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서사의 힘은 의외로 세다.
아마, 로맨스와 그 합을 겨뤄본다면, 로맨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가족이 맺는 정서적 관계 등 가족간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특히나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천륜(天倫)이란 인식도 작용할테고, 부성애(父性愛)․모성애(母性愛)에 대한 신화가 강건하게 구축된 영향도 있을 테다. 당장 당신이 본 영화만 떠올려 봐라. 부모와 자식 간,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신파, 꽤나 있을 거다.
내 메신저에 등재된 사람들의 닉네임만 봐도, 이 가족 서사는 일상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다. 곧 아빠가 된다고 대문짝하게 걸어놓은 지인, 낳은 지 얼마되지 않은 아이의 모습을 묘사해놓은 지인, 아이들 이름을 나열해 놓은 지인 등등. 솔직히 그걸 보면 저리도 좋은가, 하는 생각도 들 때도 있다.
아버지(어머니)가 된다는 것.
‘새가 자유롭다는 건 날지 못하는 자의 편견’이라는 말마따나, 아이를 가져보지 않은 자에겐 피부로 와닿을 수 있는 그런 명제가 아니다. 여태 자식의 삶만 꾸려온, 내리사랑의 수혜만 받던 자의 입장에서, 그들은 다른 세상에 사는 종족이다. 물론, 그들 입장에선 내가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겠지만. ^^;
‘아이 낳기’를 시대적 사명으로, 국민의 의무로 강요(?)하는 지금 이 시대. 결혼도 못한 노총각은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고찰 없이 국가시책이 된 ‘아이 낳기’에 대해 많이 회의하지만, ‘자식이 태어날 때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찬양론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강보에 쌓인 핏줄을 향한 애틋한 심정은 교육이나 훈련의 결과이기보다 본능에 가까우리란 생각은 든다. 그 본능이 DNA유전자의 종족번식 염기서열에 의해 작동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물고기 부자는 어떤가.
픽사의 <니모를 찾아서>를 따라가 봤다. 이 영화,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아들 찾아 삼만리를 떠난 아빠의 성장사다. 불의의 사고를 아내를 잃은 홀아비 물고기 말린. 지나치게 소심하고 대양(Big Blue Sea)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소심쟁이 아버지다. 니모는 그런 말린의 유일한 혈육. 그러다 보니, 말린이 인간 세상만큼이나 험한 바다 속 생존게임의 장에서 니모를 과잉 보호하면서 울타리를 쳐두는 건 일견, 이해도 된다.
말린이 니모에게 하는 호언장담. “아빠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줄게.” 오호, 자식을 지키고 싶은 아버지의 그 마음, 부성애. 당연히 진심이겠지만, 공허한 것도 사실이다. 아니, 생각해보라. 세상은 아무 일없이 자란 아이에게 어떤 것도 해 줄 수 없다. 고개를 넘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아이들에게도 세상에서 의당 겪어야 할 통과의례가 있는 법인데! 더구나 가장 보통의 아버지인 말린이 무슨 재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준다는 말린의 말은, 허풍일 뿐더러 아이를 망치는 길처럼 들린다.
아니나다를까!
유일한 혈육을 품안에서만 키우다 학교에 보내놓고선 말린은 안심을 못한다. 니모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 무조건 자신의 말만 들으라고 한다. 아이 말은 그냥 무시한다. 그렇다고 아이가 결코 부모의 마음대로만 자라진 않는다. 호기심 충만하고 파파보이 소리를 듣기 싫은 니모. 아빠 말을 뿌리치고 세상을 유영한다. 물론 좋지 않은 일, 생길 수 있다. 니모는 열대어를 수집하는 스쿠버 다이버에게 잡히고 만다.
그리고 이젠 <니모를 찾아서>가 본격 펼쳐진다. 하나뿐인 외아들을 찾기 위한 아빠의 두근두근 울렁울렁 가슴뛰는 모험담. 소심한 새가슴 말린이 아들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상상, 그 이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대양 속으로 들어가 ‘아들 찾기’의 깃발을 높이 든다. 짜잔~ 이럴 때 으레 등장하는 동반자. 단기기억상실증에 시달리고 주위 산만하지만 인간의 언어를 읽는 도리가 이 험한 여정에 동참한다. 말린과 도리가 산 넘고 물 건너 인간까지 넘어 펼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세상은 물고기를 단련시킨다.
소심한 물고기였던 말린. 세상을 몰랐던 말린. 장애물도 많고 굴곡도 많은 아들 찾기는 한 물고기를 단련시킨다. 우물 안을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세상의 다채로운 빛깔을 본다. 바다만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하나둘 지혜를 터득하고 깨우침을 얻는다. 대양(세상)의 광활함 속에서 다양한 개체들과의 조우하면서, 니모의 마음에 한걸음 한걸음씩 접근한다.
니모와 함께 있을 땐 안온한 공간이었는데, 떨어져 있는 동안 바다의 다른 모습도 봤다. 아니 그렇게 바다가 거대한 벽으로 작용할 줄도 몰랐다. 자신이 살고 있는 바다의 모습조차 몰랐던 게다. 숱한 위험이 닥치지만, 이런 장애물들이 ‘아들을 찾아야 한다’는 말린의 의지를 막을 순 없다. 그건 당연한 결과다. 그들의 재회는 디즈니 월드의 전제이니까!
그래도 아버지는 바뀐다.
재회의 순간, 말린은 니모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너의 말이 옳았어.” 겁쟁이로, 우물 안에 갇혀있던 자신이 부끄러웠던 거다. 아이라고 어른에게 가르침을 받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때론 어른을 일깨우는 것도 아이다. <니모를 찾아서>는 그렇게도 말한다. 아빠(엄마)의 세상을 그대로 주입하고 가르치기보다 아이들의 상상력과 능력을 믿으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자. 행여나 일이 생길까 손만 꼬옥 잡고 있기보단 그 손을 놓는 순간 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될 수도 있다.
아빠(엄마)의 성장통도 때론 아이와 함께 자란다. 니모가 없어지지 않았다면, 말린이 대양을 누비고 겪을 수 있는 경험이 왔을까. 애 키우는 기쁨은 아마도 그렇게 세상을 넓히는 경험에서도 비롯되겠지. 이 영화의 감독, 스탠튼은 다섯 살배기 아들을 공원에 데려갔다가 내내 잔소리만 하는 자신을 보고 문득 이런 가슴 속 소리를 들었단다. “넌 아들과 지내는 이 소중한 시간을 완전히 망치고 있다.” 그 후 그는, 겁이 많으면 좋은 아빠가 되기 힘들다, 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니모를 찾아서>를 구상한 계기가 됐다.
그러면 ‘아이 없는 삶’은 어떤가.
아이 없으면 세계는 넓어지지 않을까. 물론 아니다. 이른바 딩크족(DINK : Double Income No Kid)이나 결혼제도에 편입하지 않고 둘이서 살아가는 것(<네 번째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의 주인공들은 ‘결혼하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맺는다!)도 하나의 선택이자 가치다. 결혼하면 꼭 아이가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은 폭력이다.
나는 가능하면, 결혼한 사람을 만나도 아이 여부를 묻지 않는다. 본인이 먼저 말하면 모를까, 그들에게 어떤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합의를 봤을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이 세상은 너무 ‘아이 중심’이다. 나는 그게 불만이다. 아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들만 아는 철딱서니 없는 사람들로 찍힐 정도로 이 땅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절대선이자 완고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삶의 방식에 대한 하나의 선택, 즉 ‘아이 낳기’가 선택일 수 있는, 각자의 취향과 선택에 대해 인정하는 풍토가 아쉽다.
한편으로 거북하다.
후세를 위해 존재한다거나 핏줄을 잇기 위해 애를 낳는 일. 무엇보다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고 살아 숨 쉬는 동안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거나, 아이가 아닌 부부(혹은 동반자)중심의 세계관을 가지는 일도 꽤나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이기적이라고? 종족 번식? 조까라 마이싱이다. 언제 그렇게 종족과 인류를 생각해 왔다고 그러나. 웃기는 짬뽕들이다. 당신은 어떤가.
어쨌든 아빠(엄마), 그리고 아이. 그 천륜에 대한 이야기는 인류사가 지속되는 한 끝이 없을 거다. 이 영화,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가 뼈대인데, 말린과 함께 다니던 도리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자식 없이 사는 삶에서 친구를 만나 대양을 누빈다는 설정으로 영화를 만들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특히 도리와 같은 독특한 캐릭터라면 충분히 얘기가 될 것 같은데, 어때 만들어 볼 생각은 없나?
아마, 로맨스와 그 합을 겨뤄본다면, 로맨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가족이 맺는 정서적 관계 등 가족간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특히나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천륜(天倫)이란 인식도 작용할테고, 부성애(父性愛)․모성애(母性愛)에 대한 신화가 강건하게 구축된 영향도 있을 테다. 당장 당신이 본 영화만 떠올려 봐라. 부모와 자식 간,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신파, 꽤나 있을 거다.
내 메신저에 등재된 사람들의 닉네임만 봐도, 이 가족 서사는 일상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다. 곧 아빠가 된다고 대문짝하게 걸어놓은 지인, 낳은 지 얼마되지 않은 아이의 모습을 묘사해놓은 지인, 아이들 이름을 나열해 놓은 지인 등등. 솔직히 그걸 보면 저리도 좋은가, 하는 생각도 들 때도 있다.
아버지(어머니)가 된다는 것.
‘새가 자유롭다는 건 날지 못하는 자의 편견’이라는 말마따나, 아이를 가져보지 않은 자에겐 피부로 와닿을 수 있는 그런 명제가 아니다. 여태 자식의 삶만 꾸려온, 내리사랑의 수혜만 받던 자의 입장에서, 그들은 다른 세상에 사는 종족이다. 물론, 그들 입장에선 내가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겠지만. ^^;
‘아이 낳기’를 시대적 사명으로, 국민의 의무로 강요(?)하는 지금 이 시대. 결혼도 못한 노총각은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고찰 없이 국가시책이 된 ‘아이 낳기’에 대해 많이 회의하지만, ‘자식이 태어날 때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찬양론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강보에 쌓인 핏줄을 향한 애틋한 심정은 교육이나 훈련의 결과이기보다 본능에 가까우리란 생각은 든다. 그 본능이 DNA유전자의 종족번식 염기서열에 의해 작동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물고기 부자는 어떤가.
픽사의 <니모를 찾아서>를 따라가 봤다. 이 영화,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아들 찾아 삼만리를 떠난 아빠의 성장사다. 불의의 사고를 아내를 잃은 홀아비 물고기 말린. 지나치게 소심하고 대양(Big Blue Sea)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소심쟁이 아버지다. 니모는 그런 말린의 유일한 혈육. 그러다 보니, 말린이 인간 세상만큼이나 험한 바다 속 생존게임의 장에서 니모를 과잉 보호하면서 울타리를 쳐두는 건 일견, 이해도 된다.
말린이 니모에게 하는 호언장담. “아빠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줄게.” 오호, 자식을 지키고 싶은 아버지의 그 마음, 부성애. 당연히 진심이겠지만, 공허한 것도 사실이다. 아니, 생각해보라. 세상은 아무 일없이 자란 아이에게 어떤 것도 해 줄 수 없다. 고개를 넘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아이들에게도 세상에서 의당 겪어야 할 통과의례가 있는 법인데! 더구나 가장 보통의 아버지인 말린이 무슨 재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준다는 말린의 말은, 허풍일 뿐더러 아이를 망치는 길처럼 들린다.
아니나다를까!
유일한 혈육을 품안에서만 키우다 학교에 보내놓고선 말린은 안심을 못한다. 니모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 무조건 자신의 말만 들으라고 한다. 아이 말은 그냥 무시한다. 그렇다고 아이가 결코 부모의 마음대로만 자라진 않는다. 호기심 충만하고 파파보이 소리를 듣기 싫은 니모. 아빠 말을 뿌리치고 세상을 유영한다. 물론 좋지 않은 일, 생길 수 있다. 니모는 열대어를 수집하는 스쿠버 다이버에게 잡히고 만다.
그리고 이젠 <니모를 찾아서>가 본격 펼쳐진다. 하나뿐인 외아들을 찾기 위한 아빠의 두근두근 울렁울렁 가슴뛰는 모험담. 소심한 새가슴 말린이 아들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상상, 그 이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대양 속으로 들어가 ‘아들 찾기’의 깃발을 높이 든다. 짜잔~ 이럴 때 으레 등장하는 동반자. 단기기억상실증에 시달리고 주위 산만하지만 인간의 언어를 읽는 도리가 이 험한 여정에 동참한다. 말린과 도리가 산 넘고 물 건너 인간까지 넘어 펼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세상은 물고기를 단련시킨다.
소심한 물고기였던 말린. 세상을 몰랐던 말린. 장애물도 많고 굴곡도 많은 아들 찾기는 한 물고기를 단련시킨다. 우물 안을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세상의 다채로운 빛깔을 본다. 바다만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하나둘 지혜를 터득하고 깨우침을 얻는다. 대양(세상)의 광활함 속에서 다양한 개체들과의 조우하면서, 니모의 마음에 한걸음 한걸음씩 접근한다.
니모와 함께 있을 땐 안온한 공간이었는데, 떨어져 있는 동안 바다의 다른 모습도 봤다. 아니 그렇게 바다가 거대한 벽으로 작용할 줄도 몰랐다. 자신이 살고 있는 바다의 모습조차 몰랐던 게다. 숱한 위험이 닥치지만, 이런 장애물들이 ‘아들을 찾아야 한다’는 말린의 의지를 막을 순 없다. 그건 당연한 결과다. 그들의 재회는 디즈니 월드의 전제이니까!
그래도 아버지는 바뀐다.
재회의 순간, 말린은 니모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너의 말이 옳았어.” 겁쟁이로, 우물 안에 갇혀있던 자신이 부끄러웠던 거다. 아이라고 어른에게 가르침을 받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때론 어른을 일깨우는 것도 아이다. <니모를 찾아서>는 그렇게도 말한다. 아빠(엄마)의 세상을 그대로 주입하고 가르치기보다 아이들의 상상력과 능력을 믿으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자. 행여나 일이 생길까 손만 꼬옥 잡고 있기보단 그 손을 놓는 순간 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될 수도 있다.
아빠(엄마)의 성장통도 때론 아이와 함께 자란다. 니모가 없어지지 않았다면, 말린이 대양을 누비고 겪을 수 있는 경험이 왔을까. 애 키우는 기쁨은 아마도 그렇게 세상을 넓히는 경험에서도 비롯되겠지. 이 영화의 감독, 스탠튼은 다섯 살배기 아들을 공원에 데려갔다가 내내 잔소리만 하는 자신을 보고 문득 이런 가슴 속 소리를 들었단다. “넌 아들과 지내는 이 소중한 시간을 완전히 망치고 있다.” 그 후 그는, 겁이 많으면 좋은 아빠가 되기 힘들다, 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니모를 찾아서>를 구상한 계기가 됐다.
그러면 ‘아이 없는 삶’은 어떤가.
아이 없으면 세계는 넓어지지 않을까. 물론 아니다. 이른바 딩크족(DINK : Double Income No Kid)이나 결혼제도에 편입하지 않고 둘이서 살아가는 것(<네 번째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의 주인공들은 ‘결혼하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맺는다!)도 하나의 선택이자 가치다. 결혼하면 꼭 아이가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은 폭력이다.
나는 가능하면, 결혼한 사람을 만나도 아이 여부를 묻지 않는다. 본인이 먼저 말하면 모를까, 그들에게 어떤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합의를 봤을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이 세상은 너무 ‘아이 중심’이다. 나는 그게 불만이다. 아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들만 아는 철딱서니 없는 사람들로 찍힐 정도로 이 땅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절대선이자 완고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삶의 방식에 대한 하나의 선택, 즉 ‘아이 낳기’가 선택일 수 있는, 각자의 취향과 선택에 대해 인정하는 풍토가 아쉽다.
한편으로 거북하다.
후세를 위해 존재한다거나 핏줄을 잇기 위해 애를 낳는 일. 무엇보다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고 살아 숨 쉬는 동안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거나, 아이가 아닌 부부(혹은 동반자)중심의 세계관을 가지는 일도 꽤나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이기적이라고? 종족 번식? 조까라 마이싱이다. 언제 그렇게 종족과 인류를 생각해 왔다고 그러나. 웃기는 짬뽕들이다. 당신은 어떤가.
어쨌든 아빠(엄마), 그리고 아이. 그 천륜에 대한 이야기는 인류사가 지속되는 한 끝이 없을 거다. 이 영화,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가 뼈대인데, 말린과 함께 다니던 도리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자식 없이 사는 삶에서 친구를 만나 대양을 누빈다는 설정으로 영화를 만들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특히 도리와 같은 독특한 캐릭터라면 충분히 얘기가 될 것 같은데, 어때 만들어 볼 생각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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