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 최도영이 본격적으로 부각되면서 선과 악, 혹은 이상과 현실의 구도가 좀더 팽팽해지고 있는 하얀거탑. 이젠 (병원에서 벌어지는) 정치드라마에서 탈피, 법정드라마로 발을 옮기고 있다. 장준혁이냐, 최도영이냐는 감정의 시소가 벌어질 즈음이다. 누구 편을 들 것인가, 하는 문제도 부각될 터이다.
장준혁과 최도영, 당신은 어느 편인가
이제부터 본격 드러날 최도영의 행보가 '옳은' 길임을 알면서도 나는 한편으로 장준혁(일당)의 '음모'가 좌절하지 않길 바라고 있다. 그의 설득에 당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엄연한 '현실'의 외피를 둘러쓰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고문은 바라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희망'때문에 이 현실에 또 하나의 방탄복을 입히기 싫기 때문이다. 그 희망과 현실의 외줄타기 속에서 나는 하얀거탑을 올려다보고 있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 하는 이분법적 구도보다는 인간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간군상의 '찌질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같은 점과 함께 어젠 정말 눈물 팡팡 흘리면서 봤다. 마음과 관심. 숨진 권순일 환자의 부인이 내지르던 말들이 내 가슴을 후벼팠다. 자신의 남편이 죽기 전에 병원에서 마음을 보태고 관심을 보여줬다면 더 좋았지 않았겠느냐는 말. 그리고 가진 것 없는 사람 마음은 마음도 아니냐던 울부짖음.
문득 며칠 전 읽은 남재일의 '도덕적 감정'을 떠올렸다. 애덤스미스는 도덕적 행위는 이해관계를 떠난 관찰자의 위치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의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타인의 처지에 공감하는 능력(sympathy)이 선행의 토대가 된다는. 쇼펜하우어도 타인에 대한 공감 중에서 특히 고통에 공감하는 동고(同苦)의 능력을 도덕적 감정의 핵심으로 뽑았단다.
장준혁은 공감이나 동고의 능력보다 훨등히 자신을 향한 연민의 능력(narcissism)이 강한 사람이다. 그것이 자연인이라면 옳다 그르다 혹은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가 '의사'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타인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 그는 타인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감의 능력이 절대 필요한 사람이다. 에누리 없는 합리성으로 생명을 다뤄선 안되는 자리다. 그 합리성에 공감은 없다.
장준혁이 그의 사단을 도열해선 고 권순일씨의 부인에게 행한 행위는 그에게 공감의 능력이 없거나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나는 다시 한번 의사를 생각했고, 법조인들을 떠올렸다. 다른 누구보다 공감과 도덕적 감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많은 그들에게 도덕적 감정을 앗아간 아니면 심어주지 못한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남재일은 도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의 주장을 담았다. 그리고 사법고시에 문학적 감수성을 평가하는 과목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데 나는 거기에 의사시험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미국의 여성 도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연민과 공감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지를 질문했다. 그가 로스쿨에서 강의한 내용을 요약한 '시적 정의'(poetic justice, 1995)는 문학적 상상이 도덕적 감정을 키우는 밑거름이 된다고 주장을 한다. 유년 시절의 판타지가 성인이 되어서 도덕적 행위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으며 에누리 없는 합리성은 공감의 기제가 없기 때문에 도덕적 감정이 형성되지조차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판관과 시인이 일신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얀거탑을 통해 나는 이런저런 세상의, 내가 몰랐던 세상의 한 단면을 본다. 그래서 나는 하얀거탑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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