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종드 쭌/사랑, 글쎄 뭐랄까‥

구름 너머의 약속을 지키는 방법

낭만_커피 2010. 7. 31. 23:16
몇 년 전. 아마도, 봄의 끝-여름의 시작 무렵이었을 거야. 콘서트를 봤어. 노래가 흘렀고, 사람들이 환호했으며, 이야기가 넘쳤다지.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약속이 있었어. 무대로 한 쌍의 커플이 불려 올라갔고, 여느 무대에서나 볼 법한, 흔해빠진 프로포즈 타임이 펼쳐졌어. 남자가 사연을 보내서 채택이 됐나 봐. 사실 그런 프로포즈, 사랑 그 자체의 사랑보다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용 쓰는 투쟁 같은 측면도 있지만, 때론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뭉클할 때가 있지. 이 날 이때가 그랬어.

정확한 사연은 기억나질 않아. 다만, 손발 오그라들었다는 정도. 블라블라, 이야기를 풀던 구애남이 마침내 던진 결정구는 이것이었어. "Will you mary me?"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줄래? 익히 예상했던 말. 더 나가보자면, 뻔하고 식상하며 상투적인 그 말.

그럼에도 아! 그 순간은 마법 같은 순간이었어.

주술이었을까. 그 구애남, 혹시 연애술사? 호잇~


여자는 이 프로포즈를 기꺼이 받아들였어. 아마도 두 사람, 여길 오기 전, 사전 교감이 있었겠지. 두 사람에게 장래 계획을 물었더니, 이 구애남, 준비라도 해 둔 양, 좔좔좔 보따리를 푼다. 연인과 꿈꾸는, 행해야 할 혹은 행하게 될 행위를 나열한다.

그건 약속이었어, 약속. 자신의 연인을 향한, 수많은 관객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증명 받기 위한. 그 약속, 어쩌면 시간의 풍화작용 앞에 탈색돼 버리거나 날아갈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런 염려를 퉁~쳐버렸다. 그 남자의 진심일 확률 99.587%. 여기는 곧, 그 연인의 약속의 장소.


모르긴 몰라도, 그 약속, 실행 여부와 상관없이, 구애남의 삶 일부를 규정하는 무엇으로 자리매김했을 거야. 물론, 두 사람의 이후 행보는 몰라. 결혼을 했거나, 헤어졌거나, 아니면 여전히 결혼하지 않은 연인으로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약속, 지키고 있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졌거나.



약속은 때론 분명, 그럴 수도 있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무엇이 될 수 있지. 깨지라고 있는 것이 약속이라는 말도 있지만, 깨려고 하지 않아도 깨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지만, 빛으로 물든 세상의 중심에 있는 누군가를 향한 약속이라면, 그건 거부할 수 없는 계시!!!

히로키에게도,
사유리는 그런 존재였지.


“사유리가 빛으로 물든 세상의 중심에 있는 듯이 보였다.”


반짝반짝 눈이 부셔, 예예예예~♪

맞아. 내 또 다른 블로그가 품고 있는 그들이야. 사유리와 히로키. 그래서, 블로그 타이틀도,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을 그대로 딴. 얼마나 이 작품을 알싸하게 봤으면 타이틀을 그대로 붙였겠어, 그치? ^^ 넌 이미 눈치 채고 있었지?

모든 것은, 약속에서부터 비롯된 거야. 빛으로 물든 세상의 중심, 사유리에게 던진 히로키의 약속. 언젠가 방과 후에 했던 히로키의 다짐. 아, 그러고 보니, 그때도 여름이었구나. 딱히 시대를 알 수 없는 일본의 한 작은 도시. 중학생 히로키가 절친인 타쿠야와 함께 매혹된 것은, 동경하는 것은, 츠가루 해협 사이에 국경너머로 솟아있는 거대한 탑이었어. 더불어 히로키에게 절대 동경의 대상이었던 사유리. 아, 아름다운 소녀.

내게도 그때, 여름이었다.

모든 약속은 여름에 하는 것일까. 그건 모르겠다. 어쩌다가 여름이라는 계절이 맞물렸을 뿐이겠지. 노을, 가지를 내린 가로수, 가로등 불빛, 우리 마음을 비춰주던 그해 여름의 풍경. 아직도 난 기억해. 넌 그날 우리가 걷던 그 길이 그려지니. 

구름, 햇살, 노을, 손등을 기어가는 작은 무당벌레. 히로키에게도 그런 날이었어. “난 저 탑까지 갈 거야.” 다짐이었고, “너와 함께”는, 약속이었지.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이 될지라도, 그때만큼은 진심이었어. 히로키는 늘 그 탑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만큼 절박했으니까. 매우 중요한 뭔가가 거기에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는 거기에 가야했던 거야.


하루키에게 그 특별했던 여름. 이곳에서 사유리와 함께 저 탑을 바라보며 했던 조그만 약속. 우리도 아주 조그만 약속이었어. 이루지 못할 무언가도 아니었지. 우리가 다시 돌아갈 그곳에서 만나기만 하면, 대수롭지 않게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다. 물론 그 약속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때의 우리 관계를 규정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됐겠지. 약속을 지키지 못함은, 두 사람의 관계가 끊어졌음을 의미하듯 말이야.  

하긴 아무도 모른다. 그때는, 약속이야 어쨌든, 그곳 그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았으니까. 히로키에게도, 나에게도 그랬어. 약속을 하던 그 시절, 사유리와 세상은 얼마나 빛났던가. 사유리 하나로 세상이 빛날 수 있음을 확인한 이 중학생은 또 얼마나 조숙한 건가. 놀랍지 않나. 물론 그런 나이 따윈 중요하지 않지만, 그의 독백을 듣노라면, 그의 동경이, 그의 애정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쉬이 짐작이 갈 거야.

“3천만 명 이상이 사는 이 도시에서 만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하나 아닌 둘이 있을 때, 그리고 군중 속의 외로움.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는 깨달았나 봐. 이별할 때,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가 없을 때, 위로랍시고 던지는 이 말들. 세상의 반이 여자라고, 세상의 반이 남자라고. 사실, 그건 위로가 되질 않음을 알지? 그 위로, 사실이긴 하지만, 진실은 아니잖아. 그 여자도, 그 남자도, 세상엔 단 하나뿐인 존재거든. 그 여자를 대신할 수 있는 어떤 여자도 없으며, 그 남자를 대신할 남자도 없으니까.

그러나 갑자기 사라진 사유리.
어떻게 된 일이지? 사유리가 사라졌어.


생각해 봤어. 히로키에게 사유리 없는 세상을 버티고 견디게 한 것은, 그 약속이 아녔을까. 히로키에겐 가끔 꿈에서나마 찾아야 하는 사유리였어. 어딘가 차가운 장소에 홀로 남겨진 사유리를 필사적으로 찾는 꿈. 그럼에도 결국 사유리를 찾지 못한 채 깨고 마는 꿈. 그런 꿈에서 깨어나면, 세상에 홀로 남겨져 있는 기분에 시달렸지. 그런 히로키를 버티게 견디게 해 준 것은, 지켜야 할 약속이었을 거야. 내가 그랬기에 말이지.


그래, 그때 내가 먼저 돌아왔잖아. 당신을 여전히 그곳에 두고. 당신 없는 이곳을 버티고 견디게 한 것은, 당신과 내가 나눈 그 약속 때문이었던 것 알아? 아마, 모를 거야. 내가 늘 꿈꾸던 건, 당신과 나눈 약속이 지켜지는 순간이었지.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아마 내 심장은 터져버릴 거라고 확신에 가까운 착각을 하고 있었지, 나는.  

“이제는 이미 아득한 그날, 저 구름 너머에 그녀와 약속한 장소가 있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약속은 현실을 지탱하는 힘인지도 모르겠어. 시간의 풍화작용에 깎이고, 얼룩도 지고 말겠지만, 어떤 순간에 내뱉은 약속은 그런 것들이 별반 무쓸모 아니겠어. 그건 어쩌면 격렬한 아픔이기도 해. 약속을 지키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의구심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니까 말이야. “어느 틈에 난 이런 아픔을 안게 됐을까”라고 되물어도 당최 답이 없는 현실도 있으니까.

사실 히로키가 부러웠던 건, 약속을 지켜서가 아니었어. “널 계속해서 지켜줄게, 약속할게”라는 약속 이후의 약속을 할 수 있어서도 아니었고. 아, 물론 그런 것들이 아예 없다고 하면 새빨간 뻥일 테지만, 그것보다 약속을 향해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 어쩌면 그 기다림, 뼈가 피부를 찢는 듯 격한 아픔이었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언젠가는’이라는,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어서 부러웠다.


내 가난했던 영혼을 채워주었던 당신. 그런 당신과 했던 약속. 그 약속이 영원히 지켜질 수 없는 ‘미제’로 남은 순간을 나는 기억해. 그저 박제되고 봉인되고 만 그 약속. 그래, 기약 없는 기다림 때문에 바람 빠진 자전거처럼 흐느적거리진 않아도 되지만, 대신 자전거 핸들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순간. 줄곧 당신을 향하던 자전거가 갈 곳을 몰라 휘청거려야 했던.

어디에서였더라. 이런 말이 있었어. “나는 한 줄 책에 실린 글귀에 위안을 받고, 퇴근하는 저녁 길에 머리 위로 떠오른 초승달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에 불과했다.” 알다시피, 나 역시 그런 사람이잖아. 한 줄의 약속에 위안을 받고, 매일같이 퇴근길, 약속의 장소를 떠올리며 하루를 지탱했던 나는, 구름의 저편을 원망하며 살아야 했어. 

그래도, 사유리와 히로키는 내게 또 하나의 ‘약속’을 알려줬어. “약속의 장소를 잃은 세상이라도, 그래도 앞으로 우린 살아갈 것이다.” 잃어도, 그것이 내가 아닌 세상에 의한 것일지라도,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것. 어쩌면 히로키가 사유리 없는 세상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약속’이 아니라, 그것이 삶이기에 가능한 게 아녔을까. 두 소년과 한 소녀의 염원이 담긴 비행체 ‘벨라실러’는 그런 생의 욕구를 에너지원으로 삼았던 것은 아녔을까.

함께 탑까지 날아가자던 우리의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됐지만,
우리가 했던 변치 않을 약속은 구름, 햇살, 노을, 손등을 기어가는 작은 무당벌레에도 고마워하면서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는 것. 우리 사회의 취약한 곳과 소외된 세계에 닿았던 당신의 몸과 마음에 가닿을 수 있는 벨라실러를 타고 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또 다른 약속. 나도 히로키를 따라. 당신을 계속해서 지켜줄게, 약속할게. 함께 탑까지 날아가자.