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젠 많은 또래 친구들이나 선배들과의 대화에서 점차 소외되고 있다. 아니, 내가 그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지, (주입된 것이 아닌) 자신의 욕망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그들에게 무슨 꿈이 있는지.
대신 그들은, 어디의 부동산 가격이 얼만큼 오르고 떨어졌고, 누가 어떤 집을 샀으며, 출세를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출세를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못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한다.
뭣보다, 아이들 얘기 빠지지 않는다. 자랑이든 아니든 하나 같이 전문가 나셨다. 특목고가 어떻고, 영어 유치원이 어떠하며, 이 땅의 교육 체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꼼꼼하게도 챙기신다. 오, 놀라워라. 더구나 자신의 격한 희생을 강조한다. 이 무한 경쟁의 시대에 내가 아이들을 위해 얼마나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지를 인정 받고 싶어한다. 그래, 토닥토닥.
서울에서, 대도시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고 있지 않는다는 건, 많은 이들에게 철없음의 동의어다. 아이들, 놀게 하면서 자라게 하라, 고 할라치면, 결혼도 않은 철부지의 응석(!)으로 치부한다. 니가 뭘 아냐, 이거다. 가장 보통의 존재도 그때만큼은 가장 철부지로 위치이동한다. 물론, 그들이라고 안 그러겠나. 그들도 가장 보통의 존재다. 지배세력이 조작하는 욕망에 많이 좌우되는.
내가 아는, 지금의 많은 제도권 학교는, 격한 말로 ‘사육장’이다. 사람을 사회에 적응시키고 인재를 양성한다는 명분을 들지만, 그곳에 아이들은 없다. 어른들이 구축한 세계에 어떻게 투항하는지 알려주고, 지배세력의 가치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의심하지 말며, 생각하지 말라고 주입한다. 특히 남을 눌러야 내가 산다고 가르친다. ‘경쟁 천국, 연대 지옥’.
경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배틀 로얄>은 그 말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영화다. 경악할만한 상상력으로 피로 도배질한 학창시절의 풍경을 다룬다. 극단으로 몰고간 미래상이자, 보이지 않는 총성이 난무하는 현실의 내면 풍경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어른들이 구축한 악행의 뒤틀린 결과물이 토해놓은 난장판을 묘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묘사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충격적이다. 실업자 1,000만명, 등교거부 80만명, 교내 폭력에 의한 순직교사 1,200명. 극단으로 치달은 사회상에 자신을 잃은 어른들은 위협을 느끼고 정부는 배틀 로얄(Battle Royale : BR)법이라는 무식한 법률을 제정한다. ‘신세기 교육개혁법’이라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이 법률은 전국을 통틀어 일년에 한 학급을 무작위로 선발, 무인도에서 3일동안 단 한 사람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게 한다는 내용.
겁나게 살벌하다. 학살을 교육의 이름으로 포장하다니. ‘강한 어른’을 만든다는 명분이다. ‘세상 = 정글’이란 방정식을 내놓고, 학생들을 무자비한 살인과 폭력의 현장으로 내몬다. 학생들도 얼떨결에 이 수작에 휘말린다. 복불복이다. 여기, 수학여행길에 나섰다 얼떨결에 무인도로 끌려온 42명의 학생들이 황당한 현실에 직면한다.
거기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처럼 말이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틀에 자신을 끼워맞춰야 하는 아이들. 영화 속 아이들, 끔찍한 살인극의 무대에 서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무기를 들고 서바이벌 게임의 아이콘으로 등장해야 하는 그들에게 친구는 없다. 친구는 곧, 장애물이다. 친구의 선택마저 조정하려는 지금의 많은 부모들과 무엇이 다른가. 장애물이 된다면 가차 없이 내치도록, 아이들의 감정마저 조절하려는 어른들.
비정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지독한 현실과 맞대면해야 하는 그들은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무기를 들고 나선다. “오늘, 처음으로 친구를 죽였다”는 섬뜩한 영화 카피가 무차별하게 적용되는 순간이다. 자, 죽일 것이냐, 죽을 것이냐. 선택은 하나다. 대체 뭐 이런 것이 있냐고 싶겠지만, 그것은 우리 현실에 이미 내재된 풍경이 아닐쏘냐.
그러니 이런 설정, 익숙하다.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야 하는 경쟁사회를 폭력과 피가 뒤범벅된 판타지로 보여주는 셈이다. 세상을 ‘정글’로 인식한 어른들은, 생존 역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곧, 서바이벌 게임과 일맥상통한다. ‘나’의 생존을 위해 ‘너’를 없애야 하는 게임. 마지막에 남는 자에게 주어지는 ‘승자(Winner)’의 작위는 곧 생존에 따른 권리이자 선물. 승자 독식의 세상. 패배하는 자는 영원히 낙오되고 죽어야 하는 세상.
현실의 정글은 피나 폭력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경쟁사를 눌러야 우리 회사가 산다. 동료를 제쳐야 승진이 보장된다. 연대나 협력은 사치다. 모든 것은 승리와 성장을 위해 복무하는 체제다. 말이 좋아 ‘윈-윈’이지, 상생의 방법을 익히지도 습득하지도 못한 포악한 사회구조는 경쟁의 승자에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패자? 그들은 존재 가치도 없는 잉여일 뿐이다. 승자 독식을 자연스레 체화한 사회, 너무도 흉악하고, 흉포하다.
더 꺼내볼까. 회사 생존을 볼모로, 무조건 돈 버는 것이 최선의 가치임을 내세우는 고용주, 사고할 겨를도 없이 몸을 굴려야 하는 피고용인. 돈에 대한 철학 같은 건 없다. 많이 버는 것이 미덕이요, 최선의 가치다. 함께 사는 법? 되물을 것이다. 혼자 잘 살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함께 잘 살아? 관계 맺는 법을 모른 채, 경쟁자로 타인을 인식해야 하는 지금의 구조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무한경쟁이 불러온 비극
경쟁 체제는 이미 현대 사회의 습속이 됐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나. 왜 우린 끝간데 없는 경쟁 구도에 편입된 채 무기력하게 끌려다니고 있을까. 개발독재시대의 성장위주 사고가 아직 유효하다고 믿는 지배세력에게 무한경쟁 구도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이다. 어차피 그들은 출발선부터 가장 보통의 존재들과 다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권력과 지배력은 세습돼야 한다. 경쟁이라는 명분으로 솎아내면 아랫것들은 불만이 없다. 그저 부모를 탓할 뿐.
<배틀 로얄>은 물리적으로 더 가혹한 방법을 쓴다. 그것을 통해 생존의 법칙을 주입한다. 극중 선생(기타노 타케시)은 말한다. “모두 필사적으로 싸워라. 그래서 살아남는 자가 가치있는 어른이 되는 거다.” 가치 있는 어른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란다. 내 가치를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겨야만 가치가 정해줄 것이라는 어른들의 세계. 최고가 되어야 한단다. 즉, 경쟁에서 이기란다. 친구를 죽여야 한단다.
<배틀 로얄>은 경쟁 체제를 극한의 폭력으로 포장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다. 물리적인 폭력이 아닌, 드러나지 않은 폭력이 더욱 폭력적일 수 있음을.
학생들은 서바이벌 게임에 투입되자마자, 살아남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친구라고 부르던 이의 목을 화살로 꿰뚫고 낫과 도끼를 휘두르며 총을 쏘아댄다. 심지어 성숙한 육체를 살육을 위한 미끼로 사용하는 여학생도 있다. 어른들이 행하는 패악을 그들은 그대로 따른다.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배운 학생들이기에 그렇게 행동한다.
죽어가던 한 소녀, 이런 말을 내뱉는다. “난 단지 빼앗는 쪽에 서고 싶었던 것 뿐이야…” 그 서늘한 한마디. 뺏고 빼앗기는 관계로 생존을 체득한 소녀. 그 같은 세상의 ‘이치’를 가르쳐준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같은 비극에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연출은 만만치 않다. 살인 현장에서 흘러나오는 ‘G선상의 아리아’와 같은 선율을 듣자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열 다섯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당시 70대의 후카사쿠 긴지 감독은 살인의 현장을 담담하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전개한다. 사실적인 폭력 묘사는 섬뜩함과 동시에 그 비극의 기원을 되짚어보게끔 만들기도 하고.
이미 고인이 된, 후카사쿠 감독이 <배틀 로얄>을 통해 어른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을 게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슈야와 노리꼬. 그들은 ‘실패한 어른’들이 짜놓은 틀에서 벗어나 ‘Run’이란 말을 건넨다.
영화의 질문은 그랬다. “어른들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믿고 더불어 사는 친구의 존재를 지우는 지금의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 때, 세상은 다시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은 아닐까. “친구로 있어줘서 고마워”라는 말이 없어지는 세상, 그것을 희망으로 품어야 하는 세상은 실로 끔찍하다.
대신 그들은, 어디의 부동산 가격이 얼만큼 오르고 떨어졌고, 누가 어떤 집을 샀으며, 출세를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출세를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못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한다.
뭣보다, 아이들 얘기 빠지지 않는다. 자랑이든 아니든 하나 같이 전문가 나셨다. 특목고가 어떻고, 영어 유치원이 어떠하며, 이 땅의 교육 체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꼼꼼하게도 챙기신다. 오, 놀라워라. 더구나 자신의 격한 희생을 강조한다. 이 무한 경쟁의 시대에 내가 아이들을 위해 얼마나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지를 인정 받고 싶어한다. 그래, 토닥토닥.
서울에서, 대도시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고 있지 않는다는 건, 많은 이들에게 철없음의 동의어다. 아이들, 놀게 하면서 자라게 하라, 고 할라치면, 결혼도 않은 철부지의 응석(!)으로 치부한다. 니가 뭘 아냐, 이거다. 가장 보통의 존재도 그때만큼은 가장 철부지로 위치이동한다. 물론, 그들이라고 안 그러겠나. 그들도 가장 보통의 존재다. 지배세력이 조작하는 욕망에 많이 좌우되는.
내가 아는, 지금의 많은 제도권 학교는, 격한 말로 ‘사육장’이다. 사람을 사회에 적응시키고 인재를 양성한다는 명분을 들지만, 그곳에 아이들은 없다. 어른들이 구축한 세계에 어떻게 투항하는지 알려주고, 지배세력의 가치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의심하지 말며, 생각하지 말라고 주입한다. 특히 남을 눌러야 내가 산다고 가르친다. ‘경쟁 천국, 연대 지옥’.
경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배틀 로얄>은 그 말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영화다. 경악할만한 상상력으로 피로 도배질한 학창시절의 풍경을 다룬다. 극단으로 몰고간 미래상이자, 보이지 않는 총성이 난무하는 현실의 내면 풍경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어른들이 구축한 악행의 뒤틀린 결과물이 토해놓은 난장판을 묘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묘사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충격적이다. 실업자 1,000만명, 등교거부 80만명, 교내 폭력에 의한 순직교사 1,200명. 극단으로 치달은 사회상에 자신을 잃은 어른들은 위협을 느끼고 정부는 배틀 로얄(Battle Royale : BR)법이라는 무식한 법률을 제정한다. ‘신세기 교육개혁법’이라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이 법률은 전국을 통틀어 일년에 한 학급을 무작위로 선발, 무인도에서 3일동안 단 한 사람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게 한다는 내용.
겁나게 살벌하다. 학살을 교육의 이름으로 포장하다니. ‘강한 어른’을 만든다는 명분이다. ‘세상 = 정글’이란 방정식을 내놓고, 학생들을 무자비한 살인과 폭력의 현장으로 내몬다. 학생들도 얼떨결에 이 수작에 휘말린다. 복불복이다. 여기, 수학여행길에 나섰다 얼떨결에 무인도로 끌려온 42명의 학생들이 황당한 현실에 직면한다.
거기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처럼 말이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틀에 자신을 끼워맞춰야 하는 아이들. 영화 속 아이들, 끔찍한 살인극의 무대에 서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무기를 들고 서바이벌 게임의 아이콘으로 등장해야 하는 그들에게 친구는 없다. 친구는 곧, 장애물이다. 친구의 선택마저 조정하려는 지금의 많은 부모들과 무엇이 다른가. 장애물이 된다면 가차 없이 내치도록, 아이들의 감정마저 조절하려는 어른들.
비정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지독한 현실과 맞대면해야 하는 그들은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무기를 들고 나선다. “오늘, 처음으로 친구를 죽였다”는 섬뜩한 영화 카피가 무차별하게 적용되는 순간이다. 자, 죽일 것이냐, 죽을 것이냐. 선택은 하나다. 대체 뭐 이런 것이 있냐고 싶겠지만, 그것은 우리 현실에 이미 내재된 풍경이 아닐쏘냐.
그러니 이런 설정, 익숙하다.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야 하는 경쟁사회를 폭력과 피가 뒤범벅된 판타지로 보여주는 셈이다. 세상을 ‘정글’로 인식한 어른들은, 생존 역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곧, 서바이벌 게임과 일맥상통한다. ‘나’의 생존을 위해 ‘너’를 없애야 하는 게임. 마지막에 남는 자에게 주어지는 ‘승자(Winner)’의 작위는 곧 생존에 따른 권리이자 선물. 승자 독식의 세상. 패배하는 자는 영원히 낙오되고 죽어야 하는 세상.
현실의 정글은 피나 폭력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경쟁사를 눌러야 우리 회사가 산다. 동료를 제쳐야 승진이 보장된다. 연대나 협력은 사치다. 모든 것은 승리와 성장을 위해 복무하는 체제다. 말이 좋아 ‘윈-윈’이지, 상생의 방법을 익히지도 습득하지도 못한 포악한 사회구조는 경쟁의 승자에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패자? 그들은 존재 가치도 없는 잉여일 뿐이다. 승자 독식을 자연스레 체화한 사회, 너무도 흉악하고, 흉포하다.
더 꺼내볼까. 회사 생존을 볼모로, 무조건 돈 버는 것이 최선의 가치임을 내세우는 고용주, 사고할 겨를도 없이 몸을 굴려야 하는 피고용인. 돈에 대한 철학 같은 건 없다. 많이 버는 것이 미덕이요, 최선의 가치다. 함께 사는 법? 되물을 것이다. 혼자 잘 살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함께 잘 살아? 관계 맺는 법을 모른 채, 경쟁자로 타인을 인식해야 하는 지금의 구조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무한경쟁이 불러온 비극
경쟁 체제는 이미 현대 사회의 습속이 됐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나. 왜 우린 끝간데 없는 경쟁 구도에 편입된 채 무기력하게 끌려다니고 있을까. 개발독재시대의 성장위주 사고가 아직 유효하다고 믿는 지배세력에게 무한경쟁 구도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이다. 어차피 그들은 출발선부터 가장 보통의 존재들과 다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권력과 지배력은 세습돼야 한다. 경쟁이라는 명분으로 솎아내면 아랫것들은 불만이 없다. 그저 부모를 탓할 뿐.
<배틀 로얄>은 경쟁 체제를 극한의 폭력으로 포장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다. 물리적인 폭력이 아닌, 드러나지 않은 폭력이 더욱 폭력적일 수 있음을.
학생들은 서바이벌 게임에 투입되자마자, 살아남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친구라고 부르던 이의 목을 화살로 꿰뚫고 낫과 도끼를 휘두르며 총을 쏘아댄다. 심지어 성숙한 육체를 살육을 위한 미끼로 사용하는 여학생도 있다. 어른들이 행하는 패악을 그들은 그대로 따른다.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배운 학생들이기에 그렇게 행동한다.
죽어가던 한 소녀, 이런 말을 내뱉는다. “난 단지 빼앗는 쪽에 서고 싶었던 것 뿐이야…” 그 서늘한 한마디. 뺏고 빼앗기는 관계로 생존을 체득한 소녀. 그 같은 세상의 ‘이치’를 가르쳐준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같은 비극에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연출은 만만치 않다. 살인 현장에서 흘러나오는 ‘G선상의 아리아’와 같은 선율을 듣자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열 다섯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당시 70대의 후카사쿠 긴지 감독은 살인의 현장을 담담하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전개한다. 사실적인 폭력 묘사는 섬뜩함과 동시에 그 비극의 기원을 되짚어보게끔 만들기도 하고.
이미 고인이 된, 후카사쿠 감독이 <배틀 로얄>을 통해 어른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을 게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슈야와 노리꼬. 그들은 ‘실패한 어른’들이 짜놓은 틀에서 벗어나 ‘Run’이란 말을 건넨다.
영화의 질문은 그랬다. “어른들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믿고 더불어 사는 친구의 존재를 지우는 지금의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 때, 세상은 다시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은 아닐까. “친구로 있어줘서 고마워”라는 말이 없어지는 세상, 그것을 희망으로 품어야 하는 세상은 실로 끔찍하다.
'메종드 쭌 > 무비일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인생의 영화 ①] 내 생의 알프레도 아저씨(들)에게… (0) | 2010.08.08 |
---|---|
우리에게도 일상의 판타지가 필요해 (0) | 2010.07.25 |
아이야, 너의 생각이 옳았어! (0) | 2010.07.22 |
전설 아니래도 좋아, 엽문의 진면목을 보여줘! (8) | 2010.06.28 |
상대방을 무너뜨리지 않고 손을 잡는 법 (2) | 2010.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