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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말있 수다~

[책하나객담] 세계와 문화를 재료로 한 레시피, 괜찮다~ 맛있다~

by 낭만_커피 2010. 8. 9.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으나, 여기 이 말. “음식은 1분 만에, 음악은 3분 만에, 영화는 2시간 만에 새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다.” 결론부터. 요네하라 마리 여사는, 『미식견문록』은 이 말의 작은 증명이자, 확인이다.(물론 1분, 3분, 2시간이라는 숫자는 무시해도 좋다. 음식이나 음악, 영화가 주는 새로운 경험과 사유를 말하는 것이니까.)

그녀의 음식기행은 여느 미식가의 것과 다르다. 각 음식에 대한 품평이나 음식점 혹은 요리사에 대한 인상비평이 아니다. 촌철살인의 음식비평을 기대할 것은 아니란 말씀.


내가 본 『미식견문록』은 이랬다. 아버지의 튼튼한 위를 물려받았고 맛있는 음식 앞에선 이성 따윈 잃는 ‘쓰바키 히메(냠냠공주)’가 음식을 먹어가며 세계를 사유한 기록. 마리 여사는 자신을 이렇게 묘사한다. “맛있는 것이라면 정신 못 차리지만 미식가를 자처할 정도로 전문가도 아니요, 미각에도 자신이 없다. 먹는 양과 속도만큼은 평균 이상이지만 요즘 뜨는 푸드파이터(상금을 목적으로 도전하는 프로 대식가들) 발끝에도 못 미친다.”(p.245)  

그러다보니, 그녀의 음식 이야기, 군침을 돌게 하기보다는 새로운 세계를 유랑하는 기분을 맞보게 한다. 러시아의 속담이라고 했던가. ‘(보드카를) 마셔도 죽고, 안 마셔도 죽어. 어차피 죽을 운명, 안 마시면 아깝지.’

러시아에서 살아서일까. 그녀의 음식기행도 마찬가지다. 어린 날, 병아리의 죽음에 눈물 펑펑 흘리며 다시는 닭고기나 달걀이 들어간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던 그녀는, 어느 날 카스텔라(달걀이 들어간)를 맛있게 먹으며 깨닫는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 “먹는다는 것과 산다는 것, 이는 어찌 이리도 잔혹하고 죄 많은 일인가. 살생의 죄책감과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이 모순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일까.”(p.23)

아하, 맞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선,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링 밖에서 맴돌지 말고 링 위로 올라가야 한다. 일종의, 첫사랑 극복법.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던가. 내게도 물론 그랬지만, 첫사랑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속물이 되기 직전, 순수함이 철철 묻어날 때, 재테크가 어떠니, 연봉이 얼마니, 자동차가 뭐니, 따지기 이전의 단계다. 그래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지도 모를 첫사랑. 하지만 대부분 안타까이 막을 내리는 첫사랑. 무너져 버린 첫사랑, 그렇게 가슴 속에서 죽은 첫사랑을 제대로 애도해야만 우리는 다시 사랑을 할 수 있듯이.

다시 달걀을 입에 넣음으로써, 마리 여사는 인간의 모순도 깨닫고 어른이 된다. 그러니 꼭 어느 하나만 옳다고 단정 짓지 말 것. 나는 비교적 채식에 우호적이지만, 채식주의자가 곧 착한 사람이고, 육식이 성질을 포악하게 만든다는 단정적인 말에는 완전 비호감! 마리 여사도 말하지 않았던가. “히틀러도 채식주의자였다.”



그런 한편으로, 그녀는 음식을 먹는 것에서 사람을 보고 세계를 읽는다. 그것 참 재밌다. 혈액형으로 사람을 보는 놀이는 너무 나갔다. 그저 놀이일 뿐이었는데, 많은 이들은 그것을 지고지순한 진리로 보는 것이 문제다. 여기서 마리 여사의 새롭진 않지만, 나름의 옹골찬 방식이 있다.

그녀에게, 인간은 딱 두 타입이다. 타고난 성향의 문제. ‘살기 위해 먹는’ 타입과 ‘먹기 위해 사는’ 타입. 자신은 ‘먹기 위해 사는’ 부류라고 커밍아웃한 그녀는, 각 타입별 성격 분석까지 해 댄다. 전자가 공상벽이 있는 염세주의적 경향의 철학자에 많다면, 후자는 낙천적이고 인생을 즐기려는 현실주의자가 많단다. 아, 나는 어딜까, 생각해보니, 나 역시도 후자다. ‘잘’ 먹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미래의 불안을 담보로 현재를 유보할 생각이 없으니까.


음식을 통한 사람읽기는 또 가지를 친다. 그것이 그런데, 그럴듯하다. 러시아 주요 인사들의 통역으로 동행하면서 그녀는 세계사의 변혁에 중요한 위치를 지닌 인사들의 먹는 방식과 정치스타일을 비교한다. 오호, 어쩌면 이것은 비약하자면 음식이 만들어낸 세계사의 변혁이 아닐까. 리가초프, 고르바초프, 옐친의 음식 취향이 그것인데, 그들 각자의 낯선 음식에 대한 반응과 정치에 대한 혁신성이 정비례한다는 사실.

물론, 아까도 언급했지만, 히틀러가 채식주의자이듯, 보수적인 식생활을 즐기는 혁명가도 있을 터이며, 희한한 음식을 즐기는 보수정치가도 있다는 것을 마리 여사는 간과하지 않는다. 어쨌든 한 번 따져보고 싶더라. 내 음식취향과 정치적 입장은 어떻게 매칭이 되는지 살펴보고선, 문득 궁금해졌다. 이 나라의 가장 큰 쥐구멍에 서식하는 대왕쥐(?)는 어떤 음식취향을 갖고 있는지, 한식 세계화를 부르짖는 여사쥐(?)는 진짜 제대로 먹을 줄 아는지.
 
‘맞아, 맞아’, 손뼉 치며 고갤 끄덕인 부분이었다. 음식에 대한 선택이 한 사람을 드러내거나 보여주는 창이 되겠구나. “음식은 자기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처음 보는 음식을 먹을 때는 무의식적으로 본성이 나온다. 그 사람의 호기심과 경계심 사이의 균형감각이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미지의 것에 얼마나 마음을 열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리트머스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p.191) 혈액형 놀이가 식상하다면, 이젠 음식으로 놀이할 수 있는 방법도 있겠다. 빙고.

다만, 나고 자란 환경과 문화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순 없다.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극한 상황에서, 인육까지는 아니더라도 먹어본 적이 없는 동물을 입에 댈 수 있는지 여부는 개인의 성향보다는 태어나 자란 문화에 좌우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본다.”(p.119)

그녀는 음식을 통해 사람을 아는 것에서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찾는 사유까지 나간다. 그것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 흥미로웠다.(사실, 전혀 논리적이진 않다.) 말하자면, 그녀는 ‘푸드평화주의자’인 셈인데, 어떻게든 세계평화를 바라는 그녀의 마음이 음식을 통해 투영된 듯하다. 그녀는 다른 자연 조건,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식생활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 음식을 ‘맛없다’고 잘라 말하는 것은 오만불손임을 잘 알면서도, 영국과 미국 음식을 혹평한다. “이런 변변찮은 음식을 먹고 자란 사람들은 세계 각지 어디로 파견되든 먹는 것에 불만을 품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다.”(p.210)

이에 엄청난 비약일지라도, “맛없는 요리, 이것이 영국이나 미국으로 하여금 세계를 제패하게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영국이나 미국 요리가 맛있어진다면 세계가 좀더 평화로워질지 모르겠다.”(p.210) 찬성. 동감. 한 표.

『미식견문록』이 신났던 것은, 음식문화에 대한 세계의 확대 덕분이었다. 전채부터 수프, 메인요리, 치즈, 디저트 순으로 음식이 한 접시씩 나오는 것이 프랑스가 아닌 러시아식 ‘서비스’였단다. 오호, 그런 일이! 토마토가 처음엔 그저 관상용이었고, 감자는 악마의 음식이라며 외면당했다는 ‘굴욕의 역사’라니. 지금의 서양 요리를 봐라. 토마토나 감자가 없는 게 말이 되나. 그만큼 미각은 보수적이라는 말도 되렷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미각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새로운 맛을 만나게 되면, 미각은 시간을 두고 극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 아, 우리의 전통음식은 과연 어떨까.

터키꿀엿보다 맛있었던, 천상의 맛이었던, 할바를 통해 그녀는 이리 말했다.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유라시아 대륙이 여러 유목민이나 상인들로 맺어져 있던 정경이 눈앞에 어린다.”(p.93) 음식을 통해 연결되는 세계라니, 근사하다. 내게, 공정무역이 그렇고, 친환경․유기농이 그랬듯이, 세계는 그렇게 잇닿아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마리 여사가 그렇게 방점을 찍어주시는구나.

무엇보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권력자의 서슬 퍼런 으름장보다 더 강력했던, 러시아 최초의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데카브리스트, 이상주의 로맨티스트 귀족 청년들의 음식 혁명이었다. 표트르 대제도 못한 감자 보급을 그들은 해냈다. 농민들의 식생활, 전 세계의 음식에 그들이 미친 영향이라니. 체 게바라보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에 준하는 관심을 주어줘야 하지 않을까.

“거창한 봉기보다. 이상주의 로맨티스트 귀족 청년들이 험난한 현실에 직면해 꺾이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깨달음으로써 자신들의 이상을 관철한 이야기에 나는 매료된다. 마치 땅속에서 열리는 감자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깊은 맛이 우러난다.”(pp.75~76)


마리 여사의 『미식견문록』은 혀의 미뢰나 코가 판별하는 음식의 향미만을 서술하지 않는다. 나로 말하자면, 세계를 넓히는 경험과도 같았다. 음식이 사람과,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서술이었다고나 할까. 그 음식 틈새로 드러나는 세계에 대한 사유가 음식 그 이상의 음식, 미식 그 이상의 미식을 보여줬다. 아마 음식에 대한 촉수가 조금 더 예민해질 것이고, 그것이 먹기 위한 내 삶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 것 같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머리에 맴도는 이것. 고도의 정보기술사회임을 내세우는 지금, 나는 그 ‘고도’에 의문을 품는다. 인간 삶도 과연 고도에 도달하고 있는지. 첨단 기술이 판을 치지만, 그것이 누구나 배 곪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고 있는지. 의심과 의혹이 토핑처럼 뿌려진 음식을 먹고 불안해하는 지금에, 누구나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어디에 있을까.

마리 여사는 농업을 천시함으로써, ‘누구나 배불리 빵을 먹을 수 있는 사회’라는 이상에 모순적인 형태를 보인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은 붕괴했고, 지옥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농민들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준 일본도 지옥에 떨어질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단다. 한국도 마찬가지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지옥행 열차를 타고 있는 셈인데, 열차를 되돌리기 위해, 아니 최소한 늦추기 위해서라도, 나는, 우리는 어떻게 음식을 만나야할까.
 
에잇, 모르겠다. 어렵게 생각말자. 단순명료하게 내린 나의 결론. ‘좋은’ 음식 만나면 ‘나눠’ 먹자. “아무튼 엄청난 먹보가 많은 우리 친지들은 맛있는 음식을 발견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먹이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다. 또 그것이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p.174)

나는 그렇게 행복 하고 싶다. 미식이 별건가. 미식가가 별건가. 나는 侎食(어루만질 미, 밥 식)할 것이다. 내 주변을, 작지만 내가 품은 세계를 어루만질 수 있는, 그런 섭생을 하고 싶다. 아, 역시 세계는 넓고 먹을 것은 많구나. 마리 여사가 생전에 한 번 음식이라도 나눌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라도 먹는 것과 산다는 것에 대한 통찰을 알려줘서 참 고맙다.    

참, 글의 ‘서곡’으로 제시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에 대한 답을 냈다고, 최근 영국 과학자들이 발표했다. 그들은 ‘닭이 먼저’라며, 달걀 껍질이 형성되는 과정을 밝혀내면서 달걀이 닭의 난소에서만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했단다. 글쎄, 마리 여사가 이 기사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아마, 달걀이 잔뜩 들어간 카스텔라를 먹으면서 ‘집 잃은 닭도 한 번 키워볼까?’라고 말했을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