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 for U
세상 모든 아들들의 엄니 …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낭만_커피
2008. 3. 17. 18:31
'도쿄타워'. '남산타워'만큼이나, 일본 도쿄의 상징적인 건축물 혹은 랜드마크인가보다 했다. 에쿠니 가오리의 ≪도쿄타워≫에 이어, 또 다른 소설의 제목으로 등장하다니. (그러나 실은, 도서검색을 해보면, '남산타워'가 붙은 책은 없다. '서울타워'로 검색하면, 퍼즐선물이 달랑 하나 나올 뿐. 그만큼 우리가 소홀한 것이겠지. 남산타워를 배경으로 한 스토리텔링 하나 갖지 못한 문화적 척박함 같은 것.)
"우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전철 안에서 읽는 것은 위험하다"는 카피에, '그래 진짜인지 확인해 보자'는 마음과, 내 좋아라~하는 '오다기리 조'의 동명영화와 맞물린 덕에 덜컥 샀고, 읽었다. (결론적으로 난 울지 않았고, 영화 역시 관람했다. 오다기리 때문에.ㅋ)
뭐랄까.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이하 ≪도쿄타워≫)는, 자식들의, 특히 사내들의 영원한 아킬레스 건인 '엄마' 혹은 '엄니'에 대한 반성문 같았다. 더구나, 어설픈 B급 양아치짓을 일삼던 사내의 구슬픈 사모곡이자 성장기. 작가(릴리 프랭키)의 자전적인 이야기라지만, 소설 속 '나'(마사야)는 세상 거의 모든 아들들이나 다름 없다. 역시나, "남자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비로소 한 몫의 인간이 되는 거야"(p 368)라는 말도, 거의 진실이다.
그렇다. 이 책은 '인간'이 돼가는 한 남자의 성장과 가족사를 다루고 있다. 그 '인간'이 되는 길에 늘 존재하는 엄니. 면면을 보자면, '엄니'는, '나'의 절대적인 기둥이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내리사랑의 지존이고, '때때로' 등장하는 '아부지'는, 어설픈 몰염치에 가까운 한량이다. 아부지 피를 물려받은 나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발에 밟힐 만큼 자유가 굴러다니는 도쿄에서 무위도식하는 놈팽이다. 그러다 차츰 자신의 길을 찾아나서면서 엄니의 존재를 더욱 각별하게 느끼게 되지만.
≪도쿄타워≫에 대한 감흥이 남달랐다면, 아마 그것은 자신의 '엄니'에 대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자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효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 났다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엄니는 자식을 품을 수밖에 없다. 키우는 행복은 유년 시절 잠시 뿐이라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엄니는 자식을 위해 불구덩이를 지고 살아간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훌훌 털어버려도 좋으련만, 당신의 삶을 찾아도 좋으련만, 그러고보면, 자식은 또한 엄니의 아킬레스 건이기도 하다. 마침내 엄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비로소 '불효'를 통곡하며 뉘우치는 자식들의 모습, 익숙하지 않은가.
가난하다는 서글픈 자조 같은 것이 눈곱만큼도 떠돌지 않는 동네에서, 거의 '모자가정'이나 진배 없는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의 성장사도 이런 포맷이다. '필요 이상으로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필요 이하로 비춰지는' 도쿄에 와서 홀로 청년시절을 나면서, '나'는 차츰 엄니에게 좀더 다가선다. 모자간에 좋건 싫건 가장 대화를 많이 나눌 시기에 떨어진만큼, 나눌 이야기도 많다. 그러나 엄니는 오래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 순리. 또한 일에 치이면서 엄니에게 마음을 쓰는 시간도 줄어들고.
엄니는 그렇다. 어린 시절, 늘 곁에 있었고, 마음대로 그 품을 떠나 혼자 지지고볶다가 훌쩍 다시 돌아가도, 엄니는 한결 같이 자식을 품어주곤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엄니도 분명 있겠지만. '나'는 그런 엄니의 부재가 더 아프게 다가올 법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5년 동안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휴식에 들어갔었던 존 레논이 부럽고, 멋있고, 그같은 아버지의 존재방식에 동경을 품은, '나'였기 때문에. 아부지는 그닥 존재감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엄니를 한없이 이상화시키는 건 아니다. 엄니는 그저 우리들의 엄니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도쿄타워≫는 그렇게, 성장소설이다. '나'는 토로한다. "엄니는,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환한 빛을 주고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었다."(p330) 이와 함께 깨닫는다. "앞으로도 이승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저마다 그 따스한 추억을 움켜쥐고 묻어버릴 수 없는 아쉬움을 안고 하루하루를 어떻든 살아나가야 한다."(p396)
그럴 때가 있었다. 열살을 갓 넘기고,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이 마냥 두렵던 시절. 어느날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고, '엄니도 죽는다'는 것이 상상이 되자, 나는 "우왕" 울음꼭지를 켰다. 놀란 엄니가 후다닥 방에 들어왔고, "엄니가 죽는 게 싫다"는 나의 울음섞인 말에, 엄니는 가만히 날 안아주셨다. 그리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우리 OO를 두고 죽진 않아"라고 등을 토닥토닥 두들기셨다. 이제 난 그 말이 거짓인 걸 알지만, 이미 엄니의 품안에서 멀리 떨어져 나갔지만, 불효할 수밖에 운명인 것을 알지만, 가끔은 엄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아들이고 싶다.
그래도 나는, 엄니도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말썽도 가끔 부리고 속도 가끔 썩였지만,^^; 지금 이때까지, 이만큼 무사히 자라난 것에 대해서 말이다.
참, 영화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를 먼저 본 탓이려니 하는데,
소설 읽는 중에 오다기리의 얼굴이 오버랩돼서 소설읽기에 다소 지장을 받았다.
오다기리가 너무 잘생긴 탓이다!!!
내가 저 얼굴 만큼만 됐어도 엄니 속 안 썩였을텐데...^^;;;
엄니를 탓해야겠다.ㅋㅋ
그리고, 여자친구로 나온, 마츠 다카코. 정말 오랜만에 봤는데, 여전한 그 아름다움. 누구냐고? <4월 이야기>의 바로 그녀. 사월의 하얀 비 같은 그녀. 나도 저런 여친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왕 ^.^*
"우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전철 안에서 읽는 것은 위험하다"는 카피에, '그래 진짜인지 확인해 보자'는 마음과, 내 좋아라~하는 '오다기리 조'의 동명영화와 맞물린 덕에 덜컥 샀고, 읽었다. (결론적으로 난 울지 않았고, 영화 역시 관람했다. 오다기리 때문에.ㅋ)
뭐랄까.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이하 ≪도쿄타워≫)는, 자식들의, 특히 사내들의 영원한 아킬레스 건인 '엄마' 혹은 '엄니'에 대한 반성문 같았다. 더구나, 어설픈 B급 양아치짓을 일삼던 사내의 구슬픈 사모곡이자 성장기. 작가(릴리 프랭키)의 자전적인 이야기라지만, 소설 속 '나'(마사야)는 세상 거의 모든 아들들이나 다름 없다. 역시나, "남자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비로소 한 몫의 인간이 되는 거야"(p 368)라는 말도, 거의 진실이다.
그렇다. 이 책은 '인간'이 돼가는 한 남자의 성장과 가족사를 다루고 있다. 그 '인간'이 되는 길에 늘 존재하는 엄니. 면면을 보자면, '엄니'는, '나'의 절대적인 기둥이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내리사랑의 지존이고, '때때로' 등장하는 '아부지'는, 어설픈 몰염치에 가까운 한량이다. 아부지 피를 물려받은 나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발에 밟힐 만큼 자유가 굴러다니는 도쿄에서 무위도식하는 놈팽이다. 그러다 차츰 자신의 길을 찾아나서면서 엄니의 존재를 더욱 각별하게 느끼게 되지만.
≪도쿄타워≫에 대한 감흥이 남달랐다면, 아마 그것은 자신의 '엄니'에 대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자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효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 났다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엄니는 자식을 품을 수밖에 없다. 키우는 행복은 유년 시절 잠시 뿐이라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엄니는 자식을 위해 불구덩이를 지고 살아간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훌훌 털어버려도 좋으련만, 당신의 삶을 찾아도 좋으련만, 그러고보면, 자식은 또한 엄니의 아킬레스 건이기도 하다. 마침내 엄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비로소 '불효'를 통곡하며 뉘우치는 자식들의 모습, 익숙하지 않은가.
가난하다는 서글픈 자조 같은 것이 눈곱만큼도 떠돌지 않는 동네에서, 거의 '모자가정'이나 진배 없는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의 성장사도 이런 포맷이다. '필요 이상으로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필요 이하로 비춰지는' 도쿄에 와서 홀로 청년시절을 나면서, '나'는 차츰 엄니에게 좀더 다가선다. 모자간에 좋건 싫건 가장 대화를 많이 나눌 시기에 떨어진만큼, 나눌 이야기도 많다. 그러나 엄니는 오래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 순리. 또한 일에 치이면서 엄니에게 마음을 쓰는 시간도 줄어들고.
엄니는 그렇다. 어린 시절, 늘 곁에 있었고, 마음대로 그 품을 떠나 혼자 지지고볶다가 훌쩍 다시 돌아가도, 엄니는 한결 같이 자식을 품어주곤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엄니도 분명 있겠지만. '나'는 그런 엄니의 부재가 더 아프게 다가올 법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5년 동안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휴식에 들어갔었던 존 레논이 부럽고, 멋있고, 그같은 아버지의 존재방식에 동경을 품은, '나'였기 때문에. 아부지는 그닥 존재감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엄니를 한없이 이상화시키는 건 아니다. 엄니는 그저 우리들의 엄니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도쿄타워≫는 그렇게, 성장소설이다. '나'는 토로한다. "엄니는,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환한 빛을 주고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었다."(p330) 이와 함께 깨닫는다. "앞으로도 이승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저마다 그 따스한 추억을 움켜쥐고 묻어버릴 수 없는 아쉬움을 안고 하루하루를 어떻든 살아나가야 한다."(p396)
그럴 때가 있었다. 열살을 갓 넘기고,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이 마냥 두렵던 시절. 어느날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고, '엄니도 죽는다'는 것이 상상이 되자, 나는 "우왕" 울음꼭지를 켰다. 놀란 엄니가 후다닥 방에 들어왔고, "엄니가 죽는 게 싫다"는 나의 울음섞인 말에, 엄니는 가만히 날 안아주셨다. 그리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우리 OO를 두고 죽진 않아"라고 등을 토닥토닥 두들기셨다. 이제 난 그 말이 거짓인 걸 알지만, 이미 엄니의 품안에서 멀리 떨어져 나갔지만, 불효할 수밖에 운명인 것을 알지만, 가끔은 엄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아들이고 싶다.
그래도 나는, 엄니도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말썽도 가끔 부리고 속도 가끔 썩였지만,^^; 지금 이때까지, 이만큼 무사히 자라난 것에 대해서 말이다.
참, 영화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를 먼저 본 탓이려니 하는데,
소설 읽는 중에 오다기리의 얼굴이 오버랩돼서 소설읽기에 다소 지장을 받았다.
오다기리가 너무 잘생긴 탓이다!!!
내가 저 얼굴 만큼만 됐어도 엄니 속 안 썩였을텐데...^^;;;
엄니를 탓해야겠다.ㅋㅋ
그리고, 여자친구로 나온, 마츠 다카코. 정말 오랜만에 봤는데, 여전한 그 아름다움. 누구냐고? <4월 이야기>의 바로 그녀. 사월의 하얀 비 같은 그녀. 나도 저런 여친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왕 ^.^*
부록.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 개봉 전, 마케팅 차원에서 나눠줬던 휴대용 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