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종드 쭌/무비일락
(강)용석이 패거리 134명 제명하는 법
낭만_커피
2011. 9. 8. 23:39
요즘, 딱 그 꼴이다. 2004년 대통령 탄핵안을 들고
나왔던 패거리들의 동어반복. 숫자만 달라졌을 뿐,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 국회의 패거리주의는, 몰래하고 싶었으나 뽀록난 동료 사랑이다.
공공연하게 성희롱을 하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강)용석이를 국회의원에서 잘라내자는 안건이 부결됐다. 국회에서!
눈물 나는
동료사랑이다. 재적 의원 297명 중 198명의 찬성표만 얻으면 용석이의 주리를 틀 수 있었다. 제명이 됐어요~ 이리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찬성은 111표였다. 반대는 무려 134표. 미친 게지. 이놈들, 더 이율배반적인 건, 앞서의 행동이 결국 가식이었음을 드러낸
거다. 그 주둥이 서식지인 한나라당은 이미 용석이가 당원조차 될 수 없다며 출당을 결의했고, 국회 윤리위원회는 제명안을 통과시킨 바 있었다.
그런데도 결과는 애틋한(?) 동료 사랑이다.
그러니 세간에 떠도는 이 말이 틀리지 않다.
"강용석은 여대생을 성희롱하고 국회는 국민을 성추행했다."
띠바, 졸지에 성추행 당한 거다. '용석이를 사랑하는 국회의원 모임(용사모)'에 의해.
이런 식으로 또 당하게 될지 몰랐다. 134명의 패거리에 의한 집단 성추행이라니.
민의 운운할 수가 없다. 용석이의 나불댐이 결국 나의 일인양, 덮어주고 감싸안는 폼이라니.
'침묵하고 있는 다수 혹은 소수의 목소리'임을 자임하는 (김)형오의 내리사랑에 그저, 저놈들의 주둥이는 희롱을 일삼지 않으면 가시가 돋나 보다,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애정남(<개그콘서트>의 한 코너,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에게 물어보자.
패거리들, 언제 제명하면 될까?
애정남이 정리합니다잉~
2012년 4월! (총선이다잉~)
좀 남았긴 해도, 이때 싹 쓸어버립니다잉~ 제명해버립니다잉~
예전 2004년의 193부대원들,
정리해 놓고 역시 똑같은 엇비슷한 놈들이 들어선 기억이 있긴 해도,
정리할 거, 쓸어버릴 거, 제명해 버려야할 것들,
김영희씨 말처럼 "제명이 됐어요~"라고 말해줘야 하지 않겠나.
(안)철수 사용도 잘 하고, (박)원순 활용도 잘 해서,
이젠 성추행 그만 당하고 싶으다. 똥꼬가 다 아프다. 된장.
2011년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패거리주의의 창궐은,
2004년의 기록과 별반 다르지 않은 터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 패거리들도 믿지 마세요.
지랄을 벗 삼고 있는 193부대원들
시절이 하수상타. 시국이 시국이고 정국이 정국이다. 평소에도 전혀 ‘국민’을 안중에 두지 않고 지 멋대로들 의회권력을 휘두르던 작자들이 개차반과도 같은 짓거리를 저질렀다. 일명 ‘193부대원들’. ‘대통령 목 따러 왔시다’를 외치는 이 작자들은 ‘(국민)실망도’ 훈련만 잔뜩 받은 주제에 ‘하야해라’를 외치고 다닌다(실망도에서 훈련이 너무 잘 된 탓일까).
그런데 만행을 저지르고 보니 시민들의 역습이 만만치 않다. 딴에는 ‘국민 나부랭이’라고 우습게 봤는데 의외로 반발이 거센 것이다. ‘여론 조작’이니 ‘편파 보도’니 (자신들이 보기에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수세(!)를 설명하기 위해 치졸한 이유를 갖다대고 있지만 그것도 신통치 않다.
저잣거리의 모리배들도 쓰기 민망할 수준의 정치적 행위를 국회에서 태연자약하게 저지르는 그들의 광분을 설명할 길은 당최 없다. 쪽수 많다고 밀어붙이면 당연히 될 거라는 단세포적인 발상을 그대로 밀어붙인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도 불과 1년 전만 해도 정치적인 태생의 근본이 서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두 정당이 짝짜꿍을 하면서까지 말이다. 정치꾼들의 모략이야 어느 나라 정치판에도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이건 전 세계의 웃음꺼리로까지 전락하면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데에야 할 말을 잃는다.
그렇지만 시민들이 가만있을 리가 있나. 시민사회의 또 다른 이정표를 만들어주기 위해 그런 대대적인 대국민 이벤트를 만들어주는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수는 없지 않냐’는 말이다. 그들의 광란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줄 때다. 한마디로 대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면 제대로 쳤어야 했다. 그들은 아직 제대로 된 사기를 쳐 보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어림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국회로 들여보내기엔 미숙아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판명됐다. 딴나라의 정당 같은 거대야당의 대변인으로 잽싸게 변신한 한 비열한 비유나 독설의 대명사, 또라이 한 여성 대변인의 표현을 빌자면 그 미숙아들을 인큐베이터에 넣어 배양을 더 시켜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아지리란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자고로 정치인들은 사기를 제대로 쳐야만 한다. 그것도 한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4년 생명을 연장시키고 말고를 결정할 국민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기도 아무나 치는 것이 아니다. 사기를 치기 위해서는 우선 상황에 맞는 표정 연기부터 상대방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적절한 어휘 구사와 의사 전달력을 기본적으로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구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진심 같은 게 느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김하늘이 가르쳐주는 ‘사기술’의 핵심이다. 주인을 배반하고 거대 사기를 꿈꾸는 193명의 모리배들이 벤치 마크할 대상은 바로 영화 속에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 중에 아무도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이 영화를 봤다면 그런 무지몽매한 작당모의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뻔뻔하고 새디스틱한 드라마에 국민들을 빠져들게 만들려면 그 정도로 해선 안 된다.
막 출옥한 사기꾼 구라걸, 그녀(주영주)가 구가한 ‘술수’는 가히 물이 올라있다. 관객들은 그녀의 사기를 빤히 알면서도 제목처럼 속아 넘어가주는 ‘관용’을 베푼다. 희철(강동원)이 제 아무리 집안 식구들을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그녀를 믿지 마세요”라고 부르짖어도 희철은 파렴치한이나 망나니로 몰릴 뿐이다. 그만큼 그녀의 사기술은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지금 그 ‘반국민’ 기치를 든 그들의 작태에 관용을 베푸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기죄’로 복역 중인 영주는 언니 결혼을 맞아 절묘한 능청 연기로 가석방을 받을 정도로 ‘구라’의 귀재다. ‘지랄을 벗 삼고 있는’ 동료들의 연기를 지도하면서 그녀는 구라가 ‘천부적’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193부대원들의 귀감이다. 국민들을 상대로 ‘지랄을 벗 삼는’ 연기로는 당최 통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실망도’에서 빠져나와 사기계에서 좀 더 내공을 쌓아야 한다.
그렇다고 희철처럼 국민이 순박하지만은 않다. 국민들이 청양고추를 입안으로 우악스럽게 집어넣는 ‘고추 청년’일 리는 만무하다는 얘기다. 그 사실은 국회의원들에겐 또 하나의 장애물이다. 영주와 같은 천부적인 사기꾼도 한 동네는 홀라당 구라로 장악했지만 국민들은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런데 이 거짓말 풍선만 잔뜩 불고 있는 193부대원들이 국민들을 상대로 제대로 ‘구라’를 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거짓말로 범벅된 그녀의 이야기는 다소 억지스럽지만 진실로 변모한다. 그리고 희철을 향한 그 숱한 학대와 갈굼에도 불구, 영주는 사랑을 얻는다. 그러나 193부대원들의 이야기는 그리 만만치 않다. 국회 안에서 ‘그들만의 리그’ 만들어 놓고 놀 줄만 알았지 바깥 돌아가는 사정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으니 영주처럼 사랑마저 획득하는 일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의 193부대원들도 열라 “우리의 충정을 믿어 달라”고 짖어대고 있지만 그들은 여기저기서 누수 현상만 드러날 뿐 역시 명분도 근거도 없는 아우성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기광풍’은 분명 응징을 받아야 마땅할 뿐 아니라 언젠가 193부대원들의 공갈·협박을 그린 ‘사기의 추억’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국민들은 3월12일 국회에서 행한 193부대원들의 만행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법을 가장한 의회의 권력 남용 쿠데타는 그렇지 않아도 그 동네의 오욕에 지겨워하던 국민들에게 “짜증 다양하게 밀려오네!”라는 말을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애정빙자사기극’이었던 영주의 좌충우돌은 다소 무리가 있어도 애정을 획득하게끔 마무리됐다. 그러나 ‘국민빙자사기극’을 감당하기에 193부대원의 허접함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라던 희철의 몸부림은 “그녀를 사랑합니다”라고 바뀌었다. 그러나 “우리를 믿어주세요”라던 193부대원들의 공허한 메아리는 “너희들을 탄핵하리라”는 국민들의 함성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문명비판가인 롤랑 바르트는 “이분법 사라지는 곳에 낙원이 있다”고 얘기했지만, 어디 인간사에 ‘낙원’(樂園)이란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더구나 193부대원들이 활용하는 것은 악랄한 이분법 구도다. 어떤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논리적 도구 등 이분법이 유용한 때가 있으나, 193부대원들은 그것을 분할과 배제의 장치이자 선악과 우열의 절대적 판단 근거로 삼고 있다. 바로 친노와 반노라는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구도를 들어 국민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상대다. 21세기에도 국민을 상대로 한 사기가 먹혀들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낙원까지 바라는 국민은 없다. 다만 응징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국민 인식과 “우리 아니면 안 된다”라는 헛된 망상이다.
그러니 세간에 떠도는 이 말이 틀리지 않다.
"강용석은 여대생을 성희롱하고 국회는 국민을 성추행했다."
띠바, 졸지에 성추행 당한 거다. '용석이를 사랑하는 국회의원 모임(용사모)'에 의해.
이런 식으로 또 당하게 될지 몰랐다. 134명의 패거리에 의한 집단 성추행이라니.
민의 운운할 수가 없다. 용석이의 나불댐이 결국 나의 일인양, 덮어주고 감싸안는 폼이라니.
'침묵하고 있는 다수 혹은 소수의 목소리'임을 자임하는 (김)형오의 내리사랑에 그저, 저놈들의 주둥이는 희롱을 일삼지 않으면 가시가 돋나 보다,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애정남(<개그콘서트>의 한 코너,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에게 물어보자.
패거리들, 언제 제명하면 될까?
애정남이 정리합니다잉~
2012년 4월! (총선이다잉~)
좀 남았긴 해도, 이때 싹 쓸어버립니다잉~ 제명해버립니다잉~
예전 2004년의 193부대원들,
정리해 놓고 역시 똑같은 엇비슷한 놈들이 들어선 기억이 있긴 해도,
정리할 거, 쓸어버릴 거, 제명해 버려야할 것들,
김영희씨 말처럼 "제명이 됐어요~"라고 말해줘야 하지 않겠나.
(안)철수 사용도 잘 하고, (박)원순 활용도 잘 해서,
이젠 성추행 그만 당하고 싶으다. 똥꼬가 다 아프다. 된장.
2011년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패거리주의의 창궐은,
2004년의 기록과 별반 다르지 않은 터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 패거리들도 믿지 마세요.
지랄을 벗 삼고 있는 193부대원들
시절이 하수상타. 시국이 시국이고 정국이 정국이다. 평소에도 전혀 ‘국민’을 안중에 두지 않고 지 멋대로들 의회권력을 휘두르던 작자들이 개차반과도 같은 짓거리를 저질렀다. 일명 ‘193부대원들’. ‘대통령 목 따러 왔시다’를 외치는 이 작자들은 ‘(국민)실망도’ 훈련만 잔뜩 받은 주제에 ‘하야해라’를 외치고 다닌다(실망도에서 훈련이 너무 잘 된 탓일까).
그런데 만행을 저지르고 보니 시민들의 역습이 만만치 않다. 딴에는 ‘국민 나부랭이’라고 우습게 봤는데 의외로 반발이 거센 것이다. ‘여론 조작’이니 ‘편파 보도’니 (자신들이 보기에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수세(!)를 설명하기 위해 치졸한 이유를 갖다대고 있지만 그것도 신통치 않다.
저잣거리의 모리배들도 쓰기 민망할 수준의 정치적 행위를 국회에서 태연자약하게 저지르는 그들의 광분을 설명할 길은 당최 없다. 쪽수 많다고 밀어붙이면 당연히 될 거라는 단세포적인 발상을 그대로 밀어붙인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도 불과 1년 전만 해도 정치적인 태생의 근본이 서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두 정당이 짝짜꿍을 하면서까지 말이다. 정치꾼들의 모략이야 어느 나라 정치판에도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이건 전 세계의 웃음꺼리로까지 전락하면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데에야 할 말을 잃는다.
그렇지만 시민들이 가만있을 리가 있나. 시민사회의 또 다른 이정표를 만들어주기 위해 그런 대대적인 대국민 이벤트를 만들어주는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수는 없지 않냐’는 말이다. 그들의 광란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줄 때다. 한마디로 대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려면 제대로 쳤어야 했다. 그들은 아직 제대로 된 사기를 쳐 보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어림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국회로 들여보내기엔 미숙아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판명됐다. 딴나라의 정당 같은 거대야당의 대변인으로 잽싸게 변신한 한 비열한 비유나 독설의 대명사, 또라이 한 여성 대변인의 표현을 빌자면 그 미숙아들을 인큐베이터에 넣어 배양을 더 시켜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아지리란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자고로 정치인들은 사기를 제대로 쳐야만 한다. 그것도 한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4년 생명을 연장시키고 말고를 결정할 국민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기도 아무나 치는 것이 아니다. 사기를 치기 위해서는 우선 상황에 맞는 표정 연기부터 상대방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적절한 어휘 구사와 의사 전달력을 기본적으로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구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진심 같은 게 느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김하늘이 가르쳐주는 ‘사기술’의 핵심이다. 주인을 배반하고 거대 사기를 꿈꾸는 193명의 모리배들이 벤치 마크할 대상은 바로 영화 속에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 중에 아무도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이 영화를 봤다면 그런 무지몽매한 작당모의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뻔뻔하고 새디스틱한 드라마에 국민들을 빠져들게 만들려면 그 정도로 해선 안 된다.
막 출옥한 사기꾼 구라걸, 그녀(주영주)가 구가한 ‘술수’는 가히 물이 올라있다. 관객들은 그녀의 사기를 빤히 알면서도 제목처럼 속아 넘어가주는 ‘관용’을 베푼다. 희철(강동원)이 제 아무리 집안 식구들을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그녀를 믿지 마세요”라고 부르짖어도 희철은 파렴치한이나 망나니로 몰릴 뿐이다. 그만큼 그녀의 사기술은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지금 그 ‘반국민’ 기치를 든 그들의 작태에 관용을 베푸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기죄’로 복역 중인 영주는 언니 결혼을 맞아 절묘한 능청 연기로 가석방을 받을 정도로 ‘구라’의 귀재다. ‘지랄을 벗 삼고 있는’ 동료들의 연기를 지도하면서 그녀는 구라가 ‘천부적’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193부대원들의 귀감이다. 국민들을 상대로 ‘지랄을 벗 삼는’ 연기로는 당최 통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실망도’에서 빠져나와 사기계에서 좀 더 내공을 쌓아야 한다.
그렇다고 희철처럼 국민이 순박하지만은 않다. 국민들이 청양고추를 입안으로 우악스럽게 집어넣는 ‘고추 청년’일 리는 만무하다는 얘기다. 그 사실은 국회의원들에겐 또 하나의 장애물이다. 영주와 같은 천부적인 사기꾼도 한 동네는 홀라당 구라로 장악했지만 국민들은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런데 이 거짓말 풍선만 잔뜩 불고 있는 193부대원들이 국민들을 상대로 제대로 ‘구라’를 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거짓말로 범벅된 그녀의 이야기는 다소 억지스럽지만 진실로 변모한다. 그리고 희철을 향한 그 숱한 학대와 갈굼에도 불구, 영주는 사랑을 얻는다. 그러나 193부대원들의 이야기는 그리 만만치 않다. 국회 안에서 ‘그들만의 리그’ 만들어 놓고 놀 줄만 알았지 바깥 돌아가는 사정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으니 영주처럼 사랑마저 획득하는 일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의 193부대원들도 열라 “우리의 충정을 믿어 달라”고 짖어대고 있지만 그들은 여기저기서 누수 현상만 드러날 뿐 역시 명분도 근거도 없는 아우성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기광풍’은 분명 응징을 받아야 마땅할 뿐 아니라 언젠가 193부대원들의 공갈·협박을 그린 ‘사기의 추억’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국민들은 3월12일 국회에서 행한 193부대원들의 만행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법을 가장한 의회의 권력 남용 쿠데타는 그렇지 않아도 그 동네의 오욕에 지겨워하던 국민들에게 “짜증 다양하게 밀려오네!”라는 말을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애정빙자사기극’이었던 영주의 좌충우돌은 다소 무리가 있어도 애정을 획득하게끔 마무리됐다. 그러나 ‘국민빙자사기극’을 감당하기에 193부대원의 허접함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라던 희철의 몸부림은 “그녀를 사랑합니다”라고 바뀌었다. 그러나 “우리를 믿어주세요”라던 193부대원들의 공허한 메아리는 “너희들을 탄핵하리라”는 국민들의 함성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문명비판가인 롤랑 바르트는 “이분법 사라지는 곳에 낙원이 있다”고 얘기했지만, 어디 인간사에 ‘낙원’(樂園)이란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더구나 193부대원들이 활용하는 것은 악랄한 이분법 구도다. 어떤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논리적 도구 등 이분법이 유용한 때가 있으나, 193부대원들은 그것을 분할과 배제의 장치이자 선악과 우열의 절대적 판단 근거로 삼고 있다. 바로 친노와 반노라는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구도를 들어 국민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상대다. 21세기에도 국민을 상대로 한 사기가 먹혀들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낙원까지 바라는 국민은 없다. 다만 응징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국민 인식과 “우리 아니면 안 된다”라는 헛된 망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