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종드 쭌/무비일락

살아야겠다, 버티고 견뎌야겠다!

낭만_커피 2010. 9. 14. 16:37
세 여자는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 또한 나를 낳고 키운 곳에서 그들은 학교를 다녔다. 우연하게도 한 시대를, 한 공간을 공유했을 거라는 짐작.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더욱 눈이 갔고, 마음도 그를 따랐다.

<땅의 여자>의 세 여자, 강선희, 변은주, 소희주 씨는 스스로 농촌에 발을 담았다. 농사꾼(농민)이 됐다. 어떤 로망도 자그맣게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의지의 결정체에 가깝다고 여겨졌다. 학창시절, 농활이나 운동 등을 통해 그들에게 자리 잡은 정신적 근력이 그들을 이끈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의 선택은 운동에 의한 관성도 따랐을 것이다. 농민운동을 통해 새겨진 사명 같은 것. 그런 한편, 애초 그들에게 허울 좋은 귀농이나 전원생활은 그림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고하고 보수적인 농촌에 작당하고 뛰어들 도시 여자(들)는 흔치 않다. 사명감이면서 꿈. 도농 간의 벌어진 간극을 메우며, 농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세상의 일부를 바꾸고 싶었을.

하지만 어떤 결단이든 만사형통을 보장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 어떤 강고한 의지나 결정도 현실 앞에선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십 년을 훌쩍 넘어선 세월, 견고한 일상은 그들을 이미 삼켰다. 햇살은 맑고, 논밭에 일렁이거나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농작물은 탐스럽다. 그녀들의 모습 또한 같을까. 마냥 그렇진 않다. 멀찍이 바라보는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달리 그녀들의 표정에선, 고단함이 묻어난다. 그 자연은 그녀들에겐 때론 형벌일 테니.

그게 무엇인지, 일상을 버티고 견디는 이라면 감지할만하다. 일상이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의지 이상이다. 누군가의 며느리요, 아내이자, 어머니, 이웃이기까지. 관계는 생의 동력이면서도 생을 버겁게 만드는 무엇이다. 그들이라고 처음 발을 디딜 때부터 하나였을까. 품은 뜻은 같았지만, 각자 처한 현실은 미세하게 틈을 벌려놓기 마련이다. 때론 그들은 서로에게 비수를 들이대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요, 일상이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는 명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선택이지만, 그 선택은 때론 굴레다. 내동댕이치고 싶을 때가 그들이라고 왜 없었을까. 소희주 씨가 여성 농민들을 만나러 나가는 밤. 그녀의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있고 싶다고 ‘땡깡’을 부린다. 그걸 뿌리치고 나가야 하는 그녀의 선택. 차 안에서 그녀는 나지막하게 말한다. “저렇게 떼어놓고 가면 애들한테 안 좋겠지?” 아, 어쩌란 말인가.

남편이라고 눈이 곱지 않다. 뜻 맞아 함께 살 붙이고 사는 남편이라지만, 아내가 외부 일에 더욱 신경을 쓰니,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서운한 눈치다. 변은주 씨는 공동체를 꿈꾸며 사회복지사 공부를 한다. 하지만 시댁은 이를 반대한다.

뭣보다, 강선희 씨가 그토록 죽이 잘 맞던 시어머니와 사이가 벌어지고야 마는 사건 앞에선 어쩔 수 없는 일상과 관계의 강고함을 느낀다. 농사는 기본이요, 가족을 지탱하는 와중에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지역 정치활동에도 열심이던 그녀. 병든 남편의 수발까지 함께다. 강고하고 보수적인 농촌에 새로운 정치적 역량을 불어넣고자 국회의원에 출마하지만 떨어진다. 결정타는 남편의 죽음. 며느리를 믿고 밀어주던 시어머니는 그 지점에서 멀어진다. 


솔직히 나는 그 일상이라는 존재가 버겁다. 밤이 되면 무심코 내려놓기도 하는 일상의 무게이건만, 그건 모르핀이다. 아주 잠깐의 안도. 이런 일상을 그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아니 생각했다손, 막상 맞닥뜨리는 일상의 강퍅함은 다른 문제다.

물론 오해하지 마시라. 이 다큐는 기본적으로 이런 일상의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는다. 순간순간 그들은 희열과 마주대하며, 일상적 행복에 유기농 미소를 지운다. 그들은 일상적 무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뚜벅뚜벅 자신의 선택에 뒤돌아보지 않는다. 앞으로 나갈 뿐이다. 아, 저들 역시 내가 아는 많은, 가장 보통의 존재. 그렇기에 이것은 긍정의 현실이다. 세상과 싸우고 때론 고됨과 아픔, 상실에 노출되지만, 그들은 그것을 감내하는 법을 안다. 그야말로 도망가지 않고 맞장 뜸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삶의 선물.

이 영화, ‘순도 100% 유기농 다큐’라는 카피가 붙어있지만, 유기농에 대한 환상은 없다. 생태주의적 삶을 다루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가장 보통의 존재가 삶을 꾸리는 현장을 본 것이다. 학창시절의 앳된 얼굴은 세월의 더께 앞에 무너졌다. 하지만 그것은 세월의 훈장이다. 나이듦이 자연스러운, 더구나 일상을 버티고 견디는 존재에 대한 경이감. 여느 농촌의 아낙네가 된 그들의 말간 얼굴이 주는 청량함. 땅의 여자다.

여성을 말할 때, 늘 여신이나 선생님 타령이나 해대는 가장 보통의 수컷에게, <땅의 여자>는 또 다른 여성의 얼굴을 보여준다. 여신 포스가 아니라도, 선생님 포스가 아니라도, 땅과 바람과 햇살과 일상과 노동의 시간이 만들어준 장삼이사의 포스. 


나를 돌아봤다. 나는 농부의 손자다. 하지만 시티 키드로 태어나 자란 내게, 이십대까지 농촌은 도시문명보다 한참 뒤떨어진, 그닥 발 딛고 싶지 않은 공간이었다. 농활 한 번 제대로 가질 않았다. 아니 가기 싫었다. 어린 시절, 농촌은 내게 심심함과 무료함, 고된 일거리만 가득한 공간이라는 경험 때문에. 죽도록 일만 하시면서도, 그만한 대우나 대접을 받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큰 아버지를 보면서, 학교나 어른들의 말씀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농촌이 우리의 젖줄이라느니, 농부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는 말씀은 그저, 교과서에서만 메아리치는 박제된 언어였다.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공허함.

지금의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올해, 내게 가르침과 울림을 안겨줬던 분들 덕분이다. 이분들은 하나 같이 도시를 떠나 농촌에서 농사를 짓거나 공동체를 꾸리거나 자연에 가까운 삶을 영위하는 등 '다른' 삶도 있음을 보여주고 알려주셨다. 나는 어느덧, 서울을 떠나 농사지으면서 살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물론 아직 낭만이자 로망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 그것이 얼마나 치열한 현실이고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밀어붙여야 하는 것인지 보여준다.

그럼에도, 나는 이말에 동의한다. “농사꾼으로서의 삶이란 도시의 그것보다 더욱 꽉 찬 일상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많은 것을 일상적으로 요구하는 도시보다 꽉 찬 삶,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 씩씩한 언니들의 이야기는 좀 더 강력한 의지와 실천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줬다. 나는 ‘그리 사는 그들이 좋’았고, 차츰 나를 달궈서 ‘땅의 남자’로 살아가는 나를 꿈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한다. 세상은 그런 장삼이사들이 밀어붙이는 노동에 의해 굴러간다. 살아야겠다. 버티고 견뎌야겠다.

과거. 얼마되지도 않았다. 우리 조상들은 땅의 기운을 믿고 땅이 생명의 근원임을 알았다. 그래서 땅에 대한, 대지를 향한 경외심이 대단했다. 물론, 지금은 그 과거를 배신(?)했다. 땅은 그저 재산증식의 일환이자, 투기적 대상이다. "돈이 최고다"라는 화폐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시대. 그 시대를 거슬러 땅의 진짜 기운과 만나고 싶다. 커피 역시 땅의 힘이 절대적이다. 커피 만드는 사람으로서, 땅을 존중하고 경외해야 할 충분한 이유다.   

세간의 기준에선 루저인 나도 그래서, 당당하게 말하련다.
“나는 이래 사는 내가 좋다.”
내가 선택한 길이고, 그녀들처럼 걸어가고 싶다.
인생 뭐 있나. 그냥 경운기의 속도로 가면 되는 거지.

몸 생각해서 유기농 찾아서 먹는 당신,
마음 생각한다면, 이 유기농(영화) 찾아가서 섭취하면 딱 좋겠다.
건강해진다. 장담한다. 아니면, 손해배상 청구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