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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드 쭌/무비일락

소녀여, 네 꿈을 펼쳐라 … <슈팅 라이크 베컴>

by 낭만_커피 2008. 3. 8.

2008년 3월 8일.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한 '세계 여성의 날'. 여전한 차별과 억압이야 말해 무엇하리. 그것의 철폐를 위한 목소리도 여기저기 퍼지고, 행사들도 팡파레~ "여자라서, 행복해요"라는 소리라도 나올 것 같다고? 천만에, 그런 멍멍 짖는 냉장고 광고는 수구냉전시대의 산물. 냉장고와 여자의 행복이 대관절 무슨 관계인데, 컹.

그런데, 알다시피, 그런 목소리와 행사가 있는 날이라는 건,  여성의 지위와 권익이 아직도, 여전히, 여태까지, 마찬가지로, 열악하고 해방되지 못함이다. 해방이 어디 독립군만으로 되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건 독립군 뿐만 아니다. 레지스탕스도 있고, 뒷구녕 지원군도 있다. 그것 뿐이랴. 사기꾼도 있었고. 친일도 하는 마당에, 친남하는 것이 뭐 어렵다손. 독재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선진조국을 만들겠다는 친남정치인. 껍질만 여자지, 하는 짓보면 어쩔 수 없이 남자 같은 그 양반도 있다. (알다시피, 횡설수설이다. ^^;)

여튼, 일부 여성들만 움직인다고 될 일은 아니지. 남자들도 좀 도와줘야지. 어차피 그동안 너무 기울어 있어서, 반대쪽으로 편파적인 건, 균형을 잡는 일 아니겠어? 뭐, 남성들이 얼마나 협조해줄런지는 모르겠다만, 계속 부딪혀봐야지. 어쩌겠나. 두피부터 골수까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 박힌 사람이 많은지라.

여튼 응원하겠어. 그건, '우리', 즉 남자 혹은 여자라는 어느 한 젠더의 몫이 아닌, '사람'들의 몫 아닌가 싶어서.

한참 시간이 지난 영화인 탓에, 함량도 떨어지는 감이 있지만, 그래도 여성의 날을 맞은, 추천 영화일세. <우생순>도 좋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있지. 이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 햇수로 거의 5년 전에 쓴 글이군.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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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처럼 슛을 찬다구? 그것도 여자애가? 거기다 벌건 대낮에 허벅다리를 드러내놓고 우락부락한 사내들과 축구를 한답시고 부대낀다고? 자고로 남녀의 성적역할에 분명한 선을 그어놓으시고 방정한 품행을 강조하시는 '꼰대'들께서 들으신다면 대노할 노릇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뀐다손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고수하는 이들에게 절대 허용하지 못할 '마지노선'이 있기 마련이다.

소년소녀들의 '꿈'앞에 연유야 어떻든 이런저런 장벽이 존재하곤 한다. 이를 넘지 못하는 꿈은 거꾸러진 채로 어느 공간에서 방황하며 갈 곳 몰라 유령처럼 배회할 지도 모른다. 그러다 훌쩍 커버린 어느 날, 그 꿈의 형상이 '아차'하고 끼어들거나, '그래 그땐 그랬지'하고 자조섞인 웃음을 지어보이겠지.

그런데 말이다. 이런 후회를 끼고 살지 않으려면 모름지기 결단을 해야 한다. 장애물과 맞서 이를 '깨뜨리거나' 혹은 '구부리는(우회하는)' 것. 혹시 평생 지난 꿈만 아쉬워하다 죽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다.

<슈팅 라이크 베컴>에는, 높디높은 장벽과 마주선 한 소녀가 있다. 소녀의 꿈은, 아마 제목이 살짝 비춰주는 것처럼, 이뤄질 것이다. 다만 그 꿈의 슈팅을 향한 소녀의 여정이 쉽지는 않겠다는 예상도 가능할테고. 절묘한 포물선을 그리면서 기막히게 골문을 두드리는 베컴의 슈팅이야기만큼, 영화도 짜릿할까. 과연 베컴처럼 슈팅하고 싶은 소녀의 '무한도전'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영화는 그렇다. 소녀의 축구 이야기를 하면서 인종, 가족, 성, 사랑, 우정 등 다양한 코드들도 자연스레 녹아 든다. 어찌보면 무거울 듯한 소재지만, 영화는 심각하지 않다. 유쾌통쾌상쾌하다. 스포일러도 아닌 것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측가능하게 흐른다. 간간히 엉뚱한 (문화적) 오해들이 자잘한 웃음도 자아내고. 인도의 이국적인 음악과 전통의식 역시 충분히 관객의 눈길을 끈다. 비록 계급에 대한 이야기가 거세된 측면도 있지만, 이것마저 녹이려 했다면 과부하가 걸렸을 지도 모르겠다.

세기적인 꽃미남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 우상인 인도계 소녀 제스는 한마디로 축구에 미쳐있다. 하지만 혼자만의 꿈일 뿐 집안에서는 가당치도 않다. '여자는 …'하고 늘어지는 장광설은 성 역할에 대한 명확한 구획을 지어놓고 있다. 요리나 배우고 조신하게 있다가, 신랑 잘 만나는 것이 여자의 일생이라고 치부하는 제스의 부모에게 축구는 얼토당토않다. 차, 비디오플레이어 등 자식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함으로써 부모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자부하는 부모에게, 축구와 베컴을 향한 제스의 꿈은 한낮 백일몽일 뿐이다.

그러나 제스는 여느 십대소녀들과 다르다. 그들이 가질 법한 남자친구나 외모에 대한 관심사에서 떨어진 채 동네축구단에서 소년들과 축구공을 놓고 다투는 것이 제스다. 그런 그녀에게 우연찮게 기회가 찾아든다. 정식 여자축구단에 있는 줄스(키이라 나이틀리)의 눈에 들어 공식적으로 볼을 찰 수 있게 된 것.

더구나 젊은 시절, 부상 때문에 꿈이 꺾인 조(조너선 라이 마이어스)를 코치로 제스에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이성을 모르던 제스가 줄스와 조를 놓고 묘한 삼각관계에 빠지는 이채로움까지 곁다리로 끼어든다.  

그러나 꿈을 향한 행진이 마냥 순탄할 수만은 없다. 보수적인 전통에 사로잡힌 부모가 이를 보고 넘길 리 만무하며 결혼이 지상목표인 언니에게도 제스는 '골치덩이'다. 언니의 결혼 상대방 부모가 제스의 품행(?)을 오해하고 언니의 파혼을 선언하는 등 장벽은 겹겹이 쌓여간다. 축구나 하면 시집은 다 갔다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어머니나 대학을 가야한다고 축구로 장래성을 보장할 수 없다고 완고하게 나오던 아버지. 현실은 10대 소녀에게 너무 가혹하다.

하긴 부모 세대의 가치관으로 자식의 삶을 재단하고자 하는 행태는 비일비재하다. 껍질을 깨고 나오는 풍경 또한 스크린상에서 낯선 모습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부모로 상정되는 장애물 속에는 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인습이 똬리를 틀고 있다. 제스가 부모를 넘어서는 것이 결국 세상 곳곳에 놓인 허들을 뛰어넘는 과정과 일맥상통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여느 비즈니스적인 세계에서 인식되는 불가근불가원이기는 힘들다. 일상과 가정을 공유하는 세대간의 교차로에서 교통정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뤄져야 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는 식으로 봉합되는 건 아니다. 세대가 다른 가족, 가치관을 달리하는 사람들간 갈등 속에서 '화합과 인정'의 과정이 농축돼 있다. 어떻게 보면 보수적인 갈등의 봉합 과정이다.

축구와 가족을 놓고 고민하는 제스. 코치를 비록한 주변에서는 누차 '개인'의 삶을 종용한다. 개인을 우선시해 본 적이 없는 제스로선 고민할 수밖에 없다. 영국으로 건너온, 보수적인 인도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란 십대소녀에겐 가혹한 결정이다. 어쩌면 개인의 삶을 생각해보기엔 어린 나이였을지도 모르겠고. 소녀는 그러나, 선택을 해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 제스는 선택한다. 벤딩 슛(장애물을 피해 정확하고 강하게 날리는 슛)을 날리는 것을. 가족이라는 굴레와 여성에게 덧씌워진 비합리적인 관습이라는 장애물을 넘어,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하기로.

제스가 공을 차는 것은, 단순하게 꿈에 다가서기 위한 행동만은 아니다. 자신을 진로가 달린 중요한 축구시합에서 프리킥을 차는 제스에게 벽을 쌓고 있는 선수들은 자신을 둘러싼 가족과 친지들의 환상으로 바뀐다. 온갖 몸짓을 행하던 그들을 향해 제스가 쏘는 슈팅이 바로 '벤딩 슛'. 장애물을 깨지 않고 빙 둘러 목표에 다가서는 제스의 몸짓. 그것은 어줍잖은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과 인습을 향한 것이다.

그리고 변호사에 대한 가족의 열망을 제끼고 축구선수로 자신의 진로를 정한 제스에게 마지막 관문은 다시 가족이다. 여기서 아버지가 해결사로 나선다. 그 결단이 다소 작위적인 냄새가 나긴 하지만 당연한(!) 듯 하다. '자식에게만은 상처를 되물림하기 싫다'는 감정은 인지상정으로 여기자.  쪽박이 깨지는 한이 있어도 깨뜨릴 필요가 있다면 맞장을 떠야할 터. 편견의 '시다바리'로 있기 싫다면 '벤딩 슛'을 날릴 것. 어린 십대소녀로부터도 우린 배울 것이 충분히 있다. 밴딩 슛 날리는 법을 함께 배우자.  

그래, 제스, 부탁해!

(200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