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 바우쉬 홈페이지 www.pina-bausch.de
피나 바우쉬의 살아 있는 몸짓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단다!
지난달 30일(2009년 6월30일), 현대무용은, 인류는 또 하나의 별을 보냈다. 향년 68세.
암 선고를 받은 지 5일 만에, 어떻게 손 써볼 도리도 없이, 그저 황망하게 안녕을 고한 예술가.
지지난주 일요일까지만 해도 무용단과 함께 무대에 섰다는 정열적인 그 예술가.
그 소식을 뒤늦게 접하자마자,
퍼뜩 든 생각은, '그의 내한공연을 볼 걸...' 하는, 어찌할 수 없는 아쉬움!
마이클 잭슨 때도 그랬지만,
나는 많은 즐거움과 감탄을 놓치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금.
동시대의 예술과 감흥을 오감으로 직접 체험하는 일만큼 가슴 벅찬 일이 있을라고.
몸의 미학에 쉬이 감탄하는 나로선,
그의 영면이 못내 아쉬울 수밖에.
눈 앞에서 한번이라도 그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면...
(피나 바우쉬는 2005년 LG아트센터에서 한국을 소재로 한 ‘러프컷’(Rough Cut)을 초연했다. 이 작품은 1986년 이탈리아 로마가 소재였던 ‘빅토르’로 시작으로 한 도시와 국가를 소재로 엮은 시리즈 작품 중의 하나다.)
뭐, 그렇다고 그의 작품을 일일이 찾아볼 정도는 아니었고,
그의 이름과 명성, 탄츠테아터(Tanztheater)에 대한 귀동냥 정도.
그리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에 삽입됐던 그녀의 몸짓이 인상적이었다.
피나 바우쉬의 열렬한 팬이었던 알모도바르 감독은,
영화의 시작과 끝에, '카페 뮐러'와 '마주르카 포고'를 삽입했다.
피나 바우쉬도 영화를 위해 '카페 뮐러'의 춤을 추기도 했다.
이것들은, 작은 우연이라면 우연인데,
얼마 전, 오래 전에 쓴 글이었던 '로테 레냐'에 대한 글을 다시 씹을 일이 있었다.
로테는 남편이자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뮤즈로서,
시대를 풍미한 목소리를 지닌 성악가였다.
그런데, 피나도 7월말 크르트 바일이 곡을 만들고 베트톨트 브레히트가 대본을 쓴,
오페라 ‘7대 죄악(The Seven Deadly Sins)’을 모스크바 체호프 국제극장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단다. 그렇게 연결되는 두 사람.
특히 당차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는 예술가였던 로테는 담배를 좋아했다.
피나도 워낙 골초였단다. 내한 공연 당시, LG아트센터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면서도 담배를 입에 떼지 않을 정도였다니. 역시나 두 사람의 공통점, 담배.
그리고 마지막 순간, 담배를 찾았다고 잘못 알려진 그 사람. 노짱.
오늘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49재.
잘 가시라. 그리하여, 슬로 굿바이에도 마침표.
피나 바우쉬 |
노 담배간지 |
로테 레냐 |
저 구름의 저편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간지빨을 내고 있을 당신들.
당신들을 생각하며, 나도 담배 한 모금 빨고 있다.
커피 한 잔에 담배 한 모금. 죽인다. 캬~~~
P.S. 지난 4월, 한 무용가 그룹인 '무아'와 인터뷰를 했었다.
그들과 얘기 도중, 우리는 피나 바우쉬를 잠깐 얘기하고 언급했다.
서연주, 안상화, 양혜선. 그들은 예뻤다. 물론 치명적일만큼은 아니었지만.ㅋㅋ
누가 제일 예뻤냐고? (흠, 그 질문하는 당신, 남자로군!ㅎㅎ)
안 가르쳐 준다. 혼자만 알고 있을란다. 캬캬.
아, 그나저나 못 다 배운 탱고를 다시 배워야 하는데...
내년 2010년의 목표 중 하나는, 탱고!
#1. 그에겐 경계가 없었다. 두려움도 없었다. 관습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무(無)를 버무려 또 하나의 예술을 빚어냈다. 맞다. 당신이 짐작하듯, 피나 바우쉬(Pina Bausch). ‘현대 무용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나 ‘두려움에 맞선 춤사위’와 같은 레떼르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는 무용과 연극, 노래, 미술의 경계를 허문 ‘탄츠테아터(Tanztheater, 극무용)’라는 새 장르를 창조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기존 질서와 권위에 저항하면서 나온 파격이었고, 혁신이었다. 탐험과 탐구의 정신 그리고 실천이 만들어낸 성취. 물론 그 덕분에 대중들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이 독일 출신의 무용가에게, 이런 찬사는 호들갑이 아닌 진실이다. “피나 바우쉬는 무용을 근본적으로 재창조해냈다. 그는 지난 50년 동안 통틀어 가장 뛰어난 혁신가중 한명이다.” 당신도, 인정하겠지?
#2. 세상은 그의 춤에 홀렸다. 그의 몸짓과 표정 하나하나에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교차했다. 사지를 드러낸 얇은 의상을 걸치고 맨발로 자유롭게 걷고 달리고 뛰고 구르며 사람들의 혼을 빼놓았던 이 사람. 창작 댄스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 역시나 맞다.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내면의 정서와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그의 몸짓은 무용의 새로운 역사였고, 새로운 예술의 창조였다. 그를 통해 사람들은 알았다. 춤이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예술임을. 그리하여, 그는 춤을 통해 세상의 인습과 관습을 뒤흔든 춤혁명가였다. 또한 자신의 춤사위로 세계와 세계를 잇고 싶었던 예술소통가였다.
두 무용가, 아니 춤꾼 얘기를 듣자니, 몸이 근질거린다고? 한번 추고 싶다고? 그래, 당당히 커밍아웃하자. 우리 몸은 애초부터 춤을 즐기게끔 설계돼 있던 거다. 우리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의 인간)’가 생래적으로 맞다. 그런데 ‘무용’이라는 타이틀은, 왜 우리와 동떨어진 것이었을까. 뭔가 신비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데, 뭔가 지상에서는 한두 발 떨어진 것 같은 뉘앙스. 무도장은 좋아도, 무용공연은 다른 세계 같은. 강수진의 발가락엔 감탄해도, 무용공연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 현실.
그랬다. 무용가들의 춤사위가 아름다울 손, 일상의 것이 될 순 없었다. 뭔가 격식을 갖추고 적절한 드레스코드를 갖춰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무용이었다. 기존 질서를 깬 혁신과 파격, 소통을 이룬 저 명망 있는 춤꾼들이 있었음에도, 지금의 무용은 뭔가 중상류층의 오소독스한 취미 혹은 ‘그들만의 리그’ 같은 괴리감.
무아, 예술친화운동의 날개짓을 하다
더구나 한국무용이나 전통무용을 들라치면, 오 마이 갓~,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 일이다. ‘무아(Mua)’는 그래서, 탄생했다. ‘Dance Explorer(춤 탐구자․탐험가)’라는 레떼르를 붙인 것도, 그런 이유다. 무용, 즉 몸의 움직임이 내뿜는 에너지를 좀더 폭넓은 대중들과 교감하지 못하는 현실. 무용계라는 울타리에서만 머물지 않고 다른 장르와 퓨전․교배하면서 대중 속의 예술을 구현할 수 없을까. 너무 진지하지 않게, 재미있고 즐겁게 무용과 예술을 논할 수 없을까.
그런 문제의식을 싹 틔운 세 명의 춤꾼들에 의해 무아는 결성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서 함께 몸의 미학을 익힌 서연주, 안상화, 양혜선은 각자 활동을 하던 와중에 “우리 즐겁게 즐기면서 대중들과 놀아보자”며 뭉쳤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타파한 예술친화운동을 펼쳐보자는 심산이었다. ‘무아’라는 이름도 그래서 나왔다. ‘무아지경(無我之境)’에서 따오기도 하고, 춤추는 아이(舞兒)가 되기도 하며, ‘내가 없다’는 뜻도 된다. 여느 예술이 그러하듯,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길 여지를 둔 이름이다.
“각자의 색깔이나 성격도 다르지만, 각기 다른 색깔이 모여서 또 다른 색깔을 보여줄 수 있잖아요. 우리도 그래요. 생활과 도시를 담고 장르의 경계를 파괴해서 무용계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퓨전스타일로 대중 속의 예술을 구현하고 싶은 거죠.” 그들에겐 무용이 이뤄지는 공간이, 무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간이 그들의 무대다. 갤러리가 될 수도 있고, 공원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거리가 될 수도 있다. 그들에겐 대중과 교감하고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오케이.
무용단 전속 등을 통해 활동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자유롭고 싶었다. 자유를 몸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아마 무용단에 있었다면, 무용계에 머물면서 한 우물을 깊게 팔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부했다. 편안하게 대중들과 호흡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공간에 맞춰진 안무를 짜고 다른 장르와의 결합을 통해 복합적으로 표현해요. 노래나 연기도 하고, 우리가 배경이 되거나 소품이 되기도 하죠. 춤이 메인이지만 다른 장르 역시 예술의 표현방법으로서 즐기면서 하고 싶어요. 그것이 대중이나 관객들과 호흡할 수 있는 길이라면요.”
공간에 녹아드는 공연을 위해
한국무용을 전공한 이력을 살려 무아가 퍼포먼스의 시발점으로 삼은 것은 ‘흥’이다. 그렇다. 신명. 상상해보라. 북치고 장구 치는 장단에 맞춰 얼쑤~하며 어깨를 들썩이고 바지저고리를 걷어 올리면서 함께 어울리는 장면. 무아가 추구하는 또 하나의 시추에이션이다. 전통, 복원, 재창조라는 다소 무거운 개념으로 접근한 지금까지의 한국무용이 아닌,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예술적 기량이 조화된 퍼포먼스.
무아는 한국무용의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면서 공간과 세상에 주목한다. 대개의 무용은, 영화관처럼 쉽게 갈 수 있는 곳에서 볼 수 없었다. 무용계 내부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접근성의 문제가 걸림돌이 되다보니 대중적인 접점을 강화하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공간은 중요한 오브제이자 예술적 자양분으로서 작동한다.
가령, 피나 바우쉬에겐 ‘도시’가 중요한 모티브였다. 한 도시에 장기 체류하면서 그 도시를 표현하는 ‘세계 도시 시리즈’를 내놓았다. 2005년에는 한국을 소재로 한 ‘러프 컷’을 서울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무아도 공간이 주는 영감에 주목한다. “공연하기 전 미리 그 장소를 가 봐요. 가서 공간을 이용하고 그 분위기를 익혀요. 관객도 한번 상상해보고요. 그래서 춤(안무)보다도 장소에 녹아드는 공연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간에 따라 콘셉트가 정해지는 거죠. 그리고 한판 놀아보는 거예요. 꼭 움직임만 갖고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소품이 될 수도 있고요. (웃음)”
그들이 만드는 예술의 새 이름, 무아
혹자는 노래할 때, 정제와 고양, 정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그런 이유로 노래는 예술가가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는 은유로 사용된다고 했다. 물론 동의하지만, 나는 몸의 미학이 주는 경이로움이나 카타르시스도 이에 못지않다고 생각한다. 춤은, 무용은, 댄스는 때론 그렇다. 사람을 홀리고, 세상을 홀리고, 우주를 홀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세계와 우주를 넓힐 수 있는 것이다. 무릇 말하자면, 춤을 잘 추면 연애도 문제없다, 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무아는 춤춰야 사는 여자들이다. 진도씻김굿 인간문화재였던 고 박병천 선생 밑에서 사사하면서 서로를 알아본 그들이었다. 서로 다른 색깔이면서도 한데 뭉치면 유독 화사해 보인다는 스승의 말씀이 어쩌면 그들이 묶이게 된 계기였다. 자유를 몸으로 표현하고 싶은 그들의 예심(藝心)은 ‘끼’라는 말로도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냥 춤추기 시작했고, 그저 죽을 때까지 추고 싶을 뿐이에요. (웃음)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아(無我)로 돌아가고 싶은 거죠. 돈도 안 받고 저잣거리에서 춤추자는 것은 아니지만, 저희들 주변에도 아직 무용을 한 번도 못 봤다는 분들이 꽤 많아요. 그런 분들과한 공간에서 호흡할 수 있으면 참 좋겠어요. 대중가요나 드라마처럼 ‘재밌네, 쟤들’이라는 얘기도 들으면서요.”
어쩌면, 그들도 한편으로 두려울 것이다. 누군들, 자신이 있던 울타리 밖으로 나와서 눈치 받아가며 활동하고 싶을까. 그러나 그 두려움은 곧, 사랑 받고 싶다는 소망의 다른 이름이다. 사랑받고 싶다는 것이 무아의 동력원이 아닐까. 창작활동을 통해, 예술적 행위를 통해 혼자가 아닌 다른 이의 존재를 느끼면서 그들은 전진해 나갈 터이니. 어쩌면 그들에게도 두려움에 맞선 춤꾼이라는 말을 언젠가 당당히 붙이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무아는 다른 장르와의 교류 또한 서서히 진행하고 있다. 다른 장르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과 모임을 갖고 서로의 장르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융화할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싶다.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길도 점점 넓어지지 않을까. 기존에 없었던 것을 만드는 것이 외롭지 않냐고? 글쎄 그들은 즐겁게 작업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힐스테이트 갤러리에서 있었던 공연, ‘MUA_Fresh Breez’도 좋은 호응을 얻었고, 앞으로도 많은 공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는 아이돌도 아닌, 이 무용전공자들에게 ‘댄스그룹’ 무아라는 이름을 붙이게 될 날도 올지 모르겠다. 그날이 오면, 정기공연을 하는 그들에게 찾아가 휘파람 한번 불어주는 센스! 감히 말을 갖다 붙이자면, 그들은 무용계의 인디춤꾼들이자, 무용계의 ‘워낭소리’요, 무용계의 ‘장기하와 얼굴들’이다.
피나 바우쉬도, 이사도로 던컨도 기존 질서나 권위만이 자신만의 ‘길’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길을 만들었고, 덕분에 예술은 자기복제가 아닌 창조와 새 역사를 빚었다. 물론 아직 무아는 걸음마 단계다. 그 걸음마가 언젠가 큰 족적이 돼도 좋고, 아니라도 좋다. 그들이 여전히 즐기고 있다면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지 아니한가.
(사진제공 | 무아)
[상상마당 기고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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