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종드 쭌/무비일락

'사회적' 고아들의 시대

by 낭만_커피 2009. 12. 19.

서울독립영화제2009 폐막작,

두 편의 단편, <남매의 집>과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감상.

공통점이라면, 주인공을 감싸주고 안아줄 수 있는 존재의 부재.

그들은 어떻게든 '사회적' 고아들이다. 우리의 지금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닿을 수 없는 곳(김재원 감독)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적 풍경이 펼쳐진다. 엄마와 아들딸로 구성된 가족은 고시원 쪽방에 살고 있다.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스무 살 진섭이다. 몸이 아파 일을 할 수 없는 엄마와 다섯 살 동생. 아버지는 없다. 10여 년 전 가족을 버리고(어떤 이유든 있었겠지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나갔다. 

새벽 전단지를 돌리는 것부터 주유소 일을 하면서 진섭은 힘겨운 스무 살을 버티고 있다. 그 고단함은 그의 표정에서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스무 살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감, 청춘의 활기라곤 없다. 친구와 시덥잖게 농담따먹기를 하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랄까.   

그런 진섭에게 입영통지서가 날아온다. 병무청을 찾아 생계형 면제를 알아볼 수밖에 없는 상황. 아픈 엄마의 진단서를 떼오란다. 검진비용만 백만원이 넘는 거금이지만, 어떻게든 떼야만 한다. 병원은 돈 없는 자에게 냉담하고 어떤 사정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환자의 병은 곧 돈으로 치환되는 기제일뿐.

친구에게 돈을 빌려 가까스로 처리하지만, 서류상 남아 있는 아버지가 문제다. 없는 아버지까지 찾아내란다. 서류상으로 처리가 안 된단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는, 없는 사람들의 사정까지 고려하지 않는다. 국가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얼떨결에 '없는' 아버지를 죽이라고까지 말하는 병무청의 무심함. 아버지를 찾아나선 진섭 앞에 병든 아버지가 있다. 그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진섭의 선택은.

왜, 제목이 '닿을 수 없는 곳'이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국가는 아무 것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국가의 존재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국가는 이제, 그냥 기업이니까. 대통령이 CEO인 세상에 말이다. 묻고 싶다. 비가 오면 피하게 해주는, 감싸고 위로하는 존재는, 그저 힘 없는 개인들의 몫일 뿐이냐. 진섭의 막막한 눈빛이 쉬이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남매의 집(조성희 감독)

한 눈에 보기에도 가난을 등에 업은 반 지하의 집. 아버지, 어머니도 없다. 남매만 덩그러니 있는 집. 동생은 오빠에게 한복도 자랑하고 싶지만, 오빠는 빨간펜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숙제를 마쳐야 한다. 과연 빨간펜 선생님이 올까 싶지만.

언제부터 아버지, 어머니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줘선 안 된다는 아버지의 당부만 남아 있다. 남매는 밖에도 나가지 않고 오로지 반지하의 집에서만 모든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두들기고, 감언이설로 남매를 꼬드긴다. 물만 먹겠다는 조건으로 괴한들은, 들이닥친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괴한 외계적 행동들.

‘알지 못함’에서 오는 두려움과 불안을 표현하려 했다는 감독의 의도처럼, 소년은 그 기괴한 일들이 꿈같다. 고립에서 오는 인간의식이 어떻게 똬리를 틀고 무한 증식하는지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눈에는 고아처럼 내버려진 남매의 무기력함이 약탈자를 맞이한 지금 우리의 모습 같아서 가슴이 아렸다. 고아들의 시절, 부모 없는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