955년 9월30일 오후 5시 59분, 미국의 하이웨이 46과 41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24살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 그가 타고 있던 차는 컨버터블인 '포르쉐356'. 이번주 나의 영화주간엔 어쩔 수 없다. 지미 형.
☞ 제임스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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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사랑'

'제임스 딘의 순정'(리버룸) 이라는 블로깅을 보자니,
멋대로 추측하자면, 지미 형을 영원한 청춘의 초상으로 만든 결정적 계기 중의 하나는 결국 '사랑'이 아닌가 싶다. 덴마크의 사상가,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며, 절망은 자기상실이라고 했다. 연인이었던 '피어 안젤리(Pier Angeli)'를 타의에 의해 떠나보낸 뒤 상실감과 절망은 커져가고 있을 터. 더구나 그들을 떼어놓은 중요한 이유가 종교라니.-.-;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연인을 떠나보내야 했던 그로선 감당하기 힘든 노릇이 아니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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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미 형에게 사랑은 '절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절망을 이겨내기 위해 청춘은 과도한 속력을 냈고,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억측.^^; 그의 애마, 포르쉐는 그런 마음을 알고 있었을까. 삐끗하면 와장창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공기를 가르는 강한 바람이 아니고서는 그 절망감을 씻을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 나는 한편으로 안타깝다. 종교적인 이유로 헤어짐을 강요받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그 사랑을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비극때문에.

지미 형의 산화는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모를 일이지만, 피어 안젤리는 그의 죽음으로 얼마나 많은 죄책감에 시달렸을까. 결국 지미 형 대신 선택한 사람과 이혼하고 39세의 나이로 생을 스스로 마감했단다. 피어는 죽기 전에 "진정 사랑했던 사람은 지미,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살아 생전에도 "나는 남편을 바라보며 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가 지미였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에휴. 대체 그 '사랑'때문에 몇 사람이 다친거여. 사랑했던 두 사람도 그렇지만, 결혼했다가 이혼한 피어의 전 남편은 또 어쨌을꼬. 두 사람의 사랑이야 세기의 사랑이니 뭐니하면서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회자되겠지. 그러나 거기서 엉뚱하게 파편이 튄, 그들의 사랑의 신화를 공고하게 만들어준 들러리로 전락한, 그 사람의 마음에도 괜한 신경이 쓰인다. 그도 피어를 사랑했겠지. 그렇다고 피어의 마음을 모르지도 않았을테지. 상처 입은 그 마음. 누가 알아줄꺼나. 휘유~~~

어쨌든 사랑은 어떻게든 답이 안 나오는 문제다. "우리 사랑하게 해 주세요~ 네에"라고 외친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복잡해 복잡해.

배우, 그 이상의 배우

사실 지미 형은 필모그래피만 놓고 보자면, 이렇게까지 추앙될 배우는 아니야. 생전 알려진 영화래야 고작 3편. <에덴의 동쪽> <이유없는 반항> <자이언트>. 그 중 두편의 영화도 사후에 개봉했었지. 그리고 TV 1편과 단역 2편 합쳐봐야 그가 출연한 필모는 많아야 6편.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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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형은 배우 이상이라고 봐야지. 사람들은 배우보다는 '제임스 딘' 그 자체로 바라보고 좋아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좋은사람'님은 이런 말을 건넨다.
흔한 말이지만 사실 '청춘의 심볼'이란 표현은 그에게 적절하다. 소년들은 그 에게서 자기가 꿈꾸는 모습을, 소녀들은 자신이 꿈꾸는 연인을 발견하고, 중년의 남성들은 그에게서 자신이 잃어버린 모습을, 중년의 여성들은 그리운 첫사랑의 모습을 만나는 것이다. 그가 바로 제임스 딘이다.

그가 세상을 등질 그 나이무렵, 지미 형의 초상이 담긴 우표를 샀던 나는 아직도 지갑 속에 그것을 간직하고 있어. 시대도, 문화도, 전통도 싸그리 다른 나라의 한 찌질한 청년이 아.직.도. 그를 그리고 있다는 사실. 이건 놀라운 일이 아니냐? 1931년 2월8일(내 생일과도 비슷한 시기다!) 태어나,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그것도 스물 넷이라는 나이에 장렬하게 요절한 그 사람을 이렇게 추모하고 있단 것이! 그의 얼굴이나 작살간지가 담긴 포스터, 티셔츠, 엽서, 우표 등은 전세계에서도 엄청 팔려나가지.

확실히 지미 형은 뭔가가 있던 양반이었던 것 같아. 본인이 의도하건 그렇지 않건. 사고 소식이 전파되자, 팬들은 큰 충격을 먹었지. 한 10대 소녀는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했다지. 셀리브리티(유명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동조현상이 일어나는 일명 '베르테르효과(Werther Effect)'인데, 스스로 산화한 것인지, 불의의 사고였는지,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그런 일도 있었던 거야. 이태리에서는 대학생들이 집단 가출해 거리의 여자가 되었다는 설도 있던데, 글쎄 사실여부는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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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주 페어몬트에 자리한 지미 형의 무덤에는 매년 6천 명 이상이 방문한다더군. 오늘은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오가겠지. 2년 전에는 비록 적자로 끝나긴 했지만, 고향인 인디애나주 마리온시에서는 50주년 추모제도 열렸고 어제 홍대 부근에선 그를 그리는 팬들의 추모 행사도 있었다. 못가서 아쉬웠지만.

그렇게 시간은 부지런히 사람들을 갈아치웠지만, 지미 형은 시간을 삼킨 채 사람들 사이에서 머물고 있어. 영원히 지지 않는 청춘. 죽어서 신화가, 전설이 된 청춘의 대변자이고 만신전. 그렇지 않아? 반항과 청춘의 아이콘이면서도 작은 충격에도 부서질 듯 애틋한 마음을 지녔던 한 사내. 그 불안감이 더욱 청춘들을 끌어당긴 건 아니었을까. 우리를 대변할 존재가 나타났다는 그런 마음.

그 사내, 아직도 달리고 있을까

지미 형의 별명은 'Dirty Shirts(더러운 셔츠)'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과 기성세대의 경직성과 획일성이 지배하던 시기, 젊은이들은 숨이 막혔고 자유스러움과 다양함에 대한 욕구가 거칠게 꿈틀거렸다. 구기고 오물을 투척해야 했다. 앞선 세대의 질서와 체제에. 셔츠가 더러워질 정도로. 그렇게 젊은이들이 반항의 깃발을 꼽고 바리케이트를 쳐대고 싶었을 즈음, 그의 등장이 젊은이들의 숨통을 틔워줬다. 젊은이들의 욕구를 대변했다는 <이유 없는 반항>을 보자규. "10년 뒤엔 알게 될 거다"라는 아버지의 말에 아들 역의 지미는 들이대잖아. "당장 대답이 필요해요"라고. 그렇게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항심을 대변하는 존재였다. 그는.

나는 생각해. "빨리 살고 일찍 죽는다..."는 지미 형의 말이 1950년대 나타난 비트족(beat generation)의 슬로건이 된 것은 당연하다고. 기성세대에 상처 받고 반항하고픈 이들의 마음을 대변했기에. (그가 산화한 뒤인 1956년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의 장시 《울부짖음 Howl》, 1957년 잭 케루악(Jack Kerouac)의 장편소설 《노상(路上)》 발표 후 '비트족'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됐으니 아마도 그의 영향이 미쳤지 않나 싶다.)

당시 비트족은 어떤 정치적 운동보다 기성질서에 대해 급진적인 도전에 나섰어. 그것은 지미 형을 에워싼 아우라와 다르지 않았던 게지. 직업, 가족(특히 아버지), 안전, 유보된 형태의 모든 만족을 우둔하고 체제순응적인 것으로 간주한 비트족은 즉각적인 쾌락을 추구했고 술, 마약, 범죄, 동양철학 등에 탐닉해 더 높은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을 모토로 삼았다. 그래서 10년 뒤엔 알게 될 것이란 아버지의 말에 당장 대답이 필요하다고 반항한 것처럼, 아버지와 절연하면서 연고 없이 생존하려 했었다. 그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고백마냥. 또 비트족이 히피, 펑크 등으로 이어졌음을 감안하면, 그는 후대의 청춘들에게 분명 선지자였음에 분명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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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하지만, 지미 형은 단순하게 배우로만, 스타로만 그친 사람이 아니었던 듯 싶어. 본인의 의사로 그리 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에겐 당시의 시대와 사회상이 투영돼 있음을 부인할 수 없잖아. 그래서 시대와 청춘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것일테고. 물론 지금이야 어디 그렇나. 자본이라는 거대한 손은 이제 청춘의 반항심마저도 상품화하는데 주판알을 거침없이 튕구고, 청춘은 그런 자본에 포획되고 있잖아. 사실 오늘날 지미 형은 삐뚜룸하고 반항적인 표정으로 박제된 채, 끝없이 복제되고 소비되는 일종의 '상품'이 돼 버렸잖아. 당대의 문화적 아이콘이 지녔던 아우라나 표식은 거세된 채.

지미 형이 더 오래 살았다면, 그도 할리우드의 자장에 포획당했을까, 아니면 다시 그곳으로부터도 뛰쳐나갔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해. 흠 어쩌면 소비적인 이미지에 반역을 꾀하고, 포획당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자신이 알아서 일찍(!) 산화한 것은 아니었을까. 역시 나의 억측! ^^; 그는 저 구름의 저편에서는 얼마나 속력을 내면서 달리고 있을까. 오빠~ 달려~~~

지미 형이 생전에 기자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라는데,
Being a good actor isn't easy,(훌륭한 배우가 되는 것은 쉽지 않지)
Being a man is even harder,(사람이 되는 것은 더욱 어렵지)
I want to be both before I'm done.(나는 죽기 전에 둘 다 이루고 싶어)
글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너무 일찍 생을 마감해서 아쉬워하고 있을까.
그가 남긴 말처럼 죽은 뒤에도 살아 있으니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되려나.
나는 모르겠고,
다만 확실한 것은,
피어 누나를 포르쉐 옆좌석에 태우고 더 이상 '절망' 없는 사랑을 하고 있을테지.

형아, 그 청춘이 다시 보고 싶소이다.
누군가 그러더이다.
형이 갑작스레 그렇게 산화하면서, 모든 스타는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대신 구름의 저편에만 스타가 존재한다고. 어떠우? 만족하시우?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후딱 가버린 건 알겠으나,
괜찮다면 우리 청춘의 길 좀 다시 알려주시오. 이정표만 덩그러니 세워놓지 말고.
아, 이렇게 9월이 가는구료.
전혀 뜬금 없는 얘기지만,
형아도 버마의 민주화 시위를 함께 지지해 주심이 어떨런지...
이왕 달리고 있다면 버마의 구름이 있는 쪽으로 속력을 내주시겠소? 군부를 확 치어버려두 좋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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