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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하늘 아래 새로운 영화가 있다?

by 낭만_커피 2009. 12. 14.

이번 서독제2009의 반가운 프로그램 중의 하나는, 필리핀 독립영화 특별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이면서, 왠지 모를 친숙함이 느껴지는 나라. 필리핀을 다녀온(주로 신혼여행) 친구들의 이야기 때문일까, 아니면 필리핀 네그로스섬 농민들이 유기농으로 재배한 공정무역 설탕 '마스코바도'를 종종 접하기 때문일까.


모르긴 몰라도,

나는 이 미지의 나라산 영화가 궁금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인디펜던시아>.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됐나본데, 영화평론가인 허문영의 이야기도 나를 솔깃하게 만들었으니까. (☞ 여기,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있다

글쎄, 이 영화 <인디펜던시아>는 완전히 새로운 영화적 신세계였다. 실험영화도 아닌 것이, 놀라움과 부담감을 한꺼번에 안겨준. 사실 이 영활 어떻게 말해야할지, 아직 모르겠다. 

 

 영화 시작 전, 감독과 영화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감독 라야 마틴은 스물 다섯의 청년이라고 했다. 1984년생.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볼수록 나는 그 스물 다섯이라는 나이가 밟혔다. 기록되지 못한 필리핀 식민역사를 삼부작 형태로 만들고 있다는 젊은 감독. <인디펜던시아>는 그 두 번째 결과물이라는데, 그런 의도도 다소 놀랍지만, 그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메우는 상상력과 영화적 표현은 더욱 놀랍다. 난 이런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 영화 덕분에 필리핀이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역사도 알게 됐다. 이후에도 미국과 일본의 우산 아래 식민의 핍박을 받았다는 그 역사. 하지만, 영화는 그런 거대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는다. 그런 난장판 같은 시대의 한 자락에 위치한 삼대가 숲 속에서 일구는 삶이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의 전부다.

별 다른 대사도 없다. 숲에 버려진 움막을 개조해서 사는 어머니와 아들. 다른 것보다 "서로를 믿을 것"을 강조했을 뿐. 그냥 먹고 자고 살아간다. 미군에게 강간당한 여인이 새 식구가 되고, 어머니가 죽고 아들이 태어나 흘러가는 세월.

시종일관 흑백으로 진행되면서 무성영화와 뉴스 릴을 연상시키는 이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는  예술작품 같다.  그것은 아름다움이고, 그에 삽입된 숲 속의 효과음도 이에 조응한다. 빛이 만드는 몽타주도 때론 황홀하다. 이것이 나중에는 비극의 전조처럼 느껴지긴 해도.  

아직도 궁금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군에 쫓겨 절벽에 도달한 아이의 옷이 빨간색으로 변한 것은 무엇을 의도했기 때문이었을까. 흑백에서 벗어난 그 붉은 강렬함. 삼대에 걸친 한 가족사를 통해 식민시대를 압축한 스물 다섯 감독의 재능이 놀라울 뿐이다.

이야기에 몰입한다면 심심하기 그지 없겠다. 나도 잠깐 졸았으니까. 과히 당혹스러운 영화다. 라야 마틴은 올해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이 영화를 선보이면서,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그리고 영화를 위해 죽을 수 있기를 원했다"고 말했단다. 손발이 오그라들고야 말 발언이지만, 허문영 평론가는 영화를 보고 그의 말이 주문처럼 머리에 맴돈다고 했다. 그리고선 이 영화는 순결한 순교의 영화라고 표현을 했다.

굳이 종교적인 의미를 갖다 붙일 필요는 없겠다. 영화는 선동이나 선전도 아니니까.  장담하건대, <인디펜던시아>는 극장에 걸리거나 DVD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더 기억에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별점을 세 개에 택한 것은, 어쩔 수없는 절충안이었다. 별 다섯과 하나 사이를 오간, 당황스러움의 절충안.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아직도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