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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어리석음의 기록

음악, 가난과 공정에 대처하는 아주 ‘좋은 예’

by 낭만_커피 2010. 12. 2.
구스타보 두다멜부터 시작된 행보는,
엘 시스테마를 거쳐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에까지 도달하도다.
다큐멘터리도 있었고, 책도 있었으며, 마침내 현장 강연까지도 다다랐거든.

이런 저런 매체를 통해 접하고 만났던 아브레우 박사였어.
감히, 음악계의 '체 게바라'라고 불러도 될 사람을 알현한다는 건,
상상에서만 가닿을 수 있는 일이었지, 현실에서 구현되리란 생각은, 도리도리.


어쩌다, 기적은 폭죽을 터트리기도 하잖아. 이번이 그랬다지!
서울 평화상 수상이라는 명분에 의한 것이었지만, 아브레우 박사가 한국에 떴다.

더구나 대중 강연.
음악의 힘을 믿는, 살아있는 전설을 만나고픈 나는, 냉큼 달려갔었지.
등 굽고 다리엔 힘 없으며, (음악)혁명가가 뭐냐, 동네 할아버지가 떡, 있는 거야.

하지만, 그는 일흔살의 멋장이.
눈은 형형(炯炯)히 빛나고, 말은 총총 별처럼 심장에 박히더오. 
35년동안 음악으로 한 나라를 바꿔놓은, 무엇보다 개별 주체들에게 삶을 선사한,
음악혁명가의 면모. 아, '어른'이라는 존재는 저래야 하는구나!
등 굽은 노인네인줄 알았더니, 눈 밝은 청년이구나!!

어른이 되기엔 진즉 삑살이가 난,
아마 아브레우 박사의 발 뒤꿈치에도 도달하지 못하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있는 자들의 전유물인줄 알았던 음악을, 천상에서 둥둥 떠돌던 음악을,
모두의 것으로 만든, 한 계층의 독점이 아닌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것임을 증명한,
특히 “모든 아이들이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음악을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음악에 대한 그의 태도와 자세.
음악과 사회의 관계를 접합하는 마인드. 

다시 한 번, 내가 커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때를 생각한다.

커피에도 계급이 없어야 한다. 돈 벌려면 돈 많은 부자들이 있는 곳에 가야한다고?
나름 생각해줘서 한 충고는 고맙지만, 그의 커피와 손 잡지 않은 건, 다행이야.

커피가 음악만한 힘을 발휘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아니면 다른 차원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음악의 힘을 보조하고 추동할 순 있지 않을까.

남은 건 엘 시스테마의 공연을 보는 일과, 베네수엘라를 찾아가는 일.
우리, 함께 갈까? :) 그리곤 우리도, 큰 걸음처럼 나가자고, 코끼리처럼!
(엘 시스테마의 출발일과 나의 생일이 같으니, 아마 그 날짜에 맞춰야겠지? 하하!)

지난 10월28일, 아브레우 박사 알현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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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기 연주하며 마음 부자 됐어요.”
최근 읽은 기사 제목이다. 전남 여수의 산동네 한 귀퉁이에서 바이올린, 플루트, 첼로 소리가 울려 퍼진단다. 저소득층 초중고생 오케스트라 ‘여수열린합주단’의 이야기였다. 29명으로 구성된 이 합주단 대부분은 기초수급자 혹은 차상위 계층, 한부모나 조손 가정의 아이들이다.

이들을 한데 모으고, 부유하던 마음을 붙잡은 것이 ‘음악’이었다. 정한수 목사 부부는 아이들과 음악을 맺어줬고, 2003년부터 합주단은 팡파레를 울렸다. 악기를 독학으로 익힌 동네 이발사 아저씨를 첫 스승으로, 아이들은 연주를 배우고 익히면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학교 관악부원이 됐다는 진영군의 말이 찡했다. “악기는 부자들만 배우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내 마음이 부자예요. 앞으로 일본에 가서 재즈 음악을 공부하고 싶어요.”

합주단은 교육과학기술부가 추진하는 베네수엘라-한국 청소년 합동 오케스트라 공연 참가 수요 조사에 신청서를 냈다. 물론, 여수열린합주단 뿐이랴. 한국엔 또 다른 이런 합주단이 있을 것이고, 그들도 신청서를 냈으리라. 그들 모두에게 음악의 힘이 강림하길.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바랐다.

#2. 음악의 힘을 아시나요.
최근, 한국방송의 <남자의 자격 - 남자, 그리고 하모니>편에서도 확인한 바 있다. 박칼린 선생의 지도하에 오합지졸 합창단이 어떻게 하모니를 이루고, 음악을 매개로 어떻게 화합하고 성장했는지. 지난 4월 독립 200주년을 맞았던 베네수엘라에서 진정한 음악의 힘을 보여준 사례가 있다. 1975년 2월12일 차고에서 시작된 한 이야기. 음악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가난을 대처하는 좋은 예로서 작동했던.


엘 시스테마. 세계 음악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지금 음악계에서 여기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말했다.) 음악의 힘을 믿었던 젊은이, 경제학자이자 음악가였던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의 꿈에서 모든 것이 비롯됐다. 그의 생각은 간단명료했다. “모든 아이들이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음악을 접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꿈도 미래도 희망도 없던 아이들이 악기를 만났다. 총을 들었고 마약을 운반했던 손에 생뚱맞게 들린 악기. 1975년 2월12일, 11명이 모인 시작은 미미했다. 차고를 전전하며 연습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지만, 아브레우 박사도 아이들도 즐거웠다. 왜? 단순하다. 음악이 있으니까. ‘호세 란다에타 국립청소년 오케스트라’로 출발한 엘 시스테마는 어느덧 35년을 자랐다.

차고는 어엿한 학교로 변모했고, 산동네에서 울려 퍼지던 오합지졸의 선율은 세계 각국의 예술극장을 채웠다. 엘 시스테마는 35년 동안 음악의 힘을 널리 전파했다. 25개 지역에 지역 센터 221곳, 오케스트라 500개가 활동 중이다. 30만명이 음악의 힘을 직접 경험하고 자신의 삶이 바뀌는 기적을 경험했다. 60%가 빈곤층 출신이었다.

엘 시스테마는 ‘베네수엘라 국립 청년 및 유소년 오케스트라 시스템 육성 재단’의 약칭이다.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비롯해, 성인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들을 지원하는 교육센터와 악기 제작 아카데미, 가난하고 불우한 아이를 위한 지원센터 등 엘 시스테마는, ‘음악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 됐다.

1998년 유엔개발계획(UNDP)은 엘 시스테마를 빈곤 감소를 위한 사회 운동에서 괄목할 만한 모범 사례로 추천했다. ‘음악,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권리’임을 확인하고 실천했던 엘 시스테마. 그들은 가난을 대물림하게 하는 빈곤의 문화에 맞서 싸웠다. 무엇보다, 음악이 사람의 귀와 마음만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생과 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준 좋은 예이다. 그것이야말로, ‘음악의 힘’.

“음악은 내게 전체로서 다가오고 내 느낌, 꿈, 향수, 환상, 에너지를 일깨웁니다. 음악은 행동과 헌신을 요구해요. 음악은 소년 시절 이래로 지금까지 내가 완전한 존재로 살기 위해 필요한 발전기이자 에너지예요. 음악이 없었다면 인생은 견디기 어려운 사막과도 같았을 겁니다.”(p.78)


지난 10월28일, 서울 이화여대. 타자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음악이라는 도구로 몸소 실천한 호세 아브레우 박사의 특별 강연회가 열렸다. 2010년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돼 방한한 그는 한국에서도 유명 인사다. 최근 나온 『엘 시스테마, 꿈을 연주하다』(체피 보르사치니 지음/김희경 옮김|푸른숲 펴냄)를 통해 그의 이야기가 널리 퍼졌고, 다큐멘터리인 <엘 시스테마>도 상영된 덕분이다.

특별 강연을 위한 축사의 뒤, 인사말을 위해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이른바 ‘노인’이지만, 아브레우 박사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사회안 어떤 개인도 단독자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체화하고 있는 까닭이리라.

그의 강연은 지금, 우리, 여기의 화두인 ‘공정’과도 맞닿아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른 나라의 다른 나라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겠다. 음악의 ‘힘’을 믿는 당신이라면, 모두가 부자가 아닌 누구도 가난하지 않는 사회를 원한다면, 공정함과 세계를 사유하고 싶다면, 아브레우 박사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겠다. 엘 시스테마가 가난한 아이들의 손에 악기와 함께 “자유의 의지, 문화적 감수성, 성찰적 사고 능력”을 쥐어주었듯, 그가 베네수엘라의 반대편 지구인인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니까.

“아브레우 박사는 베네수엘라의 모든 어린이에게 오케스트라에 속할 권리, 문화를 즐기고 인생과 직업에서 다른 가능성을 가질 권리, 음악의 빛과 지혜 속에서 세계를 다른 시각으로 볼 기회를 선물했어요.”(p.108)

아울러, 베를린 필의 제1트럼펫 연주자인 토마스 클라모어처럼, 음악에 대한 편견도 일단 부수고. “이전까지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아이들이 음악을 하고,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베네수엘라에서는 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베네수엘라에 묶어놓은 끈입니다.”(p.127)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모인 ‘사회’여야 한다.



엘 시스테마는 어떻게 탄생했나?


엘 시스테마의 설립에 대한 아브레우 박사의 회고.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 살고 있었던 그가 안타까워한 부분이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 당시 음악교육을 많은 이들에게 제공한다는 건 생각도 못한 일이었는데도, “이런 현실이 안타까워 고민하면서 많은 선생들과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