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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기억의 저편

사랑하고 노래했으므로, 에디트 피아프

by 낭만_커피 2010. 10. 11.
에디트 피아프는, '사랑'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이지.
그녀가 부른 불멸의 노래 곳곳에 그 사랑의 흔적과 감정이 묻어 있거든.
노래에 틈입한 에디트 피아프의 이야기를 알고 듣는다면, 노래가 또 달라질 걸.

"이제 목요일이면 너의 품에 안겨서 꿈을 꾸고, 너를 사랑할 수 있겠지. 너 없는 시간은 너무나 지루하고, 너 없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밤이나 낮이나 나는 네 생각뿐이야. 어서 돌아와서 나의 근심을 멈춰줘." (이경준 음악칼럼니스트의 <사랑의 두 비극: 그럼에도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지는가?>에서 인용)

피아프가 유일하게 진실한 사랑이라고 밝힌 세르당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그리고 비극으로 끝난 피아프와 세르당의 사랑을 담은, 무척 유명한 노래,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
 
작사를 피아프가 했으며, 작곡은 그녀의 친구인 마르그리트 모노가 했다.
가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자신도 따라 죽고 우리는 함께 할 것"이라는 내용을 품었다. 물론, 피아프는 세스당을 따라 죽진 않았다. 

최윤희 씨 부부, 《D에게 보낸 편지》,  에디트 피아프가 맞물린다.
한 사람이 없는 텅 빈 세상, 혼자 살아가는 일이 없길 바라는 어느 사랑(들).
물론, 당연하게도 한 쪽이 없어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도 사랑이다.
알잖아. 'Dieu réunit ceux qui s'aiment(신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니까!!!
 
10월11일.
에디트 피아프의 47주기.
잡지 <뷰즈>에 기고한 에디트 피아프 이야기.

안개 낀 가을날.
에디트 피아프 노래를 들으며 진한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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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노래했으므로,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

샹송 디바,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2.19 ~ 1963.10.11)


지난 여름, 흥행몰이에도 성공하고, 각종 화제로 들썩했던 영화 <인셉션>. 그 화제의 1인치에는 중요한 삽입곡인 ‘Non, Je Ne Regrette Rien(아니,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가 있었다. 그 내용은, 굳이 지면을 통해 말하진 않겠다. 그게 핵심은 아니니까. 이 노래, 에디트 피아프를 안다면, 아니 몰라도 워낙 유명한 노래니 들으면 ‘아~’하는 탄성을 내지를 것이다. 영화팬에게도 무척 익숙한 노래다. 스크린을 통해 다반사로 나오니까.  


대충 목록을 읊어보자. 독일 영화 <파니 핑크>의 메인 테마. ‘여자가 서른 넘어 결혼할 확률은 원자폭탄에 맞을 확률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노처녀 파니 핑크를 위한 곡이었다. 프랑스 영화 <몽상가들>의 엔딩곡. 68혁명의 어느 한 순간을 다룬 이 영화에서, 이 곡은 어쩌면 실패로 규정된 68혁명을 보듬는 뉘앙스도 풍긴다.


뭣보다, 에디트 피아프의 전기 영화인 <라비앙 로즈>에서의 이 노래, 물 만났다. 피아프로 분한 마리안 코티아르가 실감나게 모창했다. 피아프의 현현인가 착각이 들 정도. 코티아르는 이 역할로 2008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다. (코티아르는 <인셉션>에도 나오는데, 이 노래와 함께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한국에선 어떻게 회자됐을까. 지난 9월1일 1주기였던 영화배우 고 장진영은 자신의 영화인생에 가장 많은 영감을 준 음악으로 이 곡을 꼽았다. 역시 지난 여름, 최고 인기드라마였던 <제빵왕 김탁구>. 탁구(윤시윤)가 학생운동을 하다 잡혀간 유경(유진)을 향해 택시 세레나데를 펼치며 들려줬던 음악이 ‘Non, Je Ne Regrette Rien’. 


피아프를 수렁에서 건진 노래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Non, Je Ne Regrette Rien’는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그 자체다. 노래가 곧 사람이요, 사람이 곧 노래인. 사연은 뒤로 미루고, 번역된 가사부터 엿 보자.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대가는 치렀고, 다 지난 일이고, 이젠 잊힌 과거니까.

과거는 신경 쓰지 않아, 내 추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왜냐하면 나의 삶, 나의 기쁨이 오늘 그대와 함께 시작되거든요.…”



샹송의 디바, 에디트 피아프의 4대 명곡 중 하나로, 가장 늦게 발표된 노래였다. 사랑에 얽힌 과거 대신 새로운 사랑을 꾀하겠단다. 권토중래라고 해도 될까. 피아프의 연애사를 안다면, 고개 끄덕일 만하다. 그러니, 사랑에 배신당했다고 세상 끝, 아니다. 사랑은 모습을 바꿔 다시 온다. 그것도 노래와 함께. 피아프라면 그리 말할 만하다.


사랑도 그렇지만, 이 디바의 삶은 그 굴곡이 예사롭지 않다. 이 곡을 발표하기 전, 피아프는 피폐했다. 정신이나 몸, 모두 망가진 상태였다. 술, 마약은 기본이요, (굳이 남자는 넣지 않겠다) 예민한 예술가에게 따르곤 하는 자살미수도 있었고, 결핵, 간염, 관절염, 암 등 온갖 질병도 함께하곤 했다.


빛나던 ‘작은 새’의 영민함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실의에 찬 나날이었던 피아프에게 한 작곡가가 찾아왔다. 작사가 미셀 보케르의 소개로 찾아온 샤를르 뒤몽(Charles Dumont). 몇 차례 수상 경력이 있긴 했으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작곡가였다. 피아프는 물었다. “왜 날 만나자고 했지요?” 그는 피아프를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제가 미력하나마, 피아프님께 작품을 헌정하고 싶습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대가수 앞, 떨리는 목소리였다. 병든 닭 같은 피아프의 모습이었지만, 뒤몽의 심장박동은 멈추지 않는 폭주기관차였다.


여느 때처럼 꼬이는 똥파리를 대하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피아프는 말했다. “당신이 쓴 곡이니 직접 불러보세요” 두둥. 뒤몽은 떨리는 몸을 부여잡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Non, rien de rien... Non, je ne regrette rien...♪” 노래가 한참 진행되던 와중, 피아프가 벌떡 일어났다. 눈이 반짝반짝. 병의 기색이 순간 사라졌다. “멋져요. 당신은 정말 멋진 곡을 썼어요. 내게 딱 어울리는 가사고요. 나의 유언장이 될 것 같은 노래에요. 당신은 요술쟁이.”


물론 ‘우후훗~’까지는 없었지만,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사랑 받는 피아프의 명곡 ‘Non, Je Ne Regrette Rien’는 이렇게 탄생했다. 1960년 12월, 피아프의 네 번째 올림피아 극장 라이브에서 공식적으로 데뷔한 이 노래. 피아프의 삶이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당당히 “후회하지 않는다”며 외치며 돌아온 탕자(?)를 연호했고, 피아프는 화답했다. 과거? 후회? 그건 오늘이 아니니까, 이제 그만. 사랑하며 살고, 후회 없이 노래하리.


피아프, 그 불가항력적인 욕망의 화신    


피아프는 죽을 때까지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사랑의 찬가’를 부를만한 가수다. 그녀는 1962년, 21살 연하의 데오 사라포와 결혼했다. 죽기 1년 전이었다. 소화기계통 출혈로 요양소 생활을 하던 그녀는 1963년 사라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했다. 비극이 끊임없이 삶으로 삼투압 하던 와중에서도 노래와 사랑을 놓지 않던 그녀도 이땐 어쩔 수 없었나보다.


물론,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리의 가수 딸로 대낮 거리 한 복판에서 태어난 피아프였다.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환경. 부모는 그녀를 떠났고, 매춘부 소굴에 버려진 그녀를 구원한 것은 바로, 목소리. 노래를 부르며 친구와 서로 의지해 살던 그녀는 16살에 배달사환인 루이 듀퐁과 사랑에 빠져 이듬해 딸 마르셀을 낳았다. 하지만 아이는 2살 무렵 수막염으로 죽고 말았다. 다음 남자친구는 하필 포주였는데, 몸을 팔지 않기 위해 거리에서 노래를 불러 번 돈을 그에게 상납했다. 아직 피아프는 십대 소녀였다.


열여덟. 처음으로 거리가 아닌 무대에 섰다. ‘쟈니스 카바레’의 지배인 루이 르플레 덕분이었다. 그는 기본 무대 매너는 물론, 피아프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드레스를 입도록 조언했다. 음악적 아버지와 같았던 루이. 그러나 그는 갱단에 살해당했고, 가수이자 시인․소설가인 레이몽 아소가 그녀의 가수활동을 도왔다. 그때부터 이름을 ‘에디트 피아프’로 사용했다.


피아프는 그 목소리 덕분에 파리의 유명인사로 발돋움했다. 인기는 높아졌고, 그녀(의 노래)를 찾는 사람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럴 때, 똥파리(남자)들도 자연스레 꼬이는 법. 이브 몽탕도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미 거물이 된 피아프가 연하의 몽탕을 발굴, 데뷔까지 시켜줬다. ‘라비앙 로즈(La Vie En Rose, 장밋빛 인생)’는 몽탕과 함께 한 꿀 같은 사랑이 배태한 곡이다. 그러나 몽탕은 그런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다른 연인을 찾아갔다.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그녀에게 몽탕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었다.


권투 미들급 세계챔피언이었던 막셀 세르당과 나눈 사랑도 널리 회자됐다. 세르당이 피아프와 만났을 때, 유부남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을 막을 순 없었다. 그들 사랑의 편지가 책으로 엮일 정도로 활활 타올랐으나, 비극도 피할 수 없었다.
 


1949년 10월 뉴욕 공연이 있던 피아프, 당시 시합 때문에 파리에 머물고 있던 세르당. 경기를 끝내고 여객선을 타고 뉴욕에 가려던 세르당에게 피아프는 빨리 보고 싶다며 재촉했다. 비행기로 바꿔 탄 세르당에게 가장 빨리 다가온 것은 피아프가 아닌 추락 사고였다. 자책과 절망과 그리움으로 망연자실 살던 그녀에게 어느 날 욕실에서 갑자기 떠오른 악상. 세르당을 위한 것이었다. 그 노래가 바로,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  


에디트 피아프. 유난히, 예민하고 감성적이었으며 종잡을 수 없는 예술가. 사랑만 하다 죽어도 부족할 것 같은 이 여인은, “사랑은, 경이롭고 신비하고 비극적인 것이며, 사랑은, 노래를 하게 만드는 힘이고, 나에게 노래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랑 없는 노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면서 이율배반적이고 아이러니컬한 여인이었다. 자신의 아이보다 새 연인이 더 좋다며, 자신도 어릴 적 그리 당했으면서도, 아이를 버렸다. 미래의 사랑을 위해 오래 살아야 한다며 전쟁의 참상을 외면했다. 무대에서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관객을 압도했으나, 무대 밖에서는 외로움과 비극이 싫어 완벽한 사랑을 찾아 헤맸다. 오죽하면, “나는 나 자신을 망치고자 하는 불가항력적인 욕망을 지녔다”고 말했을까.


블랙 슈트를 입고 노래하다 죽는 것이 소원이었던 여인, 피아프는 시월에 눈을 감았다. 갑자기 어디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인지 궁금한 그 계절에. 마지막 사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더 이상 사랑에 대해서도, 노래에 대해서도 ‘빠담빠담’(심장이 뛰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 즉 ‘두근두근’)하지 않는 곳으로 향했다. 가을바람이 찼다. 어쩌면, 그녀는 마지막 순간, 이렇게 흥얼거렸을지도 모른다. “Dieu réunit ceux qui s'aiment(신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 ‘사랑의 찬가’, 마지막 구절이다.


 
[문화예술 크리틱 저널 <뷰즈> 기고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