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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어리석음의 기록

[리뷰] 좋은 평전의 조건을 생각해 보다!

by 낭만_커피 2013. 9. 15.


 

좋은 평전의 조건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질문이었다. 알폰스 무하에 대한 세세하고 꼼꼼한 기록으로서 이 책은 나쁘지 않다. 기록노동과 출판노동 등에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도 익히 짐작을 할 수 있다. 저자는 감동적인 예술 작품을 만났을 때의 충격을 표현한 '스탕달 신드롬'을 거론하면서 알폰스 무하의 삶과 예술을 충실히 기술한다. 무하에 빠진 저자의 감흥도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다. 노동에 대한 평가와 결과에 대한 평가는 별개다. 내게 이 책은 알폰스 무하의 입문서 격이었는데, 저자의 감흥은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혼자 좋아서 블라블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감흥, 그 격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 채 내뱉고만 있었다. 즉, 독자와의 밀당에 실패한 셈이다.

 

좋은 평전의 조건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인물의 내면 풍경을 드러내면서 그것이 시대나 당대의 사회와 어떻게 조화를 이뤘는지, 인물에 대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을 새로이 부각시키거나 비추면서 당시의 시대 배경이나 미시 생활사까지 복원해내는 것. 또 지엽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로 흥미를 자극하면서도 전체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아울러, 읽기도 좋아야 한다는 조건도 붙을 것이다. 가독성 문제인데, 전반적으로 수식어가 많고 글이 길다. 아르누보의 특징인 '장식성'을 감안한 글쓰기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저자의 감흥만 따르기엔 지루하다.  

 

뭐니뭐니해도 평전은 인물에 대한 깊은 연구가 선행되면서 인물의 철학이나 사유, 사상 등이 독자에게 잘 전달돼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같은 언어권의 사람이 유리하다. 역사와 문화 등을 공유하고 인물의 미묘한 뉘앙스까지 제대로 이해하고 붙잡아낼 수 있을 테니까. 혹자는 주석이 많아야 한다는 점도 좋은 평전의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주석을 통해 배우는 것이 의외로 많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면에서 《성공한 예술가의 초상, 알폰스 무하》는 성공적인 평전은 아닌 듯하다. 책은 때로 현실과의 접목을 위해 억지를 끌어낸다. 작가는 가령, 청년 무하의 사회 진출을 위한 출발과 오늘날 젊은이의 것을 비교한다. 이것은 범주의 오류다. 시대적 상황이나 여건이 너무 다르다. 19세기나 21세기 모두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경쟁은 치열하다'는 말을 돌고 있다며 단순 비교를 하는데, 과연 적당한 비유일까. 뭔가 지금의 청년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자극은 적절하지 못하다. 청년 무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시대와 사회적 배경과 지금 한국의 상황을 비슷하게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틈만 나면 그림 삼매경에 빠졌던 한 소년이 학창시절에 재능이 없다고 통보 받아 자신이 사랑하는 미술을 시작조차 못할 줄 알았건만, 타인들의 평가에 구속됨 없이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다 보니 결국 승승장구한 아티스트가 된 이야기"(p.20)라는 소개는 분명 흥미롭다. 안타깝게도 그런 소개만큼의 전개가 안 됐다는 점이다. 책을 읽고 훅~ 당겨서 당장 전시회도 보러갈 생각이 들 것으로 기대했다. 아니었다.

 

프랑스어로 신예술을 의미하며 19세기 최후의 예술사조를 뜻하는 '아르누보'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알폰스 무하라는 예술가를 만난 것이 소득이랄까. 아르누보의 전성시대였던 1890년~1910년이면,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 혹은 좋은 시대)'였다. 과거에 없었던 풍요와 평화로 인해 문화예술이 번창하고 우아함이 넘쳐났던 시대. 무하와 맞물려 벨 에포크의 시대상이 잘 드러나지 않은 점도 아쉬움이다.

 

성공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렸으나, 책은 '성공한 평전의 초상'으로 남지 못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고야 말았다. 전시회를 당장 가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키진 못했으나 전시회에 가면 무하가 좀 더 잘 들어올지 않을까 싶은 생각은 든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았으나, 내 느낌대로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