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종드 쭌/무비일락
마음의 흔들림, 영혼이 자유롭다는 증거… <잠수종과 나비>
낭만_커피
2008. 3. 16. 21:05
좀 지난 이야기를 할게요.
하루에, 너무 많은 죽음을 맞닥뜨릴 땐, 힘이 빠지곤 해요. 이 영화, <잠수종과 나비>를 만난 날이 그랬다죠. 80년대 내 음악감성의 한자락을 빚진 한 유명 작곡가의 죽음 소식과 선배 아버님의 부고 소식을 잇따라 듣고, 보게 된 이 영화. 영화에도 역시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죠. 종일 죽음과 직면한 하루였던 셈이죠. 영화는, 죽음에 내몰린 한 남자가 생의 마지막 순간을 투쟁하면서, 빛나는 한 순간을 창조해요. 그리고 눈을 감습니다.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불태우게 만든 동력은.
이날 눈을 감은 작곡가와 영화의 주인공에겐, 공통점이 있어요. 뭐게요? 맞아요. 창조하는 사람들. 한 사람은 음악을, 다른 한 사람은 책을.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창조를 향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는 것. 하기 쉬운 말로,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은 자신만의 창조적인 유산을 대중들에게 내놓았고, 그들의 예술적 성채를 향유하는 것은 남은 사람들이 되겠죠. 나나 당신이나 말이에요.
그래도, 그것은 남은 자의 해석일 뿐, 정작 그 사람들은 미치도록 살고 싶었을 거란 생각을 해요.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 전 그말을 여전히 믿고 있거든요. <잠수종과 나비>의 '장 도미니크 보비'(마티유 아말릭) 역시 그랬을 겁니다. 그는 세계적인 패션전문지 '엘르'의 최고 편집장이었죠. 그 정도의 위치와 지위라면, 정말 잘 나가는 선수죠. 아마, 허풍을 좀 가미하자면, '런웨이'를 들어올렸다 내려놨다, 하는 정도의 권력이었겠죠. 나는 새는 아니라도, 위풍당당한 디자이너나 모델도 떨어뜨릴 정도 아니겠어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의 사성제,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어설프게 대입해, 그를 볼까요.^^;
苦. 상류사회의 꽃이었던, 장 도미니크도 갑작스레 찾아든 '감금 증후군(Locked-In syndrome)' 앞에선 손 쓸 도리가 없어요. 사실, 생로병사를 격는 생, 그 자체가 고통이지만, 갑작스레 직면한 '병' 앞에서 전혀 다르게 접하게 된 세계, 즉 또 다른 시작이 그를 지배하네요. 새로운 세계에서 맞닥뜨린 고.
集. 갑작스레 쓰러지고 20일 후에 눈을 떴을 때, 의식은 있으나 신체가 마비상태였다면 어떻겠어요. 그것은 '절망'이라는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지 않을까 싶어요. 마음 속의 번뇌와 갈등.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고를 만든 것은, 그의 '살아있는' 의식이지요. 장 도미니크가 의식을 회복하고, 눈꺼풀로 처음 만든 문장이 "나는 죽고 싶다"였어요. 아~, 싶더군요. 그 고를 맞닥뜨리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집.
滅. 장 도미니크의 신체에서 자유로운 것은 오로지, 한쪽 눈꺼풀이에요. 절망 앞에 내쳐진 셈이죠. 그러나, 그 의식마저 신체의 볼모가 되게끔 두지 않아요. 그렇다면, 죽음을 택하느냐. 천만에요. 그 자의식 강한 엘르의 편집장이 순순히 생존을 포기하면 안되죠. 부처는 말했다죠. "나는 심지를 끌어내린다. 불길이 꺼지는 것, 그것이 마음의 구제이다." 그것은 죽은 후가 아닌, 살아있을 때 가능한 열반을 뜻하는 거래요. 그의 선택은 그래서, 자신이 당면한 고의 원인인 '의식'을 해방시키는 것이에요. 스스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경지까지, 그는 스스로를 끌어올려요. 그는 자신의 감정들을 자유롭게 노닐게 만들면서 제어해요. 해탈과 열반의 경지, 절대자유와 절대평화의 세계를 향한 멸.
道. 그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장 도미니크가 수행의 도구로 삼는 것은 바로 '책'이에요. 신체에서 홀로 자유로운 눈꺼풀의 깜빡임을 통해. 출판사 직원이 알파벳을 읊으면, 원하는 단어에서 눈을 깜빡거려요. 말이 쉽지. 그의 수행은 처절한 사투랍니다. 그에게, 어쩌면 '눈 깜짝할 새'는 시간의 흐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얼마나 처절하고 놀라웠냐고요. 15개월 동안 20여만번을 깜빡거렸다네요. 그리고 나온 것이 ≪잠수종과 나비≫라는 수기에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는 멀고도 험한 길을 걸었죠. 멸에 도달하는 수행방법으로서 택한 도.
그러나, 결국 장 도미니크는 죽어요. '고집멸도'의 결과물인 책이 출간된 그 주에.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 실존 인물이 그랬대요. 안타까우면서도, 그는 그 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짜냈구나, 싶었어요. 책을 완성하겠다는 의지와 긴장이, 영혼이 그를 지탱하지 않았을까요.
영화의 시선도, 그에게 감정이입이 용이하도록 만들어졌더군요. 카메라의 뷰파인더는 그의 고통에 삼투하는 방법을 택해요. 관객은 그의 시각에서 세계를 보는 경험을 하게 되죠. 어쩌면, 그 고집멸도를 그대로 흡수하게끔 선택한 방법 같았어요. 감독의 계산에 의한 것이었겠지만. 색다른 시선이었던 것은 분명해요.
<잠수종과 나비>은 은유적인 제목이에요. 원시적인 잠수복을 뜻한다는 '잠수종'은 장 도미니크가 처한 육체적인 상황을 설명하죠. '나비'는 그 잠수종을 벗어나 자유롭게 날고 싶은 영혼을 말하구요. 그는 갑작스레 당면한 현실은, 열쇠 없는 잠수종이죠. 말과 움직임이 봉쇄당한. 그래서 그가 찾은 열쇠는 한쪽 눈꺼풀의 깜빡임을 이용한 책이고, 그는 결국 나비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저는 그의 고집멸도를, 단순하게 '생에 대한 의지'라고 쓰고 싶진 않아요. '영혼이 자유로우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싶지도 않구요. 저는 무엇보다, 그가 몸의 침묵 속에서도, 세세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마음의 이야기들이 더 인상 깊었어요. 살아있음으로 인해, 우리가 품고 있는 마음과 그 흔들림 말이에요. 잠수종에 갇힌 그가 예쁜 간호사를 보면서 성적 판타지를 꿈꾸기도 하고, 곁에서 병구완을 하는 아내보다 찾아오지 않는 애인을 더욱 그리워하기도 하는 그의 마음이, 어찌된 일인지 더 애틋하기까지 했어요.
또, 그가 생의 의지를 불태우다가도, 느닷없이 생에 대한 염증을 발산하기도 하는, 그런 마음의 흔들림에도요. 그것이 어쩌면, 그를 끝까지 지탱시켜준 동력이 아닐까도 생각해봐요. 우리, 그냥 흔들리는 대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굳게 지어먹은 마음이래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꺾이고, 아침의 주림도 저녁의 다담상으로 잊는 것이, 우리네 사람살이 아니던가요. 우리의 영혼도, 상상도, 마음도, 나비의 나풀거림처럼 흔들리면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 물론 정치적 잇속에 따라 정당 바꿔가며 흔들리는 정치모리배들의 행태 같은 것 말구요.
참, 그리고 장 도미니크 보비의 현실에서는,
마비된 그를 곁에서 지켜준 것은 애인이었고,
마비 전에 헤어진 전 부인은 그냥 헤어진 채로 있었다네요. ^^;
2008/02/14 - [메종드 쭌/기억의 저편] - ▶◀ 남들도 모르게 울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