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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레터 for U

의사들의 세계가 나를 붙잡다...

by 낭만_커피 2007. 2. 1.

브라운관에 병원이 차고 넘친다. 어쩌다 연초부터 세 드라마에 '꽂혔다'. <하얀 거탑> <외과의사 봉달희> <그레이 아나토미>. 공교롭게 병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다. 거참 신기할 따름이다. 이전의 <종합병원> <의가형제> 등의 일부 '메디컬 드라마'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갠적으로는 관심이 없어 제대로 보지도 않았더랬다. 더구나 병원만 가면 병원 특유의 우울함과 아픈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걸려 병원을 빨리 뛰쳐나오고 싶어하는 내가 어인 일로...

더구나 병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의사가 절대자로, 대부분의 환자는 그 절대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절대 복종하는 신자가 돼야 한다. 의사와 환자 사이엔 그렇게 절로 권력관계가 형성된다(꼭 부합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환자 나름의 스타일이라구 해 두자). 난 이런 관계가 익숙지 않고 그닥 달갑지 않다. 그렇지 않은 의사도 간혹 있지만 대개의 의사들은 친절하다기보다 권위적이고, 환자를 향한 배려가 깊지 않다,고 느끼게 만든다.

어쨌든 그런 내가 브라운관을 통해 병원을 골똘히 보고 있다.요즘의 병원(을 무대로 한) 드라마는 좀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 특히나 <하얀 거탑>이 그렇다. 어정쩡한 로맨스의 기운도, 의료사건을 중심으로 한 공방이 없다. '수술배틀'과 '선거배틀'의 긴장감도 그렇거니와, '굴욕정길'의 등장도 재밌다. 무엇보다 그곳엔 야망과 권력, 인간들의 적나라한 관계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 병원은 그저 무대이자 장소일 뿐이다. 병원 아닌 다른 무대를 대입시켜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 인간들이 사는 곳, 이른바 '문명화된' 인간들의 행태는 사실 엇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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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거탑>의 무대가 되고 있는 병원은 한편으로 '사악한 존재'로 상징화된 뱀들의 소굴같다. 독성이 묻은 혀를 날름거리다가 표적이 노출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이빨을 쩌억 벌리는 존재들. 뭐 권력과 야망을 향해 사정없이 덤벼드는 불나방에 비유해도 되겠다.

무엇보다 지난 주말의 이야기는 박진감 넘쳤다. 그동안 하얀 가운맨들에게 노골적인 음모와 암투가 횡행하게끔 만들었던 외과과장 투표가 있었다. 장준혁이 결국 이주완 과장의 견제를 뚫고, 노민국의 카리스마를 밀치고 과장이 됐다. 근데 그 자리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몰랐다. 곧 물러날 과장은 왜 그렇게 자신이 미는 후임자 뽑기에 골몰하는지, 과장 안되면 개원해도 충분히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면서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은 장준혁이 왜 그 자리에 연연하는지, 한자리 한다 싶은 의사들도 쪽 팔리는 거 무릅쓰고 앞뒤 안가리고 뇌물에, 돈봉투에, 회유와 협박을 밥 먹듯 하는 걸 보니 대단한 자리이다 싶기도 하구.  

물론 사실은 내가 병원을 몰라서도 있겠지만, 모든 병원의 과장 자리라구 다 그런 것도 아닐테고, 다른 직업 혹은 직장이라고 그런 이야기들이 없겠나. 외과과장은 하나의 상징적인 자리일 뿐이겠지. 더구나 최도영 같은 양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양심을 접고 출세와 영욕을 좇기보다는 품위를 지키며 자신만의 가치를 지키고 사는 그런 양반. 물론 세상은 두 갈래 길에서 고민을 평생 안고 살아가게끔 요구한다. 최도영이라고 왜 흔들리지 않겠는가.

<하얀 거탑>에서 개인적으로 심하게 거슬리는 건 -나름의 이유나 타당함은 있겠지만- 의사와 간호사들이 쫘아악 도열해서 과장을 중심으로 철저한 위계를 보여주는 회진행렬. 복도를 매운 채 한 사람을 거탑(!)으로 위엄과 권력의 도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 그림은 그저 하품나는 인간들의 병정놀이 같다. 물론 그들에겐 너무도 진지한 전쟁이겠지만.

어쩌면 지금-여기의 많은 병원 혹은 의사들에게 생명과 윤리, 환자와의 교감과 의학을 향한 열정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마냥 그저 박제된 유물일런지도 모르겠다. 의학계 뒷편에도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는 '음모배틀'이 횡행하는 정치적 무대가 마련돼 있다는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재미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나는 최도영에게 마음이 쏠린다. 무릇 의사라면 그래야한다는 명분이 아니라, 비록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는 의사 세계의 율법을 거부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세계에서나 전통 혹은 관습이라는 이름의 율법이 존재하지만, 그 세계에 속한 개인이 율법을 깨뜨리기란 당최 어렵다. 율법은 어떤 식으로든 개인을 억압하기 마련이고 개인적 욕망은 율법의 덫에서 부유하곤 한다. 최도영은 그런 타자의 율법에 갇히기보다 스스로 '무능한'(의술과는 무관한) 의사를 택했다. 인간적이고 자신의 목소리를 따르는. 물론 그 배틀이 난무하는 세계가 그를 온전히 놓아줄런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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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달희>는 어제부로 러브 모드가 새삼 부각될 분위기이긴 한데, 것과 별개로 어제 내가 찡했던 건 '좋은 의사가 돼라'는 말 한마디였다. 뇌사환자를 싣고 가던 구급차가 낭떠러지서 떨어질 위험에 처해있을 때 뇌사환자의 남편은 울 봉선생을 차밖으로 나가라고 하는데 봉선생은 엠브(수동호흡보조장치)를 붙잡고 환자를 돌보며 나가지 않는다. 사실 무서워서 나가지 못하는 거지만. 그러면서 나중에 아내를 보낸 그 남편은 우연히 봉선생을 만나 그런 말을 건넨다. '좋은' 의사가 되라고. '착한' 의사가 되라는 그 말. 지금까지 전개내용을 보면 봉달희는 그런(좋은 혹은 착한) 의사가 될 것이다.

며칠전, 내가 좋아라하는 선배로부터 받은 메일이 떠올랐다. 그 메일엔 최근 출간된 <느리게 가는 버스>(성우제)라는 책의 일부를 다뤘다. 요즘 떠들썩한 <시사저널> 기자 출신의, 소설가 성석제씨의 동생된다는 양반이 썼다는 그 책의 부제는 '캐나다에서 바라본 세상'이다.

선배는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캐나다로 이민간 저자의 청각장애 아들이 수술받고 청력을 회복하는 과정이 잔잔하고 감동적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의술이라면 한국의 수준이 캐나다에 뒤질 것이 없다. 사람을 존중하고, 특히 장애인이나 환자와 같은 약자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배려하는 전문가들의 마음과 태도, 바로 이것을 느끼고 배우라는 것이다."

캐나다의 환자 중심 의료 시스템- 시스템이라기보다는 일하는 방식인 것이, 글쓴이가 받은 감동의 거의 모든 게 무슨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가 아니라 의료진과 지원 인력의 협업, 그리고 이들과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와의 만남과 대화에서 받은 것이었으므로- 을 알고 싶다면 직접 읽어야 합니다. 감동적입니다..


선배는 이어서 저자가 한국에 있을 때 저자의 아들에게 청각장애 판정을 내린 의사를 얘기하는 대목을 전했다.


...1994년 6월, 서울의 유명한 대학병원 이비인후과 의사는 며칠 전 청력검사를 받은, 채 두 살도 먹지 않은 시경이에게 청각장애라는 판정을 내렸다. 병원의 과장이라는 그분은 "자동차 경적 소리 정도나 들을까, 그 이상은 못 듣는다"고 했다.

우리는 너무 놀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눈물을 뿌리며 쩔쩔맸다. 그는 "방법이 없다"며 "보청기를 끼면 조금은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의사의 무표정과 무뚝뚝함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길을 열어준 사람은 놀랍게도 보청기업자였다...

청각장애 판정을 수없이 내리는 의사는 여타의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알기를 원치 않는 것 같았다. 보청기 기술자나 특수교육의 세계는 자기네가 지닌 전문성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낮은 수준이어서 알 필요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낮은 수준으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현재 기자를 하고 있는 선배는 끝을 이렇게 맺었다. 실제 선배는 늘 치열하게 고민하고 학습한다. 후배가 절로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끔 한다.


...고민입니다. 제가 하는 일도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일까요. 그렇게 해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소개된 적도 있다.
캐나다 이민 상품 대박날 만도 하지


그런 한편으로 현재 한 종합병원에서 의사를 하고 있는 친구가 생각났다. 녀석이 의사시험에 합격하고 보건의로 가 있는 동안 결혼할 때 내 마음을 담아 보냈던 한 편지. 의학 세계를 엿보면서 다시 떠올린 영화 속의 한 의사. 양조위가 연기한 '유문'이라는 의사. 녀석을 오랜만에 조만간 한번 봐야할 것 같다. 장준혁, 최도영, 봉달희, 안중근... 과연 어떤 의사가 돼 있을지 궁금해졌다.

C에게


여름이 익어가는군. 며칠 남지 않은 결혼 준비는 거의 마무리단계에 돌입했겠지? 의사 시험 합격에 이어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달려온 자네의 행보에 다소 놀라기도 했다네. 지금 객지에서 보건의 생활을 하고 있는 자네의 일상도 궁금하군.


자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건 실로 십 수 년만의 일인 듯 싶군. 글쎄 첫 인연줄을 당긴 이후 이십 몇 년동안 자네와 편지를 교환한 기억이 그닥 없네만 이십대 어느 시절, 자네에게 편지를 날렸던 머나먼 기억이 있군.


그 놀이터, 기억나는가? 우리 사이에 있었던 그 놀이터. 그 어린 시절 자네와 나를 연결해주던 그 놀이터는 지금 잘 있는지 모르겠군. 그 조그맣던 아이가 훌쩍 커서 사람의 몸과 생명을 다루는 청년 의사가 돼었다니. 세월은 그렇게 우리 곁을 관통했나보이. 서로 가는 길도 다르고 생각의 차이도 있지만 우리는 그 ‘놀이터의 추억’을 공유하지 않는가. 그것만으로 충분한 게지...


언젠가 자네가 의학도로서 길을 걷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었지. 어릴 때 자네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 기억은 삭제돼 있지만 하얀 가운을 입은 자네 모습이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들었나보이. 비록 어릴 적 의사 앞에선 늘 ‘선생님’을 붙이며 그 권위에 눌렸던 기억 앞에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 당시 의사 친구를 뒀다는 자부심도 은근히 있었던 것 같군.


의사라 의사... 그러고 보니 자네 입을 통해 ‘그 의사가 무엇인지’ ‘의사는 무엇으로 사는지’ ‘자네가 지닌 의사로서의 정체성과 직업관은 어떤지’ 들어보질 못했군.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모처럼 만나면 늘 술이나 퍼마신 탓인가...^^;;;


그러고 보니 내가 일상에서 접했던 의사들과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통해 만났던 의사와는 늘 괴리감이 있었던 것 같군. 자네는 과연 어디에 속하게 될까. 세월이 흐른 뒤 자네가 여전히 그 길을 걷고 있을 때, 자넨 여느 일상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의사 ‘선생님’일까, 아님 빛을 통해 투사되거나 책에 나왔던, 세상에 빛과 열을 전파하는 ‘의사’ 선생님일까.


10년전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듯 10년을 다시 흘려보낸 후 자네의 모습을 그리기도 여의치 않군. 솔직히 말하자면 환자를 긍휼(矜恤)히 여기고 온갖 친절과 성심을 다해 사람과 병을 다스리던 허준 의원의 이야기는 책이나 브라운관 속에서나 가능한 얘기지. 어디 그게 천민자본주의가 창궐하는 이 땅에 가능키나 한 얘기겠는가.


또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그냥 국기에 대한 경례나 맹세마냥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겉치레로 전락한 건 아닌지 의심도 해보네. 세상은 굳이 내가 알려고 하지 않아도 너무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생각하’게 해 주었거든. 물론 정서적 견해에 불과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말일세.


아, 괜히 사설이 길었군. 자네에게 이렇게 글을 날리는 건, 전문의도 됐겠다, 결혼도 하겠다, 친구의 앞길을 축복하고 바른 항해를 바라는 충정에서지. 연달아 나온 자네의 기쁜 소식 앞에 문득 한 영화가 스쳐가서 말이야. 어쩌면 세상에 없을 법한, 혹은 세상에 있으면 좋을 법한 그런 의사의 이야기. 오래전 이 영화를 보고 너무 좋아서 포스터도 사서 방에 붙이고 웃음 짓던 기억이 나는군. 물론 자네는 이 영화를 봤는지 모르겠지만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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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를 다룬 영화들이 몇몇 있었지만 내게는 『유망의생』이 가장 좋았고 인상이 깊었지. 제목은 ‘떠돌이의사’라는 뜻의 사자성어라는데 정확한 건 알 수가 없군.


영화에서 홍콩배우 양조위가 분한 유문은 특이한 의사였다네. 다른 의사들처럼 명성을 바라거나 안정적으로 살지 않는 이단아. 한 창녀촌에 진료소를 차리고,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면서 기타를 치는 낭만파. 그리고 고독함을 코믹함으로 치환하고 사는 사람.


그 곳은 여느 빈민가들이 그러하듯 악다귀 혹은 지지리 궁상처럼 제각기 사연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네. 한마디로 소외받는 이들의 집합소에서 유문은 사회의 ‘인정’이나 ‘명성’따위와 담을 쌓은 채 옛사랑을 추억하며 의술을 베풀며 살아가지.


잡다하게 얽힌 그 풍경 속에서 유문의 일상은 미소와 눈물을 뒤범벅한 이야기들로 차고 넘친다네. 유문을 존경하고 따르는 신출내기 의사와 시한부인생을 사는 여자의 사랑, 한 창녀와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좌충우돌 경찰관 등이 코미디를 연출하는 한편 사랑의 아픔과 헤어짐에 대한 슬픔을 묘사하지. 다양하고 복잡다단한 형태의 삶 속에서 유문은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길을 걸어간다네.


의사는 신이 아니고 단지 고장난 시계를 고치는 수리공이나 신발고치는 사람과 다름없다는 소박한 그의 말. 평범하기 그지없지만 그 안에는 몸뿐 아니라 상처받은 영혼까지 치료하고 위로하는 역할이 바로 의사란 것을 말해주는 듯 하더군.


영화 속 유문의 행보는 이를 뚜렷하게 각인시켜주지. 그는 대학시절 촉망받는 의학도였으나 우연한 의료사고를 자신이 덮어쓰는 통에 의사 자격증을 따지 못해 사창가에서 보건증이나 갱신해주는 ‘돌팔이’(?)가 되지. 반면 다른 한 친구는 전문의로 명성을 떨치고 돈을 긁어모으는 이 운명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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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구도는 너무 뻔하지 않나. ‘착한’ 돌팔이 의사와 ‘나쁜’ 전도유망 의사. 어떤 과정을 겪고 어떻게 결말이 날지도 빤하지 않은가 말일세. 명성을 포기하는 대신 진정한 의술을 택한 유문과 의사로서의 재능보다 더 큰 명성을 잡기에 혈안이 된 직업인 의사 사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누구 손을 들겠는가.

그런데도 이 영화가 가진 힘은 바로 인간미와 선의였다네. 선의만으로 똘똘 뭉친 듯 착하기 그지없는, 낭만이 넘치고 사랑으로 엮이는,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주는...


재미있는 것 중의 전도유망 의사는 친구의 재능을 이용하긴 했지만, 그것으로 유문에게 해를 입히려는 의도도 없었고 유문 역시 친구의 그런 의도를 충분히 알고 있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다네. 또한 둘 사이의 애증관계도 묘하게 얽혀있고 말일세. 유문의 사랑하는 여자가 전도유망 의사에게 시집갔고 결국은 암으로 저 멀리 떠나보내고 말았더군.


두 사람 어쩌면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네. 재능을 가진 천재와 그를 질투하고 명성을 차지하는데 혈안이 된 모략가. 그럼에도 골치 아픈 갈등구조없이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이야기의 흐름은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다네.


한편으로는 어쩌면 영화다운 것이지. 어딜 가나 위선과 허위가 판치고 선의는 이내 씹히고 마는 것이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땅덩어리,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불만이랄 것도 없지. 세상이 이미 그렇게 설계가 돼 있었는 걸 어떡하겠는가. 다만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을 통해 ‘아, 저런 것도 있구나’ 혹은 ‘저 어딘가엔 저런 모습도 있겠지’하는 희망의 빛깔을 심어주면 그만인 것을...


 어쨌든 두 사람은 신경전을 계속 벌이지만 그 황야의 결투 따위 일상의 곁가지로 치부하고 유유자적하게 자신만의 스텝을 밟는 유문을 보는 건 유쾌했다네. 그 깃털같은 가벼움 속에서 자신의 철학과 선의를 전하는 그 자연스러움. 어떤 사연이 얽히고 설켰든, “의사는 살릴 수 있는 병자는 끝까지 치료해야지. 나는 자네가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지 도우려 애썼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자 문제가 뭐지?”라는 유문의 이야기. 난 어쩌면 돌팔이에게서 ‘의사’선생님을 봤다는 생각이 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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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로서 소망한다네. 누군가 얘기했듯 환자 앞에 절대 친절하고 인간미를 보여줬음 좋겠군. 의사는 환자 앞에 서면 절대적 권위를 지닌 존재라네. 반면 환자는 병의 상태를 떠나 절대적 불안 상태에 있기 마련이고. 자네는 사람의 몸과 생명을 다루는 ‘특별한’ 임무를 지니고 있는 만큼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무심히 대하지 않기를...

다시 한번 결혼, 축하하네. 그리고 앞으로 좋은 의사되길 바라네. 극중 이런 말이 나오더군. “Be a doctor and not a medical broker.” 나 역시 이 말을 자네에게 전해주고 싶네.


2003년 6월 19일 그 놀이터를 떠올리며 친구, OO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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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이 견고한 현실 세계의 율법과 전통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타자에 의해 강요된 율법이 아닌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삶에 충실할 수 있을지. 내가 꿈꾸는 세계를 온전히 꾸려나가고, 이 격변하는 세상과 역사의 한 가운데서 작은 믿음을 지켜낼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최도영과 봉달희를 통해 대리만족을 꾀하고자 하는 목적에 그들에게 빠져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